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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집(圓嶠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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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C.0000.0000-20090715.AS_SA_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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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문집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별집류
· 작성주체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6冊 : 無匡郭, 無界, 10行18字 註雙行, 無魚尾 ; 24.7 X 15.3 cm
· 주기사항 書名: 表題에 依함
內容: 龍津集, 圓嶠集, 斗南集, 壽北集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9.94a

안내정보

필사본 10권 6책의 『원교집(圓嶠集)』은 이광사(李匡師)의 문집으로, 그간 알려져 있지 않던 이광사의 시문을 상당수 기록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작품에 창작 연월일이 명기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또한 문집의 글씨는 이광사의 친필로 서예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자가 도보(道甫), 호가 원교(圓嶠)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원교(員嶠)라고도 적는다. 젊은 시절 서대문 바깥 팔각산(八角山)이라고도 부르는 원교(員嶠)에 살았기 때문이다.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는 수북(壽北)이라는 호도 사용하였다. 정종(定宗)의 별자(別子)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예로, 이경직(李景稷), 이정영(李正英), 이대성(李大成), 이진검(李眞儉)로 이어지는 명가의 후손이다.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려는 노론에 맞섰다가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한 후 이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부친 이진검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으며 백부 이진유(李眞儒) 역시 추자도에 유배되었다가 몇 년 후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러한 가문의 화로 인하여 이광사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양수리 인근 양근(楊根)의 용나루, 곧 용진(龍津)에 살다가 1732년 무렵 서대문 바깥의 원교로 거처를 옮겼다. 스승 정제두(鄭濟斗)를 뵙기 위하여 강화도로 가끔 출입할 때를 제외하고 이광사는 원교에서 조용히 살았다. 윤순(尹淳), 김광수(金光遂) 등 고학에 뜻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렸고 이를 바탕으로 이른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만들어내었다.
1755년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다. 남편이 극형에 처해진다는 소문을 듣고 부인유씨(柳氏)는 목을 매고 자진하였다.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글씨에 더욱 전념하였고 이로 인해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광사가 죄인의 몸으로 선비들을 모아 문필을 가르친답시고 백성들을 선동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신지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 신지도의 당골(簹谷)에서 거주하다가 얼마 후 금실(金實)로 옮겨 살았다. 그 후 신지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16년을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구성 및 내용
제1책은 표지 상단 우측에 ‘용진(龍津)원교(員嶠)’라 적혀 있는데, 본문은 『용진집(龍津集)』과 『원교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광사는 부친상을 치른 후 1730년 가족을 이끌고 양근의 용진에 내려가 살았는데 이때부터 1732년까지의 시가 『용진집』에 실려 있다. 『용진집』에 수록된 작품은 수가 매우 적지만 이광사가 젊은 시절 고시(古詩)에 진력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경(詩經)』을 모의한 「잡시삼편(雜詩三編)」은 「삼월사장(三月四章)」, 「산유원위삼장(山有蒝萎三章)」, 「퇴풍사장(頹風四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월사장」은 『시경』의 서(序)처럼 “월왕(越王)이 오(吳)로부터 귀국하여 와신상담하면서 나라 안의 부녀자로 하여금 칡을 채취하고 황사포(黃絲布)를 짓게 하여 오나라에 바쳤다. 오왕이 이에 월의 봉(封)을 높이고 제후의 복식을 내렸다. 칡을 채취하는 여인이 월왕의 마음씀씀이가 고달픈 것을 애달파하여 그 일을 이렇게 읊조렸다.”는 서문을 달았다. 그리고 네 작품 아래에 부(賦)라 하여 비부흥(比賦興)의 체제를 따르고 있음을 밝혔다. 운자 중에 협운(叶韻)까지 표시하였다. ‘부’로 된 「산유원위삼장」은 “옛 군자가 은거하면서 도를 즐기고, 소요하면서 유유자적하였는데 그 뜻을 적는다.”고 하였고, ‘비’로 된 「퇴풍사장」은 “옛 초야의 현자들이 그리움이 있어 근심하여 탄식하는 말을 두었다.”고 하였다. 「삼부염(三婦艶)」도 주목되는 악부시다. 「삼부염」은 고악부의 제목으로 당낙빈왕(駱賓王)의 것이 이름이 높다. 이광사의 것은 오언고시 연작으로 총 6수로 되어 있다.
『원교집』에는 1732년부터 1753년까지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에는 ‘원교집(員嶠集)’이라 하였지만 내제에는 ‘원교집(圓嶠集)’으로 되어 있다. 「원교설(圓嶠說)」을 지은 것은 1752년 3월 3일이지만 『원교집』으로 볼 때 1732년 무렵부터 원교에 살기 시작한 듯하다. 이광사가 젊은 시절 시의 제작에 그다지 힘을 쏟지 않았던 듯하다. 이광려가 지은 이광사의 묘표에 50대 이후의 작품이 대부분이라 한 대로, 20년이 넘는 긴 기간에 걸친 문집이지만 『원교집』에는 전체 작품의 수가 마흔 편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시는 가족이나 벗 등 절친한 사람을 위한 만사 몇 편에 불과하다.
제2책부터 5책까지는 표지에 '두남(斗南)’으로 되어 있는데 곧 『두남집(斗南集)』이다. 부령에서 자신의 호를 두남(斗南)이라 하였다. 서문에 따르면 두남은 두만강(斗滿江, 豆滿江이라고도 적는다)의 남쪽이라는 뜻이라 하면서도, 부령이 북쪽 끝이어서 북두성의 남쪽에 있다는 뜻에서 북두의 남이라는 뜻으로 두남이라 한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하였다. 또 두보(杜甫)의 시에 “매번 북두성에 의지하여 도성을 바라본다(每依北斗望景華).”라 한 뜻을 따라 대궐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두남집』에는 1755년 을해옥사가 일어날 때부터 1762년 부령을 떠날 때까지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앞부분의 서문과 함께 대부분의 글이 규장각본 『두남집』에 수록되어 있다. 『두남집』과 동일하게 모든 작품에 제작 연도가 명기되어 있다. 다만 1759년부터 1762년까지의 작품 중에는 『두남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작품도 있다. 이 시기 이광사는 한시의 제작에 힘을 기울여 「잡영(雜詠)」처럼 일기를 적듯 날짜를 적으면서 매일 한 편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제6책은 표지에 ‘수북(壽北)’으로 되어 있는데 『수북집(壽北集)』이다. 『수북집』에는 신지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인 1673년부터 1773년까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광사는 신지도를 수북이라 부르고 스스로의 호를 수북노인(壽北老人), 혹은 수북루인(壽北累人)이라 하였다. ‘수북’은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축수북두(祝壽北斗)’라 하여 북두성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었으니, 임금에 대한 충을 강조한 듯하다. 『수북집』에는 「고민을 풀며(遣悶)」 등 그간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 제법 실려 있다.
『원교집』에는 1773년 1월 숙형 이광정(李匡鼎)이 세상을 떴는데 2월에 이광사가 부고를 받고 제문을 지을 때까지의 글만 실려 있다. 이에 비하여 『원교집선(圓嶠集選)』에는 「백수 신공인의 묘지명(伯嫂申恭人墓誌銘)」과 「백수 신부인의 제문(祭伯嫂申夫人文)」, 「숙형 애수선생 기실문(叔兄艾叟先生記實文)」 등 1773년 이후 1775년까지의 작품 몇 편이 더 실려 있다. 백수가 1773년 4월 죽고 이광사가 5월에 부고를 받아 제문을 지어 서울에 있던 둘째 아들 이영익(李令翊)에게 보내어 조상하게 하였다. 완성된 『원교집』이라면 이들 글까지 당연히 포함하였을 것이므로, 『원교집』은 1773년 2월에서 5월 사이에 필사가 완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이광사의 문집은 『용진집』, 『원교집』, 『두남집』, 『수북집』 등의 초고가 있었던 듯하다. 규장각에 있는 『두남집』이 이 초고본 계열이라 할 만하다. 1773년 봄 아들 이영익이 이들 초고를 바탕으로 『원교집』을 편찬하였는데 바로 이 책인 듯하다. 이광사의 대표작인 「동국악부(東國樂府)」와 「서결(書訣)」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들이 독립적인 저술의 성격이 강하므로 편찬할 때 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후 이광사가 죽은 후 1773년 이후의 작품을 산정하여 『원교집선』을 엮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교집』에는 그간 알려져 있지 않던 이광사의 시문을 상당수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규장각본 『두남집』처럼 『원교집』은 대부분의 작품에 창작 연월일이 명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학술적 가치가 높다. 특히 이광사의 가족에 대한 애정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 중 상당수가 『원교집』에만 실려 있다. 이광사는 죽은 부인에 대한 회한이 워낙 컸기 때문에 부인에 대한 글을 많이 지었다. 특히 이광사는 부인의 망일인 3월이 되면 거듭하여 제문을 지었다. 특히 『수북집』에는 1763년, 1764년 지은 「유유인의 망일제문(柳孺人亡日祭文)」이 실려 있다. 또 1767년 5월26일에는 부인의 무덤을 개장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은 「망실유씨개장제문(亡室柳氏改葬祭文)」도 수록되어 있다.
이광사는 부인 이외에도 가족과 관련한 글을 많이 지었다. 젊은 날의 시문을 모은 『용진집』과 『원교집』의 산문은 대부분이 가족이나 벗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수북집』에는 그의 형 이광정(李匡鼎) 등 그의 가족과의 사랑을 절실하게 적은 글이 상당수 실려 있다. 길주에 유배되어 있던 이광정이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환갑을 맞은 이광사에게 옷을 보내는 애틋한 사정이 많이 담겨 있다. 특히 「가형 애수선생의 제문(祭家兄艾叟先生文)」은 1700자를 넘는 장문의 제문으로 형제의 지극한 정을 느끼게 한다.
『수북집』에만 보이는 시를 통하여 이광사의 신지도 생활을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느낌이 있어서(有懷)」를 통하여 이광사가 김창훈(金昌勳), 방상철(方祥喆), 최대형(崔大衡), 최도형(崔道衡), 강몽보(姜夢輔), 석연필(石衍弼), 김윤대(金潤大), 장제종(張齊宗), 박유문(朴維文), 김상보(金祥寶) 등의 제자를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방상철이 멀리서 온 것을 기뻐하며(喜方祥喆遠來)」는 부령에 유배되어 있을 때 이광사로부터 공부를 배운 방상철이 헤어진지 4년 후, 7개월에 걸려서 수륙 3000리 먼 길을 마다 않고 신지도로 이광사를 방문한 사연을 적고 있다. 이와 함께 「조경환기환의 자설(趙景煥其章字說)」을 통해서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살던 집에 대한 고증을 새로 할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이광사는 당곡에서 금곡으로 이주한 후 조이빈(趙以彬)을 주인으로 삼았다. 그간 황희의 후손가에 산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 책은 서예사적 가치가 높다. 「이청강의 묵적후발(李淸江墨跡後跋)」에 따르면, 이제신(李濟臣)이 지은 이언적(李彦迪)의 강계사묘(江界祠廟)의 기문 초본과 성혼(成渾)이 이이(李珥)의 왕복서한에 붙인 평론을 벗 이덕윤(李德胤)이 비단으로 장황하여 1책을 만들고 그 아래 빈 종이를 붙여 이이가 성혼에게 답한 편지를 이광사의 글씨로 쓰게 하여 「이청강묵적」을 만들게 된 것이라 한다. 또 「남지의 기로회첩 한 통을 쓰고 다시 그 아래 글을 적다(謹書南池耆老帖一通復題其下)」는, 1629년 이광사의 5세조 이유간(李惟侃)의 기로회 계회도를 이광사의 조카 이세익(李世翊)이 소장하고 있다가 이유간의 아들 이경직이 지은 서문, 장유(張維)와 박세당(朴世堂)의 발문을 합쳐 첩을 만들고 이광사에게 발문과 글씨를 청한 경과를 적고 있다. 그밖에 「서산기가 모각한 역산비 뒤에 쓰다(題徐散騎摹刻繹山碑後)」는 서현(徐鉉)이 모각한 역산비가 육조(六朝) 때의 것임을 밝힌 글로 서예사에서 주목할 만하다.
『원교집』에만 전하는 산문을 통하여 이광사의 저술 등 여러 문헌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선세언행록서(先世言行錄序)」를 통하여 이광사가 1732년 시조 덕천군(德泉君) 이하 선조의 언행록을 모아 『선세언행록(先世言行錄)』 1책을 편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관례의절발(冠禮儀節跋)」에 따르면 이광사가 부령에 유배 간 이후 이광사에게 배우던 문생들의 관례 절차를 적은 『관례의절(冠禮儀節)』을 1762년 편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문헌과 관련한 것으로는 1764년 지은 「서사가의 유합을 보고서(觀徐四佳類合)」가 크게 주목할 만하다. 서거정(徐居正)이 『천자문』처럼 한자를 나열하고 한글로 뜻을 풀이한 책이 조선후기까지 왕실에서부터 사대부가에서 널리 읽혔다. 물론 유희춘(柳希春)의 『신증유합』과 별개의 책이다. 자학(字學)에 관심이 높았던 이광사였기에 『유합』을 읽고 그 오류를 지적하였다. 예를 들면 ‘霾’는 바람이 불어 흙비가 내린다는 뜻인데 장마(霖雨)라 풀이하고, ‘목(艹牧)’과 ‘은’에서 ‘목(艹牧)’은 ‘苜’의 속자이고 ‘은’ 풀이름인데 목단(牧丹)이라 잘못 풀이하였으며, 또 ‘槐’는 음이 회로, 꽃으로 누런 물을 들이고 열매로 안약을 만드는데 음을 괴라 하고 황유(黃楡)라고 잘못 풀이하였다고 하였다. 여러 도서관에 『유합(類合)』이라는 제목의 고서를 찾을 수 있는데, 그 중 이광사가 지적한 것과 동일한 내용의 책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편자 미상으로 되어 있는 상당수의 『유합』은 본문을 검토하여 이러한 내용이 수록된 것이면 그 편자를 서거정으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그간 알려진 이광사의 문집은 두 종류가 있다. 『두남집』은 부령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시문을 모은 4책의 필사본으로 규장각에 현재 전하고 있다. 규장각과 장서각, 고려대학교 등에 소장되어 있는 10권 4책의 필사본 『원교집』 혹은 『원교집선』은, 초고의 형태를 띠고 있는 『두남집』에 비하여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문집이라 할 수 있다. 초년과 만년의 시문을 일부 수록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부령 유배 시기의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심경호, 『신편 원교 이광사 문집』, 시간의물레, 2005.
이종묵, 「버클리대학 소장 『원교집』에 대하여」, 『문헌과해석』 38, 문헌과해석사, 2007.
집필자 : 이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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