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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장서인영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C.0000.0000-20090715.AS_SA_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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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소설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無匡郭, 無界, 12行25字, 無魚尾 ; 26.3 X 20.5 cm
· 주기사항 異書名: 皮生冥夢錄
跋: 外裔淸風金裕定敬跋
印: 李昌淳印
附錄:『船遊問答』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6.15

안내정보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실함(失陷)으로 인해 죽은 15명의 부녀들이 등장하여 당시의 조정 대신이자 강화 수비의 중임(重任)을 맡은 관리들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비판하는 내용의 몽유록계 소설이다. 1권 1책의 한문 필사본(筆寫本)으로, 『황릉몽환기』의 한문본 이본(異本)인 『선유문답(船遊問答)』과 합본(合本)되어 있다. 이 『황릉몽환기』의 한문본 이본은 본서에 수록된 것이 유일하기에 그 자료적 가치가 크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미상(未詳)이다.
구성 및 내용
『강도몽유록』의 필사가 끝나고 15면부터는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기록한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선유문답』은 27면부터 52면까지 총 26면에 걸쳐 필사되어 있는데, 표제에는 ‘船遊問答’으로만 되어 있지만 내제에는 ‘船遊問答’ 아래 ‘黃陵墓夢記’란 제명이 나란히 보인다. 『해외전적문화재조사목록(海外典籍文化財調査目錄)』(韓國書誌學會, 1996)에서는 『강도몽유록』을 소개하면서 합본되어 있는 『선유문답』의 존재를 누락시키고 이 책에 이서명(異書名)과 발문(跋文)이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한편 일본 동양문고에 두 종의 『강도몽유록』 이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분류기호 VII-4-445는 다른 것이 아니라 본고에서 소개하는 버클리 대학교 소장본의 진사본(寫眞本)이다.
『강도몽유록』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실함(失陷)으로 인해 죽은 15명의 부녀들이 등장하여 당시의 조정 대신이자 강화 수비의 중임을 맡은 관리들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비판하는 내용의 몽유록계 소설이다. 이 작품은 몽유자 청허선사가 몽중인물들의 이야기를 엿듣다가 새벽녘이 되어 빠져 나오던 중 놀라 깨어나는 것으로 작품이 끝나는데, ‘입몽-몽중 세계(몽중인물들의 토론)-각몽’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강도몽유록』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적멸사(寂滅寺)에 천성이 어질고 자애로운 청허(淸虛)라는 한 선사가 살고 있었다. 국운이 불행하여 호적(胡賊)이 침입함에 백성들 태반이 적의 칼날에 원혼이 되었다. 그 중 강도(江都)의 참상은 더욱 심하였는데 백골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도 장사지내 줄 사람이 없었다. 이에 청허선사는 연미정(燕眉亭) 남쪽에 초막을 짓고 법사를 베푼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설핏 잠이 들었는데, 달밤에 소요하던 중 여러 부녀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들은 두서없이 앉아 있었는데, 어떤 이는 목에 밧줄이 매어져 있고, 어떤 이는 뼈에 시퍼런 칼이 박혀 있었으며, 또 어떤 이는 머리통이 깨어지고, 배에 물이 가득 차 있어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들 중 첫 번째 부인은 자신의 남편인 김류(金瑬)가 조정의 공론을 살피지 않고 강화 수비의 막중한 책임을 아들인 김경징(金慶徵)에게 맡겨 전쟁에 패하게 되었다며 그 인사의 잘못됨을 비판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남편 김경징이 군은(君恩)을 저버리고 군무를 게을리 하여 강도를 지켜내지 못한 것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똑같이 패배의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남편은 죽고 이민구(李敏求), 김자점(金自點), 심기원(沈器遠) 등은 군율이 행해지지 않았으니 원통하다고 말한다. 세 번째 부인은 왕후의 질녀로서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뜻밖의 전란을 만나 자신은 죽고 남편만이 홀로 세상에 남아 장님이 된 망극한 정상을 토로하였다. 네 번째 부인은 왕비의 형이요 중신의 처로, 적이 침입하기 전 강요에 의해 자결하였는데, 아들이 정문(旌門)을 세운 것은 세상 사람들이 웃고 욕할 일이라며 탄식하였다. 다섯 번째 부인은 난이 일어나자 자신은 의연히 자결하였는데 남편은 임금의 은혜를 입고도 성문을 활짝 열어 적병을 맞아들였으며, 구차히 목숨을 구하기에 급급했으니 그 죄가 진실로 중하다며 탄식하였다. 여섯 번째 부인은 시아버지가 강화유수의 중임을 맡고도 군은(君恩)을 저버린 행위를 비판하고, 천험의 요새인 강도를 잃은 것은 인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며 부끄러움을 토로했다. 일곱 번째 부인은 자신의 아들이 위급한 지경에 강도로 들어와 제 처만 구하고 자신은 죽게 내버려 둔 것을 비통해하였다. 여덟 번째 부인은 여인의 절사는 청사(靑史)에 길이 이름을 남길 만한 일이니 자신의 자결은 장쾌한 일이지만, 남편은 적의 종이 되어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했으니 한이 가슴에 맺혀 있다고 개탄하였다. 아홉 번째 부인은 갑자기 난을 당하여 홀로 강도로 피난했으나 결국 흉적의 창칼에 외로운 넋이 되었다며 비통해하였다. 열 번째 부인은 남편의 잘못된 지휘로 강도에 들어와 원통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래도 자신은 며느리, 딸과 함께 자결하여 한곳에 묻혔으니 외롭지 않으며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우는 명관(名官)의 아내로서 절사하지 않고 더러운 이름을 남겼으니 오히려 자신이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열한 번째 부인은 호적의 칼날이 목전에 이르자 자신은 투신하여 의(義)를 이뤘으니 원통할 것이 없으나, 남편은 아무런 국은(國恩)도 없이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자폭하여 죽었으니 애달프다고 말하였다. 열두 번째 부인은 선비의 아내로 환란을 당하매 정절을 지켜 자결하였는데, 남편은 자신이 혹 호지(胡地)로 끌려갔는지, 혹 도로에서 죽었는지 의심하고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열세 번째 부인은 호적이 침입하자 자결하였는데 염라왕이 그 절개를 칭찬하고, 옥제(玉帝) 또한 구부(舅父) 윤황(尹煌)을 이어 의열(義烈)을 이룸을 표창하여 천당에 올라가게 되었다며 시아버지의 덕을 칭찬하였다. 열네 번째 부인은 강도로 피난하였다가 남편이 병에 걸려 간호하던 중 적병을 만나 자결하였는데, 염라왕이 그 절개를 칭찬하여 자신은 천당에 올라가게 되었지만 부모에게는 불효한 것이고, 남편을 풍진 속에 홀로 남겨둔 것이 한스럽다고 말하였다. 열다섯 번째 여인은 자신은 기녀(妓女)로 지내다가 어느 날 정절이 중함을 깨닫고 규방에 들어가 지내던 중 난을 만나 절사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국치(國恥) 중에 충신의 절의는 찾아볼 수 없으나 부녀자들의 정절만은 늠름하게 빛났음을 오늘밤 여러 열녀(烈女)들의 옥음을 들으니 알겠다며 영광스런 죽음이거늘 어찌 그리 슬퍼하냐고 말한다.
열다섯 번째 여인의 이야기가 끝나자 자리에 있던 부녀자들이 일시에 통곡을 하였는데, 그 소리가 처절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청허선사는 뭇 부녀들이 혹 알아차릴까 두려워 숲 속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하늘이 밝기를 기다려 물러 나오던 중 홀연히 깨어보니 한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서지적 가치
현전하는 『강도몽유록』의 이본은 한문본 6종, 국문본 1종이다. 6종의 한문본 가운데 서사 전개에서 커다란 변개를 보이는 이본은 없다. 그러나 필사자의 실수로 인한 오자나 탈자 등과 같은 글자의 출입에서부터 부분적으로 표현을 달리하는 구절, 그리고 필사자의 의도적인 생략이나 첨가 등에서 보이는 의미 변화에 이르기까지 6종의 한문본은 각각이 이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문본의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①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 미국버클리 대학교 소장. 36.15. 필사. 『선유문답(船遊問答)』 합본.
② □□몽유록(□□夢遊錄)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古3636-8. 필사. 『피생명몽록(皮生冥夢錄)』 합본.
③ 몽유록(夢遊錄)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古朝56-나198. 필사. 『동국야사(東國野史)』(108장본) 소재.
④ 몽유록(夢遊錄) : 일본 동양문고 소장. VII2-97. 필사. 『江都錄』 합본.
⑤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 동국대도서관(서울) 소장. 082 강225. 필사. 『江都錄』 소재.
⑥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 동국대도서관(경주) 소장. D813.508 강25. 筆寫. 『元生夢遊錄』·『金華寺記』·『三字經』 합본.
서사 단락과 표현상의 차이 등을 살펴본 결과 6종의 한문본은 크게 세 계열로 나뉜다. 우선 ③과 ⑥은 다른 이본들과 대비해 보았을 때 표현을 달리하는 구절이 상당히 많아서 필사자가 나름의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필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여인의 언술에서는 내용상의 차이도 다소 보인다. ③과 ⑥에서는 마지막 등장인물인 기녀가 자신의 소회를 말한 뒤, 모임에 참석한 여러 부녀들을 위해 몇 곡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작품이 끝나는데, 다른 이본들은 이야기를 마친 여러 부녀들이 일제히 통곡을 하고, 청허선사는 새벽이 될 때까지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나오던 중 홀연히 깨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표현상의 차이 외에도 ③과 ⑥의 이본은 각몽 부분이 탈락되어 있어 다른 4종의 이본과는 계열을 달리 하는 이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 ④와 ⑤는 청허선사의 각몽으로 작품이 종결된다는 점에서는 ①과 ②의 이본과 같지만 이들 이본에는 몽유 공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분 내지는 이름이 본문 중에 혹은 세주(細註)의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계열로 볼 수 있겠다. 물론 ③의 경우도 인물 정보가 있긴 하지만 앞의 두 인물에 대해서만 그 이름을 명시했을 뿐인데, ④와 ⑤의 이본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인물에 대해 주(註)를 달아 놓고 있다. 또한 ④와 ⑤는 ①과 ②의 이본에는 없는 표현이 첨가되어 있거나 필사자의 의도에 의한 누락 등 표현상 차이를 보이는 구절이 비교적 많다는 점에서도 다른 계열로 볼 수 있다. 국문본은 바로 ④와 ⑤ 계열이나 이들의 모본(母本)을 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이다. 정보 제시의 형태나 내용이 거의 일치하며 정보의 출입에 있어서도 세 이본은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①과 ②는 글자의 출입이나 표현을 달리하는 구절이 다소 있지만 의미상의 차이를 보이는 정도는 아니며 다른 이본들에 비해 친연성이 높다는 점에서 동일 계열로 묶을 수 있다. 이 중 ②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오자와 탈자가 많아 선본으로 볼 수 없으며, 문맥 파악이 여의치 않는 부분도 더러 있다. 이에 반해 ①버클리 대학교 소장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 비해 오자나 탈자가 적은 선본이다. 필사자의 실수로 인한 누락이 있는 경우 다른 이본들을 참고한다면 작품의 실상을 온전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이본이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한편 버클리 대학교 소장본 『강도몽유록』에는 『황릉몽환기』의 한문본 이본인 『선유문답』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황릉몽환기』의 국문본 이본은 국내에 5종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한문본 이본은 본서에 수록된 것이 유일하기에 그 자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 『선유문답』은 조선의 두 선비 경암과 계양이 선유(船遊)하다가 한 선인(仙人)을 만나 천도(天道)와 화복(禍福)에 대한 문답을 나누고, 바람에 밀려 중국동정호(洞庭湖)와 소상강(瀟湘江) 근처에 이르러 황릉묘에서 아황과 여영, 주문왕의 비 태사, 유연의 부인 정씨 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깨어보니 한 꿈이었다는 몽유록계 소설이다. 이 작품은 장편국문소설과의 교섭, 조선 후기 몽유록의 향유층 확대에 따른 여성 독자층의 존재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이다.
부록(附錄)으로 실려 있는 『선유문답』의 이본 현황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한문본은 버클리대 소장본이 유일하고, 국문본은 다음과 같은 5종이 알려져 있다.
① 황릉묘몽유록 : 강전섭 소장. 낙장(落張). 필사. 「유한당언행록 대문문․술방문」 합본.
② 황릉몽환기 : 고려대도서관 소장. C15-A109. 낙장(落張). 필사. 「충목공신도비명(忠穆公神道碑銘)」 합본.
③ 게암겡암전 : 단국대도서관 소장. 古853.5/여635. 필사. 「여와젼 경냥진군문챵셩요열」 합본.
④ 황릉묘몽환기 : 성균관대도서관 소장. D7B-49. 필사. 「등왕각서」․「비파행」 등 합본.
⑤ 경암게암젼 : 성균관대도서관 소장. D7B-61. 필사. 「황릉묘요얼탕평전」․「자운가」 등 합본.
다양한 제명으로 유통된 국문본 이본들 중 ②와 ④의 이본이 가장 원본에 가까운 형태였을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①은 다른 이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생략과 부연이 심한 이본이며, ③과 ⑤는 오자가 많고 자구의 탈락이 빈번하여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러한 국문본에는 한문본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선유(船遊) 중 선인(仙人)과의 문답 부분이 없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국문본과 한문본의 서사 전개는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국문본과 한문본 모두 부연과 누락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어느 것이 원본의 형태였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한문본이 국문본을 바탕으로 한역(漢譯)하고 ‘선유문답(船遊問答)’ 부분을 첨가한 것인지, 국문본이 한문본의 ‘황릉묘몽기(黃陵墓夢記)’에서 파생되어 나간 것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내용적 가치
작자나 창작 시기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몽중인물들의 대화 내용을 통해 작품의 창작 연대나 창작 동기 등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640-1644년 정도에 창작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인물인 김경징 부인의 말을 살펴보면, 자신의 남편은 군율에 의해 사사(賜死)되었으나 심기원(沈器遠), 이민구(李敏求), 김자점(金自點) 등은 오히려 국록이 더해졌다며 애통해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들 역시 난의 수습 과정에서 그 공과(功過)에 따라 파직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이민구는 강도(江都) 수비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1649년에 풀려나며, 김자점 역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유배되었다가 1639년 고향에 해배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된다. 심기원은 유도대장으로서 서울의 방어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파직 당했다가 1642년 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 두 번째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인 김경징은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민구는 생명을 부지하고 있고, 김자점은 이내 유배에서 풀려나며 심기원은 파직에 그쳤으니 탄식할 만하다. 게다가 김자점, 심기원 등은 속속 정계에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644년 심기원이 역모 혐의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서술 도중 ‘총록이 깊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면 이 작품은 1644년 이전에 창작된 것이라야 한다. 이상의 사실들을 두루 고려하면 『강도몽유록』은 1640-1644년 사이에 창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강도몽유록』의 작자는 김류(金瑬), 김경징(金慶徵), 김자점(金自點), 이민구(李敏求), 심기원(沈器遠) 등 공신 세력의 인사 등용에 따른 폐단, 부패한 관료, 사적(私的) 군사력 소유, 주화론(主和論) 등이 가져온 전란의 책임을 그들의 부인, 며느리, 어머니 등의 입을 통해 묻고 있다. 즉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정절을 지킨 부녀자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목숨을 위해 도주한 강도 수비의 책임자들을 비판하고, 그들이 전란 이전 시행한 정책적 모순들이 오늘의 결과에 이르게 된 것임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작가는 이들이 반정(反正)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인륜지도와 명(明)에 대한 의리라는 것을 잊지 않고 군신의 도리, 부부의 도리, 자식의 도리를 내팽개치고, 버젓이 화의(和議)를 내세우고 있는 만행을 속속들이 고발하고 있다. 선행 연구에서 지적한 대로 이러한 작품이 나오게 된 데에는 강화도를 실함하게 한 김경징 등에 대한 난후(亂後)의 비판적인 여론이 작용을 한 것이겠지만, 여기에는 인조 때 반정 공신 세력에 대한 비공신사류(非功臣士類)의 정치적 도전이 한몫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신세력의 비정(秕政) 및 전란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인조 말년까지도 여전히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역사적 모순이 이 작품이 창작한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강도몽유록』 국문본 이본이 발견되면서 한문본과는 다른 국문본 번역자나 필사자의 향유 태도에 대한 연구가 보고된 바 있다. 국문본 필사기에 따르면 필사자는 자신의 심곡에 맺힌 설움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작품을 필사하고 있는데, 창작 당시 비등했던 비공신사류의 비판적 목소리가 후대 국문본 향유자에게는 절사(節死)한 여인들의 품열(稟烈)한 목소리로 읽히며 위안의 문학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향후 몽유록의 창작과 번역, 수용 층위 등을 연구하는 데 시사하는 바 클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김정녀, 「신 자료 국문본 『강도몽유록』의 이본적 특성과 의미」, 『고소설연구』27, 한국고소설학회, 2009.
장효현 외, 『校勘本 韓國漢文小說:夢遊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7.
정용수, 「『船遊問答』과 조선후기 사회적 담론」, 『고소설연구』25, 한국고소설학회, 2008.
지연숙, 『장편소설과 여와전』, 보고사, 2003.
집필자 : 김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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