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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어유해(倭語類解) 상(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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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D.1881.0000-20150331.OGURA_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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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운서 | 교육/문화-문학/저술 | 자부-역학류
· 작성주체 홍순명(洪舜明, 1677-1745)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34張) : 23.9 X 21.3 cm
· 주기사항 表題: 倭語類解
書根題: 倭語
識語(小倉進平): 中村庄次郞翁より寄贈 昭和七年(1932)八月 進平
· 현소장처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 청구기호 L175008

안내정보

『왜어유해』는 조선시대 사역원 왜학의 일본어 학습교재로서 어휘 사전이었다. 당시 일본어의 어휘 3,500여자를 한자로 제시하고 이 표제어를 각 문항별로 배열하여 한자의 일본식 발음과 그에 해당하는 일본어 어휘를 보였다. 이 책은 『왜어유해』 판본의 상권에서 31엽까지를 인사(人事), 천문(天文), 시후(時候) 등의 16 문항에 있는 부분만을 옮겨 적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왜어유해』의 편자나 간행연대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이 자료의 필사 연대도 알 수 없다. 한 때 『왜어유해』는 김지남(金指南)․김경문(金慶門) 부자의 『통문관지(通文館志)』(권7) 「인물」 '홍순명(洪舜明)'조에 "公質于日本人雨森東, 作長語及類解等書, 用於課試。- 공(홍순명을 말함)이 일본인 아메노모리에게 질문하여 『장어』 및 『유해』 등의 책을 짓고 시험의 출제서로 쓰게 하였다"라는 기사에 의거하여 홍순명(1677-?)을 편자로 보기도 하였으나 홍순명이 대마도에 간 시기와 아메노모리 호우슈(雨森芳洲)의 연령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책에 대하여는 Courant(1894-6)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상술한 『통문관지』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강희(康熙) 신사(辛巳, 1701)에 편찬되었다고 보았고 이 주장은 가나자와 소우사브로(金澤庄三郞, 1933)에서도 그대로 받아드렸다. 그러나 이때에 편찬된 『왜어유해』는 '왜어물명'이란 이름으로 사역원의 일본어 교육에 사용되었으나 판본으로 간행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즉, 영조 42년(1766))에 치하겸(致賀兼) 치위사(致慰使)로 대마도에 갔을 때에 이 '왜어물명'을 가져가서 현지에서 수정하던 왜학 역관 현태익(玄泰翼)과 이명윤(李命尹), 그리고 현태형(玄泰衡)의 배가 중로에 파선하여 교정 원고는 모두 수장되고 이들 역관들도 익사(溺死)하였기 때문에 다른 유해류 어휘집이 간행될 때에 함께 간행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사역원의 교재는 반드시 현지에서 수정을 거쳐야 교서관에서의 간행이 가능하였다. 참고로 만주어의 『동문유해(同文類解)』는 영조 24년(1748)에, 그리고 몽고어의 『몽어유해(蒙語類解)』는 영조 44년(1768)에 간행되었다.
현전하는 『왜어유해』는 일본 토교의 고마자와(駒澤)대학 도서관의 탁족(濯足)문고에 소장된 것이 1980년대까지 현전하는 유일본으로 알려졌으나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하 국도관본으로 약칭)이 또 하나의 현전하는 판본으로 탁족본보다 선본으로 학계에 소개되었다. 국도관본은 일본의 탁족문고본보다 먼저 쇄출(刷出)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탁족본의 잘못, 즉 오래된 책판을 인쇄하였기 때문에 목판의 마모로 인하여 많은 탈각(脫刻)이 있어서 그로부터 많은 탈획(脫劃)과 탈자(脫字)이 있었는데 이를 국도관본에서 찾아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정광, 1988).
국도관본 『왜어유해』에는 하권의 권미에 이 책의 간행에 관여한 수정관(讐整官) 및 서사관(書寫官), 감인관(監印官)을 밝혀 놓았다. 즉, 수정관 한정수(韓廷修, 1741년생)를 위시하여 서사관으로 민정운(閔鼎運, 正書八梓, 1748년생), 정낙승(丁樂升, 1747년생), 피문회(皮文會, 1754년생)의 이름이 보이고 감인관으로 이양의(李養儀)가 있다. 이들은 한정수(건륭 계미, 1763, 증광별시 등과)를 비롯하여 모두 1780년대에 활약한 왜학 역관들이며 1701년대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특히 수정관 한정수는 가장 연장자이며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정삼품 당상역관의 직에 올랐다. 그가 『왜어유해』(국도관본)에서 정5품 전판관(前判官)의 직함이 적힌 것으로 보아 역과(譯科)에 등과한 건륭(乾隆) 계미(癸未, 1763)보다는 후일의 일이며 이의봉(李儀鳳)의 『고금석림(古今釋林)』(1789)에 소재된 「삼학역어(三學譯語)」에 "倭語類解 舌官 韓廷修 讐整 - 왜어유해는 역관 한정수가 수정한 것이다"란 기사로 보아 이보다는 앞 선 시기, 즉 1781년경에 이 책은 간행된 것이라 한다(정광, 1988). 오품 벼슬인 사역원 판관에 오르려면 반드시 역과에 급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성 및 내용
일본 토교대학 오구라(小倉)문고에 소장된 『왜어유해』 필사본은 이 책의 판본에서 상권(上卷)의 절반 정도를 필사한 것으로 모두 31장이며 크기가 23.9 × 21.3cm이다. 상권의 32장부터와 하권은 없고 상권의 권말 뒷 표지 안쪽에 "中村庄次郎翁より寄贈 昭和七年八月 進平」"이란 오서(奧書)가 있어 대마도의 조선어 역관였던 나카무라 소우지로(中村庄次郎)에게서 소화 7년(1932)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가 기증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왜어유해』 판본의 상권에서 31엽까지를 '인사(人事), 천문(天文), 시후(時候), 간지(干支), 지리(地理), 강호(江湖), 방위(方位), 인륜(人倫), 인품(人品), 신체(身體), 용모(容貌), 기식(氣息), 성정(性情), 언어(言語), 어사(語辭), 동정(動靜)'등의 16 문항에 있는 부분만을 옮겨 적었다. 원래 판본의 한자어로 된 표제어는 1자, 또는 2자로 되었고 1자로 된 표제어 한자의 경우 그 새김을 붙이고 한자의 발음을 좌우로 나누어 우리 한자음과 일본 한자음을 동시에 표기한 것도 있는데 이 필사본에서는 모두 일본 한자음을 제외하였다. 예를 들면 필사본에서 "日 날 일 ◯ 히, 月 월 ◯ 즈기"는 판본에서는 "日 날 일 ᅀᅵ쯔 ◯ 히, 月 월 계쯔 ◯ 즈기"와 같이 일본어 한자음 "ᅀᅵ쯔, 계쯔"를 우리 한자음 다음에 넣었다.
그러나 2자 및 3자의 경우는 판본과 이 필사본에서 모두 우리 한자음만 적었다. 예. 順風 슌풍, 驟雨 우, 老人星 로인셩, 三台星 삼셩. 따라서 일본어만이 아니라 우리 한자에 대한 교육도 함께 할 수 있는 교재였다. 다만 일본어는 한글로만 표기되었고 가나표기는 없다.
『왜어유해』 상(上)에는 필사된 부분 이외에도 '궁실(宮室), 성곽(城郭), 관직(官職), 공식(公式), 문학(文學), 무비(武備), 군기(軍器), 혼취(婚娶), 연향(宴享), 악기(樂記), 소세(梳洗), 복식(服飾), 음식(飮食), 질병(疾病), 상제(喪祭), 사찰(寺刹), 형옥(刑獄), 주수(籌數), 매매(買賣)'의 항목이 더 있다. 따라서 모두 56장의 반을 조금 넘겨서 필사한 것이다. 『왜어유해』가 모두 3천 5백여 어휘를 수록한 것에 비하여 이 필사본은 모두 866개의 어휘를 필사하였으니 25%에 불과한 분량을 필사한 것이다.
같은 『왜어유해』의 필사본으로 임진왜란 때에 일본 규수(九洲)의 사쯔마(薩摩)에 피납(被拉)된 조선 도공들의 『화어유해(和語類解)』가 있다. 일본 교토(京都)대학에 소장된 이 책은 사쯔마(薩摩)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억류되어 살아온 조선 피납인들이 모국어 학습에 사용하기 위하여 『왜어유해』 의 전편을 필사한 것으로 원래는 대마도의 조선어 교육소에서 필사한 것을 나에시로 가와의 조선 피납인들이 다시 복사한 것이라고 한다(정광, 1988). 그렇다면 대마도에는 조선어 학습을 위하여 『왜어유해』를 적지 않게 복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마도의 조선어 통사였던 나카무라 소우지로씨로부터 받은 이 필사본도 그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서지적 가치
이 자료는 국내와 일본에 한 책씩 소장된 판본 『왜어유해』의 일부를 필사한 것이다. 현전하는 『왜어유해』로서는 한국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 가장 선본여서 일본 고마자와대학의 탁족본보다 그 서지학적 가치가 크다. 특히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는 사역원의 외국어 학습교재의 책판(冊版)이 일부 보존되었는데 여기에 『왜어유해』의 목판도 19엽(葉)이 남아있다. 이들 판본과 책판, 그리고 사쓰마 나에시로가와에서 구입한 교토대학 소장의 필사본 『화어유해』와 비교하면 도쿄대학 오구라문고에 소장된 『왜어유해』 필사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오구라문고의 필사본은 일본어 교재였던 『왜어유해』를 필사한 것으로 그 목적이 조선어를 배우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한자의 표제어에 대하여 일본어보다는 조선어에 관한 정보가 중요하였다. 예를 들면 제1장의 맨 앞에 "天 하날텬 ◯ 소라 又云 아몌", "日 날일 ◯ 히", "月 월 ◯ 즈기"와 같이 조선어 위주로 필사되어 판본의 "天 하텬 뗀 ◯ 소라 又云 아몌", "日 날일 ᅀᅵ쯔 ◯ 히", "月 월 계쯔 ◯ 즈기"와 조금씩 다르며 교토대학 소장의 『화어유해』의 "天 쳔 하 소라 又 아몌", "日 일 날 히", "月 월 주기"와도 다르다. 즉 판본에 표기된 일본어 한자음을 생략하였다.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 오구라문고의 필사본이 언제 필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아래아의 표기가 매우 혼란되었지만 'ㅅ, ㅈ, ㅊ'의 경구개음화가 아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세기경에 필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치음 ㅿ이 표기가 보이는 것은 사역원 외국어 교재에서 19세기후반까지 반치음을 유성적 [z]의 표기에 사용하였으므로 이를 통하여 필사의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祈雨 긔우 ◯ 아마이[あまごい]", "端午 단오 ◯ 단{たんご)", "殘風 잔풍 후우 ◯ 나가[なぎかぜ]"의 예에서 보이는 '', 또는 ''는 유성음 [go, gi]의 표기로 사역원 교재에서 외국어의 유성음을 표기하기 위한 것이다. 유성음 [g, d, b]를 표기하기 위하여 사역원에서는 훈민정음의 'ᅁᅠ[g]'와 'ㅦ[d]', 'ㅮ[b]'를 기호로 사용하였다, 'ㅇ,ㄱ'은 모두 아음(牙音)이고 'ㄴ. ㄷ'는 설음(舌音)이며 'ㅁ,ㅂ'는 순음(脣音)이기 때문에 동기관음(同器官音, homorganic)으로 인식하고 명음자질(鳴音資質, sonorant)의 불청불탁(不淸不濁) /ㅇ, ㄴ, ㅁ/을 전청(全淸)의 /ㄱ, ㄷ, ㅂ/에 붙여 유성음 표기한 것이다.
다만 "東北風 동북풍 ◯ 기다지[きたこち]"에서는 무성음 'こ[ko]'의 표기에 //를 썼는데 이것 역시 착오이거나 아마도 판본의 잘못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닌가 한다. 판본을 편찬할 당시의 일본어의 방언에는 유성음으로 발음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가나자와 소사브로(金澤庄三郞)의 『일어유해(日語類解)』에서는 "東風 동풍 도우후우 ◯ 고지 こち"로 바로 잡혔다. 『일어유해』는 가나자와씨가 사역원의 일본어 어휘집 『왜어유해』를 수정하여 활자 인쇄본으로 도쿄의 산세이도(三省堂) 서점에서 1812년에 간행한 것이다.
『왜어유해』의 현전 판본으로 일본의 탁족문고보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 있고 전자가 후자에 비하여 훨씬 나중에 쇄출한 것이기 때문에 탁족본에는 책판의 마모로 많은 탈획과 탈자가 있음을 전술하였다. 따라서 오구라문고의 필사본은 과연 어느 판본을 필사하였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오구라문고본의 "童 아동 ◯ 와라볘[わらべ]"는 일본 탁족문고의 판본과는 다른 것을 보고 옮긴 것 같다. 즉 탁족본은 「인품(人品)」 항에서 "童 아동 도우 ◯ 와라"로 되어서 '와라볘[わらべ]'의 마지막 '볘'가 탈자(脫字)되었다. 물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와라볘"로 완전하게 표기되었는데 오구라문고본의 필사본은 역시 완전한 다른 판본을 옮긴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또 "奴 죵노 ◯ 야즈[やつこ]"도 탁족본에서 "이즈"로 보여서 '야'가 탈획(脫劃)되어 '이'가 되였으나 이 필사본에서는 "야즈"로 제대로 표기되었고 물론 국도관본도 이와 같다.
모두 일본어의 'わらべ(童), やつこ(奴)'를 한글로 전사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대마도에서 탁족본보다 더 선본을 가지고 필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야즈ᅁᅩ[やつこ]"에서 ''가 일본어 [こ]의 전사여서 아마도 이 말의 방언적 차이를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한다. 나에시로가와의 『화어유해』는 "奴 노 죵 야즈고[やづこ]"로 역시 앞의 'づ'를 유성음으로 표기 하여 뒤의 'こ'가 유성적 환경임을 표시하였다. 가나자와의 『일어유해』에서는 "약고[やっこ]"로 당시 발음대로 표기되었다.
이와 같이 오구라문고의 필사본 『왜어유해』는 필사 당시의 일본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 이 언어의 방언과 역사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판본이 두 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필사본은 이 자료의 변천 과정을 여러 면에서 잘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참고문헌
金澤座三郎, 『濯足庵藏書六十一種』, 金澤博士還曆祝賀會, 1933.
정광, 『제본집성 왜어유해[해설, 국어색인, 본문영인]』, 태학사, 1988.
Maurice Courant, 『Bibliographie Coreenne』, Paris, 1894-6.
집필자 : 정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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