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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을축(乙丑) 정월(正月) 각처계방책(各處稧房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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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1865.0000-20170331.KY_W_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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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경제-상업 | 사부-시전류
· 작성주체 면주전(綿紬廛) 편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고종 2(1865)
· 형태사항 不分卷1冊 : 無郭, 無界, 13行字數不定 ; 35.0 X 32.2 cm
· 주기사항 合綴 : 낱장 文書19張 添附
印: 綿紬廛
紙質: 楮紙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イ-11 199908

안내정보

조선후기 서울의 시전(市廛) 중 하나였던 면주전(綿紬廛)에서 관계 기관에 보낸 돈의 내역을 기록해 둔 장부로서, 1865년(乙丑)부터 1891년(辛卯)까지 약 26년 동안 각 기관별로 계정을 구분하여 적은 것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장부의 작성은 면주전에서 이루어졌으며, 각 기관에 예송(例送)한 내역이 기재되어 있다. 면주전은 토산(土産)의 면주(綿紬)를 팔던 곳이며(『한경지략(漢京識略)』), '면주'란 명주(明紬)라고도 하는 비단, 즉 견포(絹布)를 가리킨다. 서울의 시전 중에는 국역(國役)의 분담 비율인 푼수(分數)가 규정된 유푼전(有分廛)과 그렇지 않은 무푼전(無分廛)이 있었는데, 면주전은 유푼전의 하나였고 8푼(八分)의 국역을 부담하였다. 중국산 비단을 취급한 선전(立廛)의 10푼, 토산의 무명을 취급한 면포전(綿布廛)의 9푼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푼수에 해당하므로, 육주비전(六矣廛)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면주전의 위치는 면포전 뒤, 전옥서(典獄署) 앞이었다(『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구성 및 내용
표제는 『을축정월일각처계방책(乙丑正月日各處稧房冊)』이다. 기재 내역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관청별 구분(일종의 계정에 해당)에 따라 쪽별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편의상 일련번호를 붙여가면서 적어둔다.
(1) 춘방(春坊), 즉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전서청(典書廳) 아방(亞房)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1890년(庚寅) 12월조의 10냥"이 큰 글씨로 적혀 있다. 작은 글씨로 따로 적어 둔 기록을 보면, "금년 12월에 해마다 10냥씩으로 새로 적정(的定)하였다"라고 하면서 "해마다 12월을 맞이하여(每年十二月當)"라고 적어 두었는데, 해당 기록이 "대회의 공론을 거쳐 부득이 새로 적정한(大會公論後不得已新的定)" 것임을 밝혀 두었다. 1890년 12월조의 10냥은 "12월 27일에 가지고 갔다(持去)"고 적혀 있다.
(2) 한성부(漢城府) 수청방(隨廳房)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1885년 4월부터 5냥을 보낸다고 하면서(乙酉四月爲始伍兩), 별출차지(別出次知)의 입장(立章)에 의거한 계방(契房)이라고 하였고, 완문(完文) 1장을 도가(都家)에 들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실제로 보낸 내역은 1885년부터 1889년까지 5년에 걸쳐 해마다 5냥씩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낸 날짜는 연도마다 각기 다른데, 2월부터 5월까지에 걸쳐 있다. 보낸 날짜의 아래에는 보낸 사람의 성명을 적고 "가지고 감(持去)"이라는 표현을 적어 두는 형식이다.
(3) 사학(四學)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1865년(乙丑) 4월 20일에 4냥을, "강(姜)"이 "가지고 갔고", 1867년(丁卯) 1월 10일에 역시 4냥을 강재손이 가지고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은 사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춘방, 즉 세자시강원의 장방(長房), 사역원(司譯院)의 아방(亞房) 등에 관한 것이다.
(4) 한성부 낭청(郎廳) 대솔방(大率房)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1886년(丙戌) 10월 5일의 대회 공론으로 부득이 해마다 10월에 5냥씩을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보낸 내역은 1886년부터 1890년까지 5년에 걸쳐 해마다 5냥씩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낸 날짜는 연도마다 각기 다르지만, 9월 아니면 10월이다. 보낸 날짜의 아래에는 보낸 사람의 성명을 적고 "가지고 감"이라는 표현을 적어 두는 형식이다.
(5) 여러 관청에 언제 보내는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政院)장방(長房) 아방(亞房), 상의원(尙衣院) 아방, 전설사(典設司) 장방, 사헌부(司憲府) 장방, 묵척방(墨尺房), 수청방, 금란방(禁亂房), 인배방(引陪房), 호조(戶曹) 당상(堂上) 아방, 낭청 아방, 의금부(禁府) 아방, 영오(令吾) 장방, 평시서(平市) 아방, 형조(刑曹) 금란방, 한성부 본방(本房), 사학, 사헌부 아방, 사간원(司諫院) 장방, 아방, 세자시강원 장방, 아방, 계방(桂坊=세자익위사) 아방, 사헌부 패두방(牌頭房), 세자익위사 장방, 호조 관사환(官使喚) 도중(都中) 등이 나열되어 있다. 각 관청명의 아래에는 해마다 언제 보내는지(移送)를 적어 두었는데, "해마다 10월에(每年十月)", "봄가을(春秋等)" 등의 형식이다. 관청별 순서가 뒤섞여 있으며, 『을축정월일각처계방책』에 수록된 모든 관청을 전체적으로 포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6) 사헌부 금란방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1865년(乙丑)을 시작으로 1891년(辛卯)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빠짐없이 봄가을(春等, 秋等)로 구분하여 예송(例送)한 금액과 보낸 날짜, 보낸 사람의 성명을 적고 "가지고 감" 또는 "거(去)"라는 표현을 적어 두는 형식이다. 금액은 예외 없이 5냥으로 일정하며, 보낸 시기도 거의 예외 없이 봄에는 2월에, 가을에는 8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7) 승정원 장방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해마다 10월에 20냥을 예송한다는 기록이 맨 앞에 있다. 실제로 보낸 내역은 1865년(乙丑)을 시작으로 1890년(庚寅)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빠짐없이 한 차례씩 기재되어 있는데, 보낸 날짜는 대개 10월이지만, 9월이나 11월도 보인다. 보낸 날짜 아래에 금액을 적었는데, 일률적으로 20냥이다. 금액 아래에는 보낸 사람의 성명을 적고 "가지고 감" 또는 "거(去)"라는 표현을 적어 두는 형식이다.
(8) 대전(大殿) 별감방(別監房)방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해마다 1월에 8냥씩"이라는 기록과 함께 "좌번과 우번을 아우른다(左右番幷)"는 내용도 명기되어 있다. 실제로 보낸 내역은 1877년(丁丑)을 시작으로 1891년(辛卯)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빠짐없이 한 차례씩 기재되어 있는데, 보낸 날짜는 (명목상) 대개 1월이지만, 첫 연도인 1877년의 경우에는 6월이었다. 1877년에는 "다른 전의 예에 의거하여(依他廛例)"라는 표현도 적혀 있다. 보낸 날짜 아래에 금액을 적었는데, 일률적으로 8냥이다. 금액 아래에는 보낸 사람의 성명을 적었다. 1883년(癸未)부터 1891년(辛卯)까지는 1월이라는 명목 외에도 12월에 "미리 지급(預給)"하였음을 따로 밝혀 놓았다. 처음 3년간은 "대외 공론으로 부득이 지급"했다고 되어 있으나, 이후 3년간은 "작년의 예에 따라"라고 해 두었으며, 마지막 3년간은 별도의 언급이 없다.
(9) 세자궁(世子宮) 별감방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좌, 우번에 해마다 1월에 8냥씩 예송한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보낸 내역은 1877년(丁丑)을 시작으로 1891년(辛卯)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는데, 좌번, 우번을 따로 적어 놓은 경우도 보인다. 보낸 날짜는 (명목상) 대개 1월이지만, 첫 연도인 1877년의 경우에는 6월이었다. 1877년에는 "다른 전의 예에 의거하여(依他廛例)"라는 표현도 적혀 있다. 보낸 날짜 아래에 금액을 적었는데, 일률적으로 8냥이며, 좌, 우번으로 나눈 경우에는 각 4냥씩이다. 금액 아래에는 보낸 사람의 성명을 적었고, "가지고 갔음"을 적어 두기도 했다. 1882년(壬午)까지는 당년(當年)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으나, 1883년(癸未)부터 1891년(辛卯)까지는 1월이라는 명목상의 날짜가 아니라 12월에 "미리 지급(預給 또는 先給)"하였음을 밝혀 놓았다. 처음 3년간은 "대외 공론으로 부득이 지급"했다고 되어 있으나, 이후로는 별도의 언급이 없다.
(10) 승정원 아방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1865년(乙丑)을 시작으로 1891년(辛卯)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빠짐없이 한 차례씩 기재되어 있는데, 보낸 날짜는 대개 2월에서 4월 사이이지만, 5월이나 6월도 보인다. 보낸 날짜 아래에 금액을 적었는데, 일률적으로 15냥이다. 금액 아래에는 보낸 사람의 성명을 적고 "가지고 감" 또는 "거(去)"라는 표현을 적어 두는 형식이다.
(11) 상의원 아방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1865년(乙丑)을 시작으로 1891년(辛卯)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한 차례씩 기재되어 있는데, 1866년(丙寅)만 예외적이다. 1868년(戊辰)부터 1871년(辛未)까지 4개 연도에 대해 등자(鐙子) 표시를 하고서 "1866년 2월에 대회 공론으로 4년분 100냥을 미리 지급(先下)"했다고 기재해 두었다. 이후로도 1868년(戊辰)에는 1872년(壬申)분을 미리 지급한 내역을 적는 등 실제 지급은 미리 이루어지고 있다. 해마다 보낸 금액은 25냥으로 일률적으로 동일하다. 지급의 주체는 대개 수토양계(水吐兩契), 즉 수주계(水紬契)와 토주계(吐紬契)였으며, 각기 절반인 12냥 5돈씩을 분담하였다. 1887년(丁亥) 기록의 뒷부분에, 보용소(補用所)와 왜단소(倭單所)에서 각각 12냥 5돈씩을 받아서 지급했다는 표현(上用給)이 보인다. 보낸 날짜는 대개 2월 아니면 3월이지만, 1월도 보인다. 보낸 날짜 아래에 금액을 적었는데, 일률적으로 15냥이다. 금액 아래에는 보낸 사람의 성명을 적고 "가지고 감" 또는 "거(去)"라는 표현을 적어 두는 형식이다.
(12)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아방에 보낸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매년 10월 치성전(致誠錢) 2냥, 12월 10냥, 합계 12냥"이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보낸 내역은 1881년(辛巳)부터 1891년(辛卯)까지 기록되어 있고, 보낸 날짜는 2월, 4월, 9월, 10월, 11월, 12월 등 제각각이다. 그 내역에 대해서는 "당년 치성(當年致誠)", "당년 예송(當年例送)" 등으로 표현하였고, 보낸 금액은 2냥 또는 10냥이다. 금액 아래에는 보낸 사람의 성명을 적고 "가지고 감" 또는 "거(去)"라는 표현을 적어 두는 형식이다. "보용소에서 받아 씀(補用所上用)" 등의 내역을 적은 사례도 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내역 역시 대체로 위와 같은 양식에 따라 기관별로 작성되어 있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단, 특이사항으로서, 본문 사이에 별지가 끼워져 있는 사례들이 보인다. 예컨대, 앞의 (12)가 시작하는 부분에 8장의 별지가 (부착되지 않은 채로) 끼워져 있다. 첫 번째 별지에는 "契房 列位 僉尊侍 恐 鑑仰單今此致誠之物依例惠送如何 辛卯九月日內務府亞房崔"라고 적은 위에 도장이 찍혀 있다. 나머지 별지도 이와 유사한 양식이며, 맨 뒤의 별지는 통리아문(統理衙門) 대방(大房) 명의의 것이다. 8장 상호간에는 상단이 서로 풀로 붙어 있다. 이와 유사한 별지가 곳곳에서 (부착되거나 또는 부착되지 않은 채로) 확인되는데, 대개 이런 것들은 당해 기관에서 발행한 '영수증'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지적 가치
면주전의 『각처계방책』(총 1책)은 필사본(筆寫本)이자 유일본(唯一本)으로서, 원본은 일본에 있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의 가와이문고(河合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종래에는 일본 현지에서 마이크로필름(M/F) 형태로만 열람․복제할 수 있었으나, 1997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조사․영인하여 보관하게 됨으로써, 이후로는 그 영인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촬영이나 복제가 허용되지 않았고, 열람 절차가 무척 번거로웠다는 점에서 연구 자료로서 활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각처계방책』의 기록이 1865년부터 시작되는 이유는 1864년 말에 면주전 도가(都家)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때까지의 문서나 장부가 거의 모두 소실(燒失)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의 1864년 12월 16일자의 기사 중 "지금 면주전 시민(市民)들의 정소(呈訴)를 받아보니 전번에 화재가 났을 때 거접하는 도고(都賈)와 좌고(坐賈)들이 수직(守直)하는 방(房)이 전부 타버리는 바람에 진상하기 위해 준비해둔 각종 물자와 거행하는 문부(文簿)들을 하나도 건져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그러한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용적 가치
면주전 자료의 존재가 학계에 알려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면주전의 운영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의 장부를 하나하나 판독하고 이해한 다음, 상호 관계에 이르기까지 분석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처계방책』(총 1책)은 면주전에서 관계 기관에 정례적으로 바친 돈의 내역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기관별로 돈을 보낸 시기나 금액 등의 차이가 확인되므로, 구체적인 실상에 대해 상세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須川英德, 「朝鮮時代の商人文書について─綿紬廛文書を中心に─」, 『史料館硏究紀要』34, 史料館, 2003.
Owen Miller, “The silk merchants of the Myŏnjujŏn: guild and government in late Chosŏn Korea,”, Ph.D. dissertation,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SOAS), University of London, 2007.
須川英德, 「시전상인과 국가재정: 가와이[河合]문고 소장의 綿紬廛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조영준 역해, 『시폐(市弊)─조선후기 서울 상인의 소통과 변통─』, 아카넷,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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