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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임진(壬辰) 윤구월(閏九月) 세폐공안(歲幣貢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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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1832.0000-20170331.KY_W_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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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경제-상업 | 사부-시전류
· 작성주체 면주전(綿紬廛) 편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순조 32(1832)
· 형태사항 不分卷1冊 : 四周雙邊 半郭 37.4 x 33.0 cm, 有界, 10行14字 ; 42.8 X 37.2 cm
· 주기사항 印: 綿紬廛
紙質: 楮紙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ト-45 199992

안내정보

조선후기 서울의 시전(市廛) 중 하나였던 면주전(綿紬廛)에서 작성한 것으로서, 세폐(歲幣)의 조달에 관한 규정과 담당자 명단을 수록한 것이며, 「도광십이년임진윤구월일별출차지세폐신정공안절목(道光十二年壬辰閏九月日別出次知歲幣新定貢案節目)」(1832), 「세폐복구공안(歲幣復舊貢案)」(1832-38), 「세폐면주팔동분배공안(歲幣綿紬捌同分排貢案)」(1832-3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장부의 작성은 면주전에서 이루어졌으며, 보용소에서 지출한 내역이 기재되어 있다. 면주전은 토산(土産)의 면주(綿紬)를 팔던 곳이며(『한경지략(漢京識略)』), '면주'란 명주(明紬)라고도 하는 비단, 즉 견포(絹布)를 가리킨다. 서울의 시전 중에는 국역(國役)의 분담 비율인 푼수(分數)가 규정된 유푼전(有分廛)과 그렇지 않은 무푼전(無分廛)이 있었는데, 면주전은 유푼전의 하나였고 8푼(八分)의 국역을 부담하였다. 중국산 비단을 취급한 선전(立廛)의 10푼, 토산의 무명을 취급한 면포전(綿布廛)의 9푼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푼수에 해당하므로, 육주비전(六矣廛)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면주전의 위치는 면포전 뒤, 전옥서(典獄署) 앞이었다(『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면주전에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내부 조직이 있었으며, 세폐와 관련된 조직으로서는 세폐계(歲幣契)가 있었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세폐계는 (1) 청(淸)에의 세폐(歲幣)를 담당한 곳, (2) 세폐를 조달․납품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면주전 구성원 전원이 참가한 곳, (3) 세폐 면주를 정부에 납품한, 80명의 영구적 멤버십 숫자를 가지는 곳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기존 연구에서는 이 자료에 대해 세폐계만의 것이라기보다는 면주전 전체의 것으로 보고 있다.
구성 및 내용
표제는 『도광십이년임진윤구월일세폐공안(道光十二年壬辰閏九月日歲幣貢案)』이다. 가와이문고에 현존하는 면주전 자료가 대부분 테두리가 없고(無郭), 열 구분선이 없는(無絲欄) 종이에 작성되어 있는 반면, 이 자료는 붉은색으로 인찰(印札)이 되어 있는 종이에 작성되어 있다.
「별출차지세폐신정공안절목」은 1832년(道光12)에 작성된 것으로서 별출차지(別出次知)가 세폐(歲幣)의 새로운 정식(定式)을 담은 공안절목(貢案節目)에 해당한다. 총 28개 조목이 작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의 서두 부분을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면주전에서는 오랫동안 세폐 면주를 담당해 왔는데, 시간이 오래 흐름에 따라 풍속이 바뀌게 되었고, 형세가 예전 같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구렁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에 변통을 도모하고자 여러 차례 관아에 민원을 제기하여, 세폐를 변통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를 담은 정식을 항목별로 열거해 둔다고 하였다. 이어서 세폐를 담당하는 자들의 인원수(元額)에도 정식이 있었는데, 이들을 세폐의 주인(歲幣之主人)이라고 하며, 응참(應參) 80명에게 각기 3필씩의 세폐 면주를 담당하게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응참 중에서 절반을 분아(分兒)한 세 사람의 차지(次知)에게는 세폐 면주를 각기 1필반씩으로 정식하였고, 응참에 대한 분배가 이와 같지만, 미참(未參)의 경우에도 차지 공론(公論) 15년 이상에게는 각 2필씩, 지차(之次)에게는 각 1필반씩, 또 그 지차(之次)에게는 각 1필씩, 금년에 출시한 11인에게는 각 반필씩을 작등(作等) 분배한다고 하였으며, 응참 중에서 반깃으로 입참(入參)한 1인에게는 세폐 면주 2필반씩으로 정식한다고 하는 등 세폐 면주의 담당 및 각자에 대한 분배 내역에 대해 하나하나 열거해가며 규정하고 있다. 28개 조목의 뒤에는 별출차지 18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7명은 각자의 이름 아래에 수결(手決)을 해 두었다. 또한 넷째, 다섯째 인물의 성명 위에는 각각 "임(任)"이라고 표기해 두었으며, 열셋째 인물의 성명 위에는 "군중행수(軍中行首)"라고 표기해 두었다. 열넷째, 열다섯째 인물의 성명 위에는 가운데에 "소임(所任)"이라고 하나만 적어 놓았다. 열여섯째 인물의 성명 위에는 "조사(曺司)"라고 적어 두었다.
「세폐복구공안」은 2면에 불과하지만, 많은 정보가 적혀 있다. 맨 처음에는 큰 글씨로 "본전(本廛)"이라고 해 두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6행에 걸쳐 내용을 적었는데,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832년(壬辰) 10월에 매득(買得)한 이창문 4필, 이창득 4필, 문익장 4필, 이광하 4필, 김광희 4필, 김정휘 3필반, 이원영 3필반, 전경상 3필반, 전복흥 2필, 장필의 3필반, 변수민 3필반, 유세영 2필반, 한명록 2필, 조희빈 3필반, 이일평 2필, 임은상 2필, 한도정 2필, 조영빈 1필, 문원기 1필반, 김후 반필, 박기원 반필, 오경기 3필, 전원춘 1필, 박성희 1필, 서택인 1필, 차영보 1필, 성재후 1필, 합 1동 15필"
이러한 내역 뒤에는 "대방"이라고 다시 크게 적은 다음, 아래에 도장을 찍어 두었다. 그 다음부터는 "대방"이라는 글씨 옆에 다시 "대방"이라고 적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변동 내역을 적은 다음, 그 위에 도장을 또 찍는 방식을 반복하고 있는데, 본문에 그렇게 처리된 (대방이라고 적고 도장을 찍은) 사례는 8건이 확인되고 있다. 9건째부터 12건째까지의 내역은 별지에 적어 2번째 면의 상단에 부착해 두었는데, 상단에 큰 글씨로 "대방"이라고 적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변동 내역을 적은 다음, 기록이 끝나는 지점 뒤에 도장을 찍은 형태이다. 여기까지가 총 12차례에 걸쳐 작성된 「세폐복구공안」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마지막에 부착된 별지는 1838년(丙戌)의 것이다. 따라서 「세폐복구공안」은 1832년부터 1838년까지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폐면주팔동분배공안」은 세폐 면주 총 8동(同)을 분배한 인원을 적어둔 명단이다. 각 인원별로 1열씩 순서대로 작성되어 있으며, 기재 형식은 성명, 필수(疋數), 수결(手決)의 순(順)이고, 그 아래에 변동 내역을 작은 글씨로 적어두는 형식이다. 변동 내역이 반복되면, 아래로 내려가며 3단에 걸쳐 작성하되, 그 이후로 변동이 추가되는 경우에는 부전지(附箋紙)에 적어 그 위에 부착하는 형식이다. 변동 내역 위에는 모두 도장이 찍혀 있다. 성명에는 'ㄱ'자 형태로 효주(爻周)가 되어 있는데, 이는 변동으로 인해 해당 인물의 권리가 상실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명단의 맨 마지막은 성명이 아니라 공깃(空衿)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공'과 '깃' 사이에 4명의 성명이 적혀 있는데, 이는 추후에 기재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뒤에는 "이상 합 8동(已上合捌同)"이라고 적어 두었고, 다음 면에 대행수(大行首) 1명, 영위(領位) 3명, 공원(公員) 2명, 삼좌(三座) 5명, 군중행수 1명, 소임 2명의 성명을 적어 두었다. 다시 그 뒤로 11명의 성명과 변동 내역이 앞의 양식과 유사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렇게 기재된 「세폐면주팔동분배공안」의 내역에 대해서 기존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도광 연간의 『세폐공안』은 193명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대행수와 영위 등의 4필을 최대로, 최소 반필까지의 면주를 면주전 구성원 전원이 부담할 것을 규정하는 동시에 그 공출을 확인한 것이다."
가장 마지막의 변동 내역이 1838년(丙戌)의 것임으로 미루어, 이 「세폐면주팔동분배공안」 역시 1832-38년간의 기록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개별 인물에 대한 변동 내역을 하나하나 추적해 본다면, 그 7년 동안 세폐 면주 8동이 어떻게 분배되고 있었는지를 복원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서지적 가치
현존하는 면주전 자료 중에서 『세폐공안』(총 1책)과 『세폐공안책』(총 1책)은 모두 필사본(筆寫本)이자 유일본(唯一本)으로서, 원본은 일본에 있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의 가와이문고(河合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종래에는 일본 현지에서 마이크로필름(M/F) 형태로만 열람․복제할 수 있었으나, 1997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조사․영인하여 보관하게 됨으로써, 이후로는 그 영인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촬영이나 복제가 허용되지 않았고, 열람 절차가 무척 번거로웠다는 점에서 연구 자료로서 활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현존하는 2책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가와이문고에 현존하는 면주전 자료가 대부분 1865년 이후의 기록을 위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1832-38년간에 대해 작성된 제1책인 『세폐공안』은 매우 희귀한 자료에 해당한다.
제1책: 「별출차지세폐신정공안절목」, 「세폐복구공안」, 「세폐면주팔동분배공안」(1832-1838)
제2책: 『세폐공안책』(1865-1897)
또한 제2책인 『세폐공안책』의 기록이 1865년부터 시작된 이유는 1864년 말에 면주전 도가(都家)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때까지의 문서나 장부가 거의 모두 소실(燒失)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의 1864년 12월 16일자의 기사 중 "지금 면주전 시민(市民)들의 정소(呈訴)를 받아보니 전번에 화재가 났을 때 거접하는 도고(都賈)와 좌고(坐賈)들이 수직(守直)하는 방(房)이 전부 타버리는 바람에 진상하기 위해 준비해둔 각종 물자와 거행하는 문부(文簿)들을 하나도 건져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그러한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세폐공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행히도 1864년의 화재를 겪지 않은 것에 해당하며, 따라서 상당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세폐공안책』의 기록이 1897년을 끝으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현상이 확인되는 이유는 1894년의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인해 시전(市廛) 및 공계(貢契)가 국가에 대하여 행하던 공식적 조달 업무가 역사의 뒤로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용적 가치
면주전 자료의 존재가 학계에 알려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면주전의 운영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의 장부를 하나하나 판독하고 이해한 다음, 상호 관계에 이르기까지 분석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폐공안』이나 『세폐공안책』처럼 면주전에 소속되어 세폐를 조달한 상인의 명단에 대해 앞으로 심층적 분석을 할 수 있다면,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은 면주전의 세폐 운영에 관한 실증적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공안'이 현존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공물정안(貢物定案)』이나 『갑인신정관상감공안절목(甲寅新定觀象監貢案節目)』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들 자료를 『세폐공안』이나 『세폐공안책』과 마찬가지 성격의 자료로 보기는 어렵다. 『공물정안』과 『갑인신정관상감공안절목』은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따라 공물(貢物)의 조달을 위해 등장한 공인(貢人)과 관계된 자료이기 때문이다. 『세폐공안』이나 『세폐공안책』처럼 시전 상인의 '공안'이 현존하는 추가 사례는 알려진 바 없다.
참고문헌
須川英德, 「朝鮮時代の商人文書について─綿紬廛文書を中心に─」, 『史料館硏究紀要』34, 史料館, 2003.
Owen Miller, “The silk merchants of the My?njuj?n: guild and government in late Chos?n Korea,”, Ph.D. dissertation,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SOAS), University of London, 2007.
須川英德, 「시전상인과 국가재정: 가와이[河合]문고 소장의 綿紬廛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조영준 역해, 『시폐(市弊)─조선후기 서울 상인의 소통과 변통─』, 아카넷, 2013.
집필자 :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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