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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칠월일(辛巳七月日) 수주조비책(水紬措備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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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1883.0000-20170331.KY_W_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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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경제-상업 | 사부-시전류
· 작성주체 면주전(綿紬廛) 편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한성(漢城) : 면주전(綿紬廛), 고종20(1883)-고종 32(1895)
· 형태사항 不分卷1冊(40張) : 行字數不定 ; 34.5 X 38.3 cm
· 주기사항 表題:辛巳(1881)七月日水紬措備冊
內容:綿紬廛에서 水紬를 措備하여 都家에 들인 記錄
印:「綿紬廛」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シ-60 199958

안내정보

조선후기 서울의 시전(市廛) 중 하나였던 면주전(綿紬廛)의 내부 조직인 수주계(水紬契)의 회계 장부로서, 1883년(癸未) 6월 1일부터 1895년(乙未) 2월 11일까지 11년 8개월여 동안 수주를 마련하여 도가에 들인(入都家), 입하(入荷)에 관한 기록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장부의 작성은 면주전에서 이루어졌다. 면주전은 토산(土産)의 면주(綿紬)를 팔던 곳이며(『한경지략(漢京識略)』), '면주'란 명주(明紬)라고도 하는 비단, 즉 견포(絹布)를 가리킨다. 서울의 시전 중에는 국역(國役)의 분담 비율인 푼수(分數)가 규정된 유푼전(有分廛)과 그렇지 않은 무푼전(無分廛)이 있었는데, 면주전은 유푼전의 하나였고 8푼(八分)의 국역을 부담하였다. 중국산 비단을 취급한 선전(立廛)의 10푼, 토산의 무명을 취급한 면포전(綿布廛)의 9푼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푼수에 해당하므로, 육주비전(六矣廛)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면주전의 위치는 면포전 뒤, 전옥서(典獄署) 앞이었다(『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면주전에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내부 조직이 있었으며, 수주계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수주계'에 대한 설명을 별도로 하지 않고 있으나, '수주이소(水紬二所)'에 대해 "수주계(水紬契). 수주를 조달․납품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해설함으로써 '수주계'와 '수주이소'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수주이소 외에 수주일소(水紬一所)가 별도로 있었으며, 이들 '소(所)'는 '계(契)' 내에 설치된 기금이라고 생각된다. 조선후기 시전에서 전체 조직으로서의 전(廛) 내에 설치되었던 계(契)와 소(所)의 성격이나 차이점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현재까지의 이해에 따르면, '계'는 사무 담당과 구성원이 있는 조직으로, '소'는 자금 관리 등 사무 담당만 있는 조직으로 파악되고 있는 수준이다. 수주일소나 수주이소를 수주계 내에 설치된 기금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그 장부 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수주일소 또는 수주이소에서 작성하여 관리한 장부는 『상용책(上用冊)』, 『차하책(上下冊)』 및 『전장등록(傳掌謄錄)』의 세 가지이다. 『상용책』은 지출 장부, 『차하책』은 수입 장부, 『전장등록』은 인계인수 장부에 해당한다. 반면에, 수주계에서 작성하여 관리한 장부로는 『수가책(受價冊)』과 『회계책(會計冊)』 등이 있다. 『수가책』은 대금의 수취와 그 항목별 지출을 기록한 장부, 『회계책』은 면주 조달을 위해 실제 지출되는 대금과 납품용 면주의 조달을 기록한 장부에 해당한다. 그런데 『조비책(措備冊)』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에서 자세히 검토된 바가 없으나, 『상용책』, 『차하책』 및 『전장등록』과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수가책』이나 『회계책』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장부 체계를 통해, 수주계가 대외적인 면주 상납이나 진배(進排)를 위한 조직이었고, 수주일소와 수주이소는 조직 내의 자금관리(특히 상호부조)에 관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성 및 내용
표제는 『신사칠월일수주조비책(辛巳七月日水紬措備冊)』이다. 표제와 달리, 본문의 기재는 1883년(癸未) 6월 1일자부터 시작하고 있다.
날짜별로 수주를 도가에 들인 내역에 대한 기재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오른쪽의 열에 간지(干支)와 월일(月日)을 적고, 다음 열에 도가에 들인 수주의 내역을 적은 다음, 그 다음 열에 '대방(大房)'이라고 적고 날인을 하는 형식이다. 이후 날짜의 내역을 적을 때에는 이전에 날인된 곳 바로 아래에 다시 간지와 월일을 적으면서 시작하는 형식으로, 날짜와 날짜 사이의 기록이 1열씩 중첩되는 구조를 보인다. 조비(措備) 내역에 포함되는 글자 수가 많지 않은 경우에는 단순히 3열만으로써 기록이 끝나게 되지만, 글자 수가 많은 경우에는 여러 열에 걸쳐 작성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특정 날짜가 반복하여 등장하는 사례도 보이는데, 각각 별개의 건으로 처리되었으며, 같은 날짜의 내역이라고 하더라도 통합하여 작성되지는 않았다. 장부의 작성이 날짜별․건별로 이루어져서인지, 연속된 날짜의 기재 내역에서도 글씨의 모양이 달라지는 사례가 많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특정 인물이 장기에 걸쳐 장부의 작성을 전담하고 있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둘째는 도가에 들인 내역을 주기적으로 일괄 작성한 것이 아니라, 조비가 발생할 때마다 그때그때 작성하였으리라는 점이다.
도가에 들인 내역을 적을 때에는 전기(前期)의 재고, 제외 항목 및 내역(명목), 실제로 도가에 들인 수량, 끝맺는 투식(套式)의 순서로 작성하였다. 개개의 건별로 도가에 들인 내역의 기재가 끝나는 곳의 투식은 "도가에 들임. 끝(入都家印)"으로 모두 동일하다. 전체적으로, 기입된 내역이 대동소이하므로 세 가지 사례만 옮겨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전기에 남은 수주 8동 19필 중에서 이번에 남색으로 물들인 수주를 진상한 7동, 색(色) 7필, 상고(廂庫)의 고지기 정채 7필을 본색에서 지급하였으므로, 나중에 조비하기 위해 1필당 7냥씩 49냥을 보용소에 지급한 합계 7동 14필을 제외한, 실제 1동 5필을 도가에 들임. 끝(前在水紬捌同拾玖疋內今番染藍水紬進上柒同色柒疋廂庫庫直情柒疋本色給故日後措備次每疋柒兩式肆拾玖兩補用所上下合柒同拾肆疋除實壹同伍疋入都家印, 1883년 6월 1일자)".
"전기에 남은 수주 1동 5필 중에서 수주계에 옮겨간 6필을 제외한 실제 49필을 도가에 들임. 끝(前在水紬壹同伍疋內水紬契移去陸疋除實肆拾玖疋入都家印, 1883년 6월 9일자)"
"전기에 남은 수주 46필, 이번에 새롭게 마련한 상주 30필을 합하여 76필을 도가에 들임. 끝(前在水紬肆拾陸疋今番新措備上紬參拾疋合柒拾陸疋入都家印, 1883년 12월 19일자)"
위의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은 전기(前期)에 도가에 들인(入都家) 잔액을 항상 우선적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사칠월일수주조비책』이 단순히 마련하여 들인 수주의 양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재고와의 비교를 통해 정산하여 확인해 두기까지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매 기록마다 마지막에 적혀 있는 "실제로 ○○○을 도가에 들임(實○○○入都家)"이라는 표현에 적힌 수주의 양을 그 다음에 기록된 내역의 처음에 시작하는 "전기에 남은 수주○○○(前在水紬○○○)" 부분과 비교해 보면, "○○○"에 적힌 수량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도가의 재고로 있던 수주가 어떤 용도로 얼마만큼 줄어들었는지를 "제(除)"라는 표현 앞에 하나하나 적어두고 있다. 이는 『신사칠월일수주조비책』이 수주의 입하뿐만 아니라 출하(出荷)에 관한 정보까지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순수하게 "새롭게 마련(新措備)"한 수주에 관한 내역 외에는 염색이나 기타 용도를 위해 도가(都家)로부터 나간 내역도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신사칠월일수주조비책』은 수주의 입고, 출고, 재고를 모두 기록한 도가의 수주 출납대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날짜별로 도가에 입하된 수주의 내역에 대한 결재는 면주전 조직의 대방에 의해 이루어졌다. 장부의 작성자가 날짜별 기록의 끝에 "대방"이라고 적어 놓으면, 그 아래에 담당자가 도장을 찍는 형식이었다. 도장은 위아래로 길쭉한 형태의 직사각형 모양으로서(2.0cm×4.0cm), 인영(印影)을 통해 "면주전(綿紬廛)"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날인은 붉은 색의 인주가 아닌 검은색 먹물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다. 대방의 결재가 면주전 도장에 의해 이루어진 이유는, 대방이 면주전 도중 전체를 통괄하는 기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부가 수주의 도가에서의 출납 내역을 담고 있기 때문에, 대방에서 면주전 명의의 도장을 찍는 행위는 조직으로서의 면주전 전체의 승인 또는 결재가 이루어짐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 내역도 더러 보인다. 이를 통해 수주의 도가 출납에 대한 승인이 면주전 조직에 의해 꼼꼼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개별 날짜별・건별 내역에 대한 날인 여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개개의 날짜별・건별 내역의 금액 기록의 오른쪽에 주필로 점이나 선이 표시되어 있는 사례가 보이는데, 이는 정산을 하기 위해 수치를 일일이 확인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문 외에 특이사항으로서, 별지(別紙)가 부착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앞표지 뒷면에 1890년 10월 8일(庚寅十月初八日)의 수주 신조비(新措備) 등에 관한 정산 내역이 부착되어 있다. 다음으로 본문 중간에도 1890년 8월 18일(庚寅八月十八日)자로 작성된 별지, "1891년 5월 19일 수주 입도가 회계기(辛卯五月十九日水紬入都家會計記)", 1891년 7월 25일(辛卯七月二十五日)자로 작성된 별지 등이 해당 일자 부분에 부착되어 있다.
그리고 뒷표지 안쪽에 여러 장의 종이가 한꺼번에 부착되어 있는데, "1889년 3월 수주사용조비차초출(己丑三月日水紬私用措備次抄出)", "1890년 5월 수주사용조비초출기(庚寅五月日水紬私用措備抄出記)" 등을 비롯하여 다양하다. 특히 "1890년 5월 수주사용조비초출기"에는 10장 이상의 여러 가지 문서가 점련(粘連)되어 있어, 성책(成冊) 유형의 자료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낱장의 기록을 통해 수주의 조비 등에 관한 구체적인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서지적 가치
면주전의 『수주조비책』(총 2책)은 필사본(筆寫本)이자 유일본(唯一本)으로서, 원본은 일본에 있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의 가와이문고(河合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종래에는 일본 현지에서 마이크로필름(M/F) 형태로만 열람․복제할 수 있었으나, 1997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조사․영인하여 보관하게 됨으로써, 이후로는 그 영인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촬영이나 복제가 허용되지 않았고, 열람 절차가 무척 번거로웠다는 점에서 연구 자료로서 활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현존하는 2책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고, 기재된 내역은 1864년부터 1895년까지에 해당한다.
제1책: 1865년(乙丑) 1월 5일부터 1883년(癸未) 5월 20일까지 (18년 4개월여)
제2책: 1883년(癸未) 6월 1일부터 1895년(乙未) 2월 11일까지 (11년 8개월여)
『수주조비책』의 기록이 1865년부터 시작된 이유는 1864년 말에 면주전 도가(都家)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때까지의 문서나 장부가 거의 모두 소실(燒失)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의 1864년 12월 16일자의 기사 중 "지금 면주전 시민(市民)들의 정소(呈訴)를 받아보니 전번에 화재가 났을 때 거접하는 도고(都賈)와 좌고(坐賈)들이 수직(守直)하는 방(房)이 전부 타버리는 바람에 진상하기 위해 준비해둔 각종 물자와 거행하는 문부(文簿)들을 하나도 건져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그러한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수주조비책』의 마지막 기록은 1895년에 이루어졌다. 면주전의 내부 조직 중에서 『조비책』이 현존하는 사례는 수주계 외에도 『판주조비책(版紬措備冊)』에서 찾을 수 있는데, 1892년이 기록의 마지막이다. 이렇게 양자 모두 1894년 이후까지 작성된 사례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확인되는 이유는 1894년의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인해 시전(市廛) 및 공계(貢契)가 국가에 대하여 행하던 공식적 조달 업무가 역사의 뒤로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용적 가치
면주전 자료의 존재가 학계에 알려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면주전의 운영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의 장부를 하나하나 판독하고 이해한 다음, 상호 관계에 이르기까지 분석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주조비책』(총 2책)은 면주전에서 수주를 마련하여 도가에 들인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1865년부터 1895년까지 약 30년간에 걸쳐 연속적으로 작성되어 있으므로, 수주의 조비(措備)에 관한 장기적 추이를 살필 수 있다. 면주전 자료 중에서 연도별로 부분적인 누락 없이 현존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가치를 가지는 자료임에 틀림없다. 또한 토주계(吐紬契), 상주계(上紬契), 무주계(貿紬契), 세폐계(歲幣契) 등의 『조비책』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수주계의 전체적인 운영을 비롯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수주조비책』 외에도 현존하는 『수주계회계책(水紬契會計冊)』(총 1책), 『수주수가책(水紬受價冊)』(총 1책) 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須川英德, 「朝鮮時代の商人文書について─綿紬廛文書を中心に─」, 『史料館硏究紀要』34, 史料館, 2003.
Owen Miller, “The silk merchants of the My?njuj?n: guild and government in late Chos?n Korea,”, Ph.D. dissertation,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SOAS), University of London, 2007.
須川英德, 「시전상인과 국가재정: 가와이[河合]문고 소장의 綿紬廛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조영준 역해, 『시폐(市弊)─조선후기 서울 상인의 소통과 변통─』, 아카넷, 2013.
집필자 :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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