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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시월일(辛卯十月日) 보용소상용책(補用所上用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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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1891.0000-20170331.KY_W_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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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경제-상업 | 사부-시전류
· 작성주체 면주전(綿紬廛) 편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한성(漢城) : 면주전(綿紬廛), 고종28(1891)-고종 32(1895)
· 형태사항 不分卷1冊(119張) : =行字數不定 ; 31.0 X 29.8 cm
· 주기사항 表題:辛卯(1891)十月日補用所上用冊
內容:綿紬廛 大房 所屬 補用所의 支出 帳簿
印:「綿紬廛」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シ-77 199956

안내정보

조선후기 서울의 시전(市廛) 중 하나였던 면주전(綿紬廛)의 내부 조직인 보용소(補用所)의 회계 장부로서, 1891년(辛卯) 10월 27일부터 1895년(乙未) 7월 27일까지 3년 9개월여 동안의 지출 내역을 날짜별로 기록한 것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장부의 작성은 면주전에서 이루어졌다. 면주전은 토산(土産)의 면주(綿紬)를 팔던 곳이며(『한경지략(漢京識略)』), '면주'란 명주(明紬)라고도 하는 비단, 즉 견포(絹布)를 가리킨다. 서울의 시전 중에는 국역(國役)의 분담 비율인 푼수(分數)가 규정된 유푼전(有分廛)과 그렇지 않은 무푼전(無分廛)이 있었는데, 면주전은 유푼전의 하나였고 8푼(八分)의 국역을 부담하였다. 중국산 비단을 취급한 선전(立廛)의 10푼, 토산의 무명을 취급한 면포전(綿布廛)의 9푼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푼수에 해당하므로, 육주비전(六矣廛)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면주전의 위치는 면포전 뒤, 전옥서(典獄署) 앞이었다(『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면주전에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내부 조직이 있었으며, 보용소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보용소는 (1) 세폐(歲幣) 대금(代金) 등의 잉여를 입금하여, 면주전의 회계를 관리한 곳, (2) 면주전 전체의 주요한 운영자금을 관리한 재무담당 조직, (3) 면주전의 운영 기금 등으로 알려져 있다. 보용소에서는 『상용책(上用冊)』과 『차하책(上下冊)』이라는 두 가지 장부를 작성하여 관리했다. 『상용책』은 지출 장부, 『차하책』은 수입 장부에 해당한다. 기재된 내용을 면주전 내에서 작성된 다른 조직의 『상용책』․『차하책』과 비교해 보면, 보용소의 『상용책』․『차하책』에는 면주전의 '운영'을 위한 자금의 출입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보용소가 면주전의 운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금이었음을 보여준다.
구성 및 내용
표제는 『신묘십월 일보용소상용책(辛卯十月 日補用所上用冊)』이다.
날짜별 지출의 기재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오른쪽의 열에 간지(干支)와 월일(月日)을 적고, 다음 열에 지출의 내역과 금액을 적은 다음, 그 다음 열에 '대방(大房)'이라고 적고 날인을 하는 형식이다. 이후 날짜의 지출을 적을 때에는 이전에 날인된 곳 바로 아래에 다시 간지와 월일을 적으면서 시작하는 형식으로, 날짜와 날짜 사이의 기록이 1열씩 중첩되는 구조를 보인다. 지출 내역에 포함되는 글자 수가 많지 않은 경우에는 단순히 3열만으로써 기록이 끝나게 되지만, 글자 수가 많은 경우에는 여러 열에 걸쳐 작성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특정 날짜가 반복하여 등장하는 사례도 보이는데, 각각 별개의 건으로 처리되었으며, 같은 날짜에 이루어진 지출이라고 하더라도 통합하여 작성되지는 않았다. 장부의 작성이 날짜별․건별로 이루어져서인지, 연속된 날짜의 기재 내역에서도 글씨의 모양이 달라지는 사례가 많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특정 인물이 장기에 걸쳐 장부의 작성을 전담하고 있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둘째는 지출을 주기적으로 일괄 작성한 것이 아니라, 지출이 발생할 때마다 그때그때 작성하였으리라는 점이다.
지출의 내역과 금액을 적을 때에는 지출의 내역(명목), 금액, 끝맺는 투식(套式)의 순서로 작성하였다. 개개의 건별로 지출의 내역 및 금액의 기재가 끝나는 곳의 투식은 "상용끝(上用印)"으로 모두 동일하며, 이는 "받아 쓰는 것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상용(上用)'은 "받아 쓴다"는 뜻으로서 수입(收入)을 가리키며, '인(印)'은 "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소개하였듯이, 기존 연구에서는 면주전의 장부류에 대해서는 『상용책』이 지출을, 『차하책』이 수입을 기록한 장부로 이해하고 있다. 보용소의 지출 장부에 기재된 건별 내역을 "받아 쓴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아마도 면주전 전체를 통괄하는 조직인 대방과의 관계에 따른 상대적 표현일 것이리라 생각된다. 즉, 대방 측에서의 지출이 보용소 측의 수입이 되며, 보용소 측에서의 지출이 대방 측에서의 수입이 되는 형식인 것이다. 지출의 금액은 모두 동전으로 표기되었으며, 당대에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단위인 "양(兩)", "돈(戔)", "푼(分)"이 사용되었다. 금액에 표기되는 모든 숫자가 '갖은자'로 이루어졌고, 단위로서의 '돈'을 '錢' 대신에 '戔'으로 표기하였음은 통상의 회계기록과 마찬가지이다.
기재되어 있는 지출의 명목은 다양하며, 이를 통해 면주전의 조직 운영에 대한 여러 면모를 속속들이 살필 수 있다. 하나하나 소개하기에는 지면의 제약이 있으므로, 비교적 기재 내역이 간단한 몇 가지만 예시해 두도록 하자. 첫째, "한성부의 선이자 4냥을 받아 씀. 끝(漢城府先邊肆兩上用印, 1892년 5월 22일자)"과 같이 이자의 지출에 관계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식리(殖利)와 관계된 다른 내역으로서 "방물차지가 생식한 돈 중에서 100냥을 받아 씀. 끝(方物次知生殖錢中壹百兩上用印, 1892년 10월 13일자)"과 같은 사례도 보이고 있다.
둘째, "상고에 내입하는 판주 3동 중에서 2동 17필의 대전으로 1필당 12량씩 1,404냥을 두 소(所)에 반으로 나눈 702냥 받아 씀. 끝(廂庫內入版紬參同中貳同拾柒疋代錢每疋拾貳兩式壹仟肆百肆兩兩所分半柒百貳兩上用印, 1892년 12월 21일자)"과 같이 왕실이나 관부에 비단을 조달한 내역과 관계된 내용도 자주 등장한다.
셋째, "전설사 장방에 의례히 보내는 15냥을 받아 씀. 끝(典設司長房例送拾伍兩上用印, 1892년 3월 13일자)"과 같이 관계 기관에 정기적으로 보낸 돈의 내역도 보인다. 형조 금란방(刑曹禁亂房), 사헌부(司憲府)의 금란방(禁亂房), 패두방(牌頭房), 수청방(隨廳房), 호조 당상 아방(戶曹堂上亞房) 등도 보인다.
넷째, "저동 한판서댁 혼례 때의 소볼기살 1부 값 33냥을 받아 씀. 끝(苧洞韓判書宅婚禮時牛臀壹部價參拾參兩上用印, 1892년 9월 19일자)", "저동 한판서댁 친기(親忌) 때의 소볼기살 1부 값 35냥을 받아 씀. 끝(苧洞韓判書宅親忌時牛臀壹部價參拾伍兩上用印, 1892년 9월 25일자)" 등과 같이 관련 인물의 부조(扶助)를 위한 지출도 보인다.
날짜별로 작성된 지출 내역에 대한 결재는 면주전 조직의 대방에 의해 이루어졌다. 장부의 작성자가 날짜별 기록의 끝에 "대방"이라고 적어 놓으면, 그 아래에 담당자가 도장을 찍는 형식이었다. 도장은 위아래로 길쭉한 형태의 직사각형 모양으로서(2.0cm×4.0cm), 인영(印影)을 통해 "면주전(綿紬廛)"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날인은 붉은 색의 인주가 아닌 검은 색의 먹물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다. 대방의 결재가 면주전 도장에 의해 이루어진 이유는, 대방이 면주전 도중 전체를 통괄하는 기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부가 보용소의 지출 내역을 담고 있기 때문에, 대방에서 면주전 명의의 도장을 찍는 행위는 조직으로서의 면주전 전체의 승인 또는 결재가 이루어짐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 내역도 상당수 보인다. 이를 통해 보용소의 자금 지출에 대한 승인이 면주전 조직에 의해 꼼꼼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개별 날짜별・건별 내역에 대한 날인 여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장부 내에서 간헐적인 정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산은 주필(朱筆)로 작성되었는데, 일반적인 지출 내역과 같은 형식으로 날짜, 내역, '대방'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최초로 등장하는 사례를 옮겨 적어 보면, "이상 종종 받아쓴 원리합계 79,449냥 1푼을 회감함. 끝(已上種種上用本邊合柒萬玖仟肆佰肆拾玖兩壹分會減印, 1891년 11월 25일)"과 같다.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한데 묶어서 원리합계를 정산하여 별도의 장부에 옮겨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정산의 기록이 1892년(壬辰) 5월 25일, 1892년(壬辰) 11월 25일 등으로 주기적으로 등장하며, 맨 마지막의 정산이 1895년(乙未) 5월 25일인 것으로 미루어 판단컨대, 매년 5월과 11월의 두 차례에 걸쳐 당월 25일에 정산되고 있었다. 정산 내역 뒤에 적은 '대방' 아래에는 도장이 찍혀 있지 않다.
개개의 날짜별・건별 내역의 금액 기록의 오른쪽에 주필로 점이나 선 또는 'P'자 형의 기호가 표시되어 있는 사례가 보이는데, 이는 정산 과정에서 모든 수치를 일일이 확인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붉은 색으로 점을 찍거나 선을 그어둔 내역은 별도의 장책으로 이기(移記)되었음을, 'P'자 형의 기호가 표시된 내역은 채무(관계)가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P'자 형의 기호로 처리된 사례를 한 가지만 예시하면, "당기 내의 일용에 부족한 14냥 4돈을 받아씀. 끝(等內日用不足拾肆兩肆戔上用印, 1894년 2월 30일자)"과 같다.
정산 과정에서 애초에 기재해 두었던 내역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894년(甲午) 4월 15일의 사례를 보면, 처음에는 "각방에 복정한 토주를 득납한 사람인 천일환(千一煥)의 자적토주 39척에 대해 1척당 1냥 8돈씩 70냥 2돈을 받아씀. 끝(各房卜定吐紬得納人千一煥紫的吐紬參拾玖尺每尺壹兩捌戔式柒拾兩貳戔上用印)"이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나중에 "2돈(貳戔)"과 "받아씀(上用)"의 사이에 "생식한 돈 중에서(生殖錢中)"라는 표현을 삽입하도록 주필로 추기해 놓고 있다. 1893년(癸巳) 12월 20일의 내역 뒤에도 "1894년 2월에 원금과 이자를 갖추어 되갚았음(甲午二月具本邊還報)"이라고 한, 추후의 채무 변제 상황에 대해 부기한 내역이 보인다.
서지적 가치
면주전의 『보용소상용책』(총 6책)은 필사본(筆寫本)이자 유일본(唯一本)으로서, 원본은 일본에 있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의 가와이문고(河合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종래에는 일본 현지에서 마이크로필름(M/F) 형태로만 열람․복제할 수 있었으나, 1997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조사․영인하여 보관하게 됨으로써, 이후로는 그 영인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촬영이나 복제가 허용되지 않았고, 열람 절차가 무척 번거로웠다는 점에서 연구 자료로서 활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현존하는 6책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874년부터 1904년까지에 해당하는데, 1881년 6월 하순부터 1891년 10월 하순까지의 9년 4개월여 동안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 낙질(落帙)되어 있다. 그런데 회계의 처리는 항상 수입과 지출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다시 말해 『보용소차하책』의 작성과 『보용소상용책』의 작성이 항상 '세트'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보용소차하책』 중에서 1909년 6월까지 작성된 것도 있다는 점을 통해 『보용소상용책』 역시 1909년 6월까지 작성되었으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1904년 10월부터 1909년 6월까지의 4년 7개월여 동안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을 『보용소상용책』이 낙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제1책: 1874년(甲戌) 3월 30일부터 1877년(丁丑) 3월 6일까지 (2년 11개월여)
제2책: 1877년(丁丑) 3월 9일부터 1881년(辛巳) 6월 20일까지 (4년 3개월여)
제3책: 1891년(辛卯) 10월 27일부터 1895년(乙未) 7월 27일까지 (3년 9개월여)
제4책: 1895년(乙未) 7월 29일부터 1898년(戊戌) 12월 24일까지 (3년 4개월여)
제5책: 1898년(戊戌) 12월 27일부터 1901년(辛丑) 11월 20일까지 (2년 10개월여)
제6책: 1901년(辛丑) 11월 20일부터 1904년(甲辰) 9월 29일까지 (2년 10개월여)
또한 제1책의 시작 부분에 "1865년(乙丑)부터 1874년(甲戌) 2월까지 11년 간의 『상용책』은 서실(閪失)되었다"는 기재가 되어 있어, 『보용소상용책』의 기록이 1865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용소상용책』의 기록이 1865년부터 시작된 이유는 1864년 말에 면주전 도가(都家)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때까지의 문서나 장부가 거의 모두 소실(燒失)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의 1864년 12월 16일자의 기사 중 "지금 면주전 시민(市民)들의 정소(呈訴)를 받아보니 전번에 화재가 났을 때 거접하는 도고(都賈)와 좌고(坐賈)들이 수직(守直)하는 방(房)이 전부 타버리는 바람에 진상하기 위해 준비해둔 각종 물자와 거행하는 문부(文簿)들을 하나도 건져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그러한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용적 가치
면주전 자료의 존재가 학계에 알려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면주전의 운영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의 장부를 하나하나 판독하고 이해한 다음, 상호 관계에 이르기까지 분석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용소상용책』(총 6책)은 면주전 전체의 운영 자금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었는지를 지출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 연속된 내용을 담은 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전체적인 지출의 내용 구성뿐 아니라 추이에 대한 정보까지 제공한다. 운영 자금의 입체적․다면적 이해를 위해서는 『보용소차하책』(총 5책)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須川英德, 「朝鮮時代の商人文書について─綿紬廛文書を中心に─」, 『史料館硏究紀要』34, 史料館, 2003.
Owen Miller, “The silk merchants of the My?njuj?n: guild and government in late Chos?n Korea,”, Ph.D. dissertation,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SOAS), University of London, 2007.
須川英德, 「시전상인과 국가재정: 가와이[河合]문고 소장의 綿紬廛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경제체제론의 접근─』,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조영준 역해, 『시폐(市弊)─조선후기 서울 상인의 소통과 변통─』, 아카넷, 2013.
집필자 :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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