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1676년 양인(良人) 이영남(李永男) 가대(家垈) 매매명문(賣買明文)

묶음해제 이미지+텍스트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XE.1676.0000-20150413.KY_X_0232_008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 작성주체 발급 : 오일(五日)
수취 : 이영남(李永男)
· 작성시기 강희 15(1676)
· 형태사항 1張 | 종이 | 한자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232

연결자료 묶음해제

안내정보

1676(숙종 2)년 2월 15일에 양인(良人) 이영남(李永男)이 신생원댁(申生員宅) 노(奴) 오일(五日)로부터 집터를 사면서 발급받은 매매명문(賣買明文)이다. 집터는 60칸 규모로 한성부 동부 창선방 어의동(지금의 종로구 종로5가 부근)에 있는 것이다. 매매가격은 은자 7냥이다.

상세정보

1676(숙종 2)년 2월 15일에 良人 李永男가 申生員宅 奴 五日로부터 家垈를 사면서 발급받은 賣買明文이다. 조선시대 양반은 토지를 거래할 때 직접 나서지 않고 소유한 노비에게 행정절차를 대신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 오일 역시 상전인 '申'에게 牌旨에 따라 토지거래를 대행하고 있다.
오일의 상전이 집터를 파는 이유는 '요긴히 쓰기 위해서'이다. 거래목적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매매가격은 다음과 같다.
-소유경위 : 상전이 지난 갑진년(1664)에 木手 郭繼宗의 妻 洪召史에게 매득한 것
-위치 : 東部 昌善坊 於義洞(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부근)
-규모 : 60칸
-사표 : 東-許參奉 空垈, 西-德香 空垈, 南-小路, 北-申生員宅
-매매가격 : 銀子 7냥
본 거래의 목적물의 소유경위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1664년에 郭繼宗의 妻 洪召史에게 매득했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재 '1664년 안생원(安生員) 노(奴) 수영(守永) 가대매매(家垈賣買) 사급입안(斜給立案)'이 남아있는데, 安晩成의 奴 守永가 洪召史로부터 산 것에 대한 입안이다. 그리고 1675년에 안만성으로부터 幼學 申澮가 집터를 사고 한성부로부터 발급받은 '1675년 유학(幼學) 신회(申澮) 가대매매(家垈賣買) 사급입안(斜給立案)'도 남아 있다.
이상의 문서는 於義洞에 있는 60칸 규모의 집터의 주인이 洪召史→安晩成→申澮로 변동되는 것을 보여준다.
1664년,1675년 사급인안에의 거래 목적물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위치 : 東部 於義洞 昌善坊(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부근)
-규모 : 60칸
-사표(1664년) : 東-許參奉 空垈, 西-白生員 空垈, 南-小路, 北-李甲山 空垈
본 가대 매매명문에서 거래하는 목적물과 위치와 규모가 같다. 그리고 四標를 비교하면 동서남북의 地目이 같고, 동쪽과 남쪽은 동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1664년, 1675년 입안에서 명시하는 거래 목적물은 본 매매명문에서의 목적물과 동일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본 매매명문의 목적물을 산 시점이 갑진년(1664)이다. 따라서 오일의 상전의 '申' 1765년에 해당 토지를 매득한 幼學 申澮으로 볼 수 있고, 신회는 洪召史로부터 집터를 산 것이 아니고 安晩成로부터 산 것이다. 洪召史에게 집터를 산 사람은 안만성이고(1664년), 안만성이 이를 신회에게 팔았고(1675년), 신회가 다시 奴 五日를 시켜서 良人 李永男에게 팔고 있는 것이다.(1676년)
다시 문서 본문으로 돌아가면, 본문기 2장을 함께 넘긴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이상에서 언급한 1664년과 1675년의 매매 사급입안을 가리킨다.
거래 당자사 이외에 거래에 참여한 인원은 증인 壇直 高三男, 僉知 鄭應龍과 筆執 山人 崔孝立이 있다. 모두 수결을 하고 있다.
집필자 : 명경일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