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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년(庚子年) 면주전(綿紬廛) 전장건기(傳掌件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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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XE.0000.0000-20170331.KY_X_R0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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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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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시전문서 | 경제-상업-시전문서
· 형태사항 1장 | 종이 | 한자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R1

연결자료 묶음해제

안내정보

庚子年 10월 2일에 綿紬廛에서 담당자 교체 시 당시 有司가 면주전의 물품 내역과 담당 내역에 관한 사항을 大房에 보고하기 위하여 기록한 傳掌記이다. 傳掌記 혹은 傳掌件記라고 하며 물종의 수량, 상태, 담당자, 소장처 등의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상세정보

庚子年 10월 2일에 綿紬廛에서 담당자 교체 시 당시 有司가 면주전의 물품 내역과 담당 내역에 관한 사항을 大房에 보고하기 위하여 기록한 傳掌記이다. 傳掌記 혹은 傳掌件記라고 하며 물종의 수량, 상태, 담당자, 소장처 등의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南廟致誠의 물목으로 시작하며 마지막에 담당 有司의 이름을 적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庚子年 7월부터 壬寅年 11월까지 綿紬廛 傳掌記 및 下帖 등을 모아 놓은 文書綴 가운데 하나이다. 문서철을 발급 일자 및 발급 성격별로 분류한 건수는 총 26건이며 전장기 13건, 會計文記 3건, 本廳告祀輪回記 1건, 傳掌籤紙 2건, 手本 2건, 下帖 2건, 都中文記 1건, 所負記 2건이다.
면주전은 都中을 두고 그 산하에 補用所·倭單所·護葬所·預先所·補幣所·歲幣所·吐紬契·上紬契·水紬契·生殖契·貿紬契·措備契 등의 조직을 두었다. 所는 자금 관리 등 사무를 담당하였고, 契는 사무 담당과 구성원이 있는 조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용소는 면주전 전체의 주요한 운영 자금을 관리하였고, 왜단소는 倭人禮單을 조달·납품, 호장소는 면주전 구성원과 그 가족의 장의나 제사를 상호부조하기 위한 자금관리, 예선소는 그 기능이 확실하지 않다. 보폐소는 1875년까지는 세폐의 면주를 擣鍊하는 歲幣余利를 관리·운용하는 조직이었다. 세폐계는 歲幣, 토주계는 吐紬, 상주계는 上紬, 수주계는 水紬를 조달·납품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생식계와 무주계는 비방 구성원이 참여하는 조직으로, 계에 의한 상호부조 기능을 하였다. 조비계는 시전 도중의 각종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조직으로 추정한다.
면주전 도원들을 단일 면주전 도중에 소속되어 도중의 통제를 받았으나 구체적 영업활동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房은 독립적 회계를 지녔다. 단 동일 방에 소속된 상인들은 공동구매·출자·회계를 하였기에 혈연적 유대를 토대로 한 결속의 필요성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항 이후 외국산 상품의 유통으로 시전 상업은 크게 흔들렸다. 면주전은 민간에 대한 면주 판매가 저조해지자 민간 판매보다 왕실과 정부에 白吐紬·各邑吐紬·經用紬·給代紬·各色木紬 등을 진배하는 방향으로 영업 경로를 변경하였다. 그러나 진배는 정부·왕실재정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 되었고 개항 이후 정부·왕실 재정이 악화되자 납품한 물품에 대한 受價가 현실 물가에 비해 낮게 책정되거나 進排價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하여 미수가액은 점점 늘어가 1891년(고종 29)의 미수가 총액은 20여 만냥에 달했다. 개항이전에는 시전상인 가운데 3번째로 규모가 컸던 면주전이지만 1905년에는 영업인이 단 2명에 불과할 지경에 이르러 몰락하게 된다.
참고문헌
고동환, 「조선후기 市廛의 구조와 기능」, 『역사와 현실』44, 한국역사연구회, 2021.
고동환, 「개항전후기 시전상업의 변화 - 綿紬廛을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 32,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27.
집필자 : 임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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