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 공인과 시민들은 호조와 선혜청으로부터 값을 지급받고 공물을 조달하였다. 즉, 공물은 '受價貿納' 혹은 '受價製納'의 형태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면주전 시민들은 공물을 납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조로부터 공가를 지급받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호조에게 자신들이 각사에 진배한 공물가를 지급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대동법 실시 초기 공인들은 후하게 공가를 지급받았으나, 18세기 이후 점차 공가가 시가에 비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가를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다. 영조대 이후 貢市堂上을 임명하고, 貢市人詢瘼 정례화 한 것은 이러한 당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 공가 미지급사태는 수시로 발생하였다.
본 문서는 1893년 1월 면주전 시민들이 戶曹에게 水紬와 吐紬를 진배하였으니 공가를 지급해달라고 요청한 등장과 관련하여 그 근거자료로 제출된 점련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면주전이 제용감에 납입한 월별 물품 내역이 1892년 3월부터 12월까지 진배한 물품의 내역을 매월마다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명목은 홍수주, 감수주, 초록수주, 흑수주, 소적수주 등이 대부분이며 월별 품목과 수량은 각기 다르다. 이 내역에 대하여 李淳容, 李元泳, 李鎔, 李寅相, 金善基, 李命相 등 6인이 그 사실관계를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