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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을축(乙丑) 정월(正月) 수주이소상용책(水紬二所上用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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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1864.0000-20170331.KY_W_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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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경제-상업 | 사부-시전류
· 작성주체 면주전(綿紬廛) 편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고종 1(1864)
· 형태사항 不分卷1冊 : 無郭, 無界, 13行字數不定 ; 34.9 X 32.5 cm
· 주기사항 印: 綿紬廛
紙質: 楮紙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イ-72 199880

안내정보

조선후기 서울의 시전(市廛) 중 하나였던 면주전(綿紬廛)의 내부 조직인 수주이소(水紬二所)의 회계 장부로서, 1865년(乙丑) 3월 19일부터 1878년(戊寅) 6월 2일까지 13년 2개월여 동안의 지출 내역을 날짜별로 기록한 것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장부의 작성은 면주전에서 이루어졌으며, 보용소에서 지출한 내역이 기재되어 있다. 면주전은 토산(土産)의 면주(綿紬)를 팔던 곳이며(『한경지략(漢京識略)』), '면주'란 명주(明紬)라고도 하는 비단, 즉 견포(絹布)를 가리킨다. 서울의 시전 중에는 국역(國役)의 분담 비율인 푼수(分數)가 규정된 유푼전(有分廛)과 그렇지 않은 무푼전(無分廛)이 있었는데, 면주전은 유푼전의 하나였고 8푼(八分)의 국역을 부담하였다. 중국산 비단을 취급한 선전(立廛)의 10푼, 토산의 무명을 취급한 면포전(綿布廛)의 9푼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푼수에 해당하므로, 육주비전(六矣廛)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면주전의 위치는 면포전 뒤, 전옥서(典獄署) 앞이었다(『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면주전에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내부 조직이 있었으며, 수주계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수주계'에 대한 설명을 별도로 하지 않고 있으나, '수주이소(水紬二所)'에 대해 "수주계(水紬契). 수주를 조달․납품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해설함으로써 '수주계'와 '수주이소'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수주이소 외에 수주일소(水紬一所)가 별도로 있었으며, 이들 '소(所)'는 '계(契)' 내에 설치된 기금이라고 생각된다. 조선후기 시전에서 전체 조직으로서의 전(廛) 내에 설치되었던 계(契)와 소(所)의 성격이나 차이점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현재까지의 이해에 따르면, '계'는 사무 담당과 구성원이 있는 조직으로, '소'는 자금 관리 등 사무 담당만 있는 조직으로 파악되고 있는 수준이다. 수주일소나 수주이소를 수주계 내에 설치된 기금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그 장부 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수주일소 또는 수주이소에서 작성하여 관리한 장부는 『상용책(上用冊)』, 『차하책(上下冊)』 및 『전장등록(傳掌謄錄)』의 세 가지이다. 『상용책』은 지출 장부, 『차하책』은 수입 장부, 『전장등록』은 인계인수 장부에 해당한다. 반면에, 수주계에서 작성하여 관리한 장부로는 『수가책(受價冊)』과 『회계책(會計冊)』 등이 있다. 『수가책』은 대금의 수취와 그 항목별 지출을 기록한 장부, 『회계책』은 면주 조달을 위해 실제 지출되는 대금과 납품용 면주의 조달을 기록한 장부에 해당한다. 이러한 장부 체계를 통해, 수주계가 대외적인 면주 상납이나 진배(進排)를 위한 조직이었고, 수주일소와 수주이소는 조직 내의 자금관리(특히 상호부조)에 관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성 및 내용
표제는 『을축정월일수주이소상용책(乙丑正月日水紬二所上用冊)』이다.
날짜별 지출의 기재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오른쪽의 열에 간지(干支)와 월일(月日)을 적고, 다음 열에 지출의 내역과 금액을 적은 다음, 그 다음 열에 '대방(大房)'이라고 적고 날인을 하는 형식이다. 이후 날짜의 지출 내역을 적을 때에는 이전에 날인된 곳 바로 아래에 다시 간지와 월일을 적으면서 시작하는 형식으로, 날짜와 날짜 사이의 기록이 1열씩 중첩되는 구조를 보인다. 지출 내역에 포함되는 글자 수가 많은 경우를 찾아볼 수 없으며, 그래서 모든 지출 내역이 3열만으로써 기록이 끝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특정 날짜에 두 가지 이상의 내역이 각각 등장하는 사례도 보이는데, 별개의 건으로 처리되었다. 다시 말해, 같은 날짜에 이루어진 지출이라고 하더라도 통합하여 작성되지는 않았다.
한 권의 장부에 10년 이상의 기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해마다 기입된 내역이 많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동일 지면에 기재된 내역에서도 글씨의 모양이나 먹빛 등이 달라지는 사례가 많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특정 인물이 장기에 걸쳐 장부의 작성을 전담하고 있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둘째는 입금 내역을 주기적으로 일괄 작성한 것이 아니라, 지출이 발생할 때마다 그때그때 작성하였으리라는 점이다.
지출의 내역과 금액을 적을 때에는 지출의 내역(명목), 금액, 끝맺는 투식(套式)의 순서로 작성하였다. 개개의 건별로 지출의 내역 및 금액의 기재가 끝나는 곳의 투식은 "상용끝(上用印)"으로 모두 동일하며, 이는 "받아쓰는 것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상용(上用)'은 "받아쓴다"는 뜻으로서 수입(收入)을 가리키며, '인(印)'은 "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소개하였듯이, 기존 연구에서는 면주전의 장부류에 대해서는 『상용책』이 지출을, 『차하책』이 수입을 기록한 장부로 이해하고 있다. 수주이소의 지출 장부에 기재된 건별 내역을 "받아 쓴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아마도 면주전 전체를 통괄하는 조직인 대방과의 관계에 따른 상대적 표현일 것이리라 생각된다. 즉, 대방 측에서의 지출이 수주이소 측의 수입이 되며, 수주이소 측에서의 지출이 대방 측에서의 수입이 되는 형식인 것이다. 지출의 금액은 모두 동전으로 표기되었으며, 당대에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단위인 "양(兩)", "돈(戔)", "푼(分)"이 사용되었다. 금액에 표기되는 모든 숫자가 '갖은자'로 이루어졌고, 단위로서의 '돈'을 '錢' 대신에 '戔'으로 표기하였음은 통상의 회계기록과 마찬가지이다.
기재되어 있는 지출의 명목은 다양하지 않고 단순한 편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1865년(乙丑) 3월 19일자의 내역을 예시하면, "십좌 전○순의 본인 장례 잿돈 29냥 2돈 5푼을 받아 씀. 끝(全十座珣己喪齋貳拾玖兩貳戔伍分上用印)"과 같다. 다른 입금 내역도 대동소이한데, 면주전 구성원 또는 그 가족의 장례와 관련한 부의금으로서 "잿돈(齋錢)" 외에도 "별부의(別賻儀)"의 내역이 보이며, 그밖의 명목은 찾아보기 어렵다.
날짜별로 작성된 지출 내역에 대한 결재는 면주전 조직의 대방에 의해 이루어졌다. 장부의 작성자가 날짜별 기록의 끝에 "대방"이라고 적어 놓으면, 그 아래에 담당자가 도장을 찍는 형식이었다. 도장은 위아래로 길쭉한 형태의 직사각형 모양으로서(2.0cm×4.0cm), 인영(印影)을 통해 "면주전(綿紬廛)"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날인은 붉은 색의 인주가 아닌 검은 색의 먹물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다. 대방의 결재가 면주전 도장에 의해 이루어진 이유는, 대방이 면주전 도중 전체를 통괄하는 기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주이소의 지출 내역에 대해, 대방에서 면주전 명의의 도장을 찍음으로써, 조직으로서의 면주전 전체의 승인 또는 결재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외적인 사례로서 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 내역도 더러 보인다. 이를 통해 수주이소의 자금 지출에 대한 승인이 면주전 조직에 의해 꼼꼼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개별 날짜별・건별 내역에 대한 날인 여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장부 내에서 주기적인 정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산은 주필(朱筆)로 작성되었는데, 일반적인 지출 내역과 같은 형식으로 날짜, 내역, '대방'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최초로 등장하는 사례를 옮겨 적어 보면, "이상 종종 받아 쓴 원리합계 45냥 3돈 1푼을 회감함. 끝(以上種種上用本邊合肆拾伍兩參戔壹卜會減印, 1865년 5월 15일)"과 같다.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한데 묶어서 원리합계를 정산하여 별도의 장부에 옮겨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장부 전체를 확인해 본 결과, 해마다 5월 15일과 11월 15일의 두 차례에 걸쳐 정산되고 있었다. 정산 내역 뒤에 적은 '대방' 아래에는 도장이 찍혀 있지 않다.
개개의 날짜별・건별 내역의 금액 기록의 오른쪽에 주필로 점이나 선이 표시되어 있는 사례가 보이는데, 이는 정산 과정에서 모든 수치를 일일이 확인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붉은 색으로 점을 찍거나 선을 그어둔 내역은 별도의 장책으로 이기(移記)되었음을 의미한다. 정산 과정에서 애초에 기재해 두었던 내역에 대한 효주(爻周)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예컨대, 1874년(甲戌) 8월 8일자를 보면, 처음에는 "십좌 유○원의 장인 잿돈 4냥 2돈 5푼을 받아 씀. 끝(劉十座元妻父齋肆兩貳戔伍卜上用印)"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해당 내역에 'ㄱ'자 형태로 주필로 표시해 둠으로써 내용의 취소를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내역의 아래에 검은 글씨로 "1874년 8월 9일에 사근취원(捨近取遠)했을뿐더러 수재(受齋)한 뒤에 드러났으므로 삭명(削名)했으니 무효로 할 것(甲戌八月初九日捨近取遠分除良/受齋後現露故削名勿施)"이라고 효주의 사유를 2열의 세주(細註) 형식으로 적어 두었고, 글씨 위에 면주전 도장을 덮어서 찍어 두었다.
그밖에도 비공식적인 수정 내역이 확인되는데, 전체 기록 중 맨 뒤에 해당하는 1878년(戊寅) 6월 2일자의 기록은 적어 놓은 글씨를 뭉개어 종이를 벗겨내는 방식으로 처리하여,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알 수 없도록 해 놓은 사례에 해당한다. 맨 위의 글자가 성씨인 "강(姜)"이라는 정도만 어렴풋이 알 수 있는 정도이다. 이는 (후술하듯이 수주이소가 혁파되고 보용소에 통합된 뒤에 작성된 내역이므로,) 애초에 잘못 적어 두었던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문에 기재된 내역과 별개로 앞표지 뒷면에 "1886년 2월에 끝부분의 종이(尾紙) 15장을 재안책(齋案冊)으로 옮겨 썼음. 끝(丙戌二月日尾紙十五張齋案冊移用印)", "또 10장을 송거책(松炬冊)에 옮겨 썼음. 끝(又 十張松炬冊移用印)", "3월 20일에 10장을 조비계전장등록책(措備契傳掌謄錄冊)에 옮겨 썼음. 끝(三月二十日 十張措備契傳掌謄錄冊移用印)", "4월 20일에 20장을 호상소전장등록책(護喪所傳掌謄錄冊)에 옮겨 썼음. 끝(四月二十日 二十張護喪所傳掌謄錄冊移用印)"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수주이소상용책』의 기재가 1878년으로 끝나고, 더 이상의 기재 없이 남겨진 상태에서 뒷부분에 여백으로 남아 있던 종이들을 뜯어내어 『재안책』, 『송거책』, 『조비계전장등록책』, 『호상소전장등록책』 등의 작성을 위해 보충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주이소의 기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거나, 수주이소가 폐지되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수주일소(水紬一所)가 호상소(護喪所)와 함께 보용소(補用所)에 통합되었다고 하였는데, 수주이소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이와 관련한 정보는 본문의 맨 마지막에 기록된 "수주이소가 혁파되었으므로 남은 돈을 보용소에 이송하고자 1,871냥 9돈 5푼을 모두 받아씀. 끝(本所革破故遺在錢移送補用所次壹千捌百柒拾壹兩玖戔伍分畢上用印, 1878년 5월 21일)"이라는 내역을 참조할 수 있다. 수주이소가 혁파되어 보용소에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서지적 가치
면주전의 『수주이소상용책』(총 1책)은 필사본(筆寫本)이자 유일본(唯一本)으로서, 원본은 일본에 있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의 가와이문고(河合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종래에는 일본 현지에서 마이크로필름(M/F) 형태로만 열람․복제할 수 있었으나, 1997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조사․영인하여 보관하게 됨으로써, 이후로는 그 영인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촬영이나 복제가 허용되지 않았고, 열람 절차가 무척 번거로웠다는 점에서 연구 자료로서 활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수주이소상용책』의 기록이 1865년부터 시작된 이유는 1864년 말에 면주전 도가(都家)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때까지의 문서나 장부가 거의 모두 소실(燒失)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의 1864년 12월 16일자의 기사 중 "지금 면주전 시민(市民)들의 정소(呈訴)를 받아보니 전번에 화재가 났을 때 거접하는 도고(都賈)와 좌고(坐賈)들이 수직(守直)하는 방(房)이 전부 타버리는 바람에 진상하기 위해 준비해둔 각종 물자와 거행하는 문부(文簿)들을 하나도 건져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그러한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용적 가치
면주전 자료의 존재가 학계에 알려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면주전의 운영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의 장부를 하나하나 판독하고 이해한 다음, 상호 관계에 이르기까지 분석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주이소상용책』(총 1책)은 면주전의 내부 조직인 수주이소의 기금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었는지를 지출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이 책은 전체적인 지출의 내용 구성뿐 아니라 13년여 동안의 추이에 대한 정보까지 충실히 제공한다. 수주이소 운영의 입체적․다면적 이해를 위해서는 『수주이소차하책(水紬二所上下冊)』(총 1책)과의 비교가 필요함은 물론이며, 회계의 정산 결과까지 살펴보려면 『수주이소전장등록(水紬二所傳掌登錄)』(총 1책)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수주이소와 수주계의 관계에 대해 살피기 위해서는 수주계의 『수가책』, 『회계책』, 『조비책(措備冊)』과 비교․검토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須川英德, 「朝鮮時代の商人文書について─綿紬廛文書を中心に─」, 『史料館硏究紀要』34, 史料館, 2003.
Owen Miller, “The silk merchants of the My?njuj?n: guild and government in late Chos?n Korea,”, Ph.D. dissertation,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SOAS), University of London, 2007.
須川英德, 「시전상인과 국가재정: 가와이[河合]문고 소장의 綿紬廛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조영준 역해, 『시폐(市弊)─조선후기 서울 상인의 소통과 변통─』, 아카넷, 2013.
집필자 :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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