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조선시선전집(朝鮮詩選全集)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C.0000.0000-20090715.RICH_0538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문집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총집류
· 작성주체 남방위(藍芳威, ?-?) 선집
축세록(祝世祿, ?-?) 교열
한초명(韓初命, ?-?) 교열
오지과(吳知過, ?-?) 교열
· 판종 목판본(중국)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7卷2冊 : 四周雙邊 半郭 19.5 x 12.8 cm, 有界, 8行16字, 無魚尾 ; 25.8 X 17.2 cm
· 주기사항 序: 萬曆甲辰(1604)春...吳知過更伯撰
小引: 藍芳威萬里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5241.49.4045

안내정보

남방위(藍芳威)가 편찬한 『조선시선전집(朝鮮詩選全集)』 목판본 7권 2책은 기자의 「맥수가」에서 허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 이달(李達) 등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의 한시 585수를 뽑아 명나라에서 간행된 한시 선집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선자(選者) 남방위(藍芳威)는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권수의 내용으로 볼 때 창강(昌江, 현재의 湖南省 平江縣) 사람으로 자가 만리(萬里)임을 알 수 있다. 신흠(申欽)이 원병으로 온 중국 장수의 명단을 작성한 글 「천조조사장신선후거래성명(天朝詔使將臣先後去來姓名)」(『象村集』 권39)에 따르면 남방위는 강서(江西) 요주부(饒州府) 강서현(江西縣) 사람으로 호가 운붕(雲鵬)이며, 흠차통령절병유격장군(欽差統領浙兵游擊將軍)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로 절강(浙江)의 군사 3,300인을 이끌고 1598년 정월에 나왔다가 이듬해 7월에 돌아갔다고 한다. 또 여러 역사 기록을 참고할 때 남방위는 정유재란에 참여하여 제독 유정(劉綎)과 부총병 이방춘(李芳春)이 이끄는 서로(西路)를 맡았다. 1598년 3월 서울에 도착한 후 바로 남원으로 내려가 전투를 벌였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10월에 사천에서 패주하였고 그로 인해 중국으로 소환된 듯하다. 『선조실록』에는 그의 인품을 들어 몸가짐이 청렴하고 간결하며 처사가 엄숙하고 분명하고 또 아랫사람을 잘 단속하여 피해를 끼친 일이 없었다고 높게 평가한 바 있다.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강남통지(江南通志)』에 따르면 구강(九江) 경덕진(景德鎭)에서 난리가 일어났을 때 남방위가 그 수괴였는데 토벌 당한 후 죽음을 면하고 변방에서 병졸로 수자리를 살았다고 하였다.
교열을 본 축세록(祝世祿)은 『명유학안(明儒學案)』에 수록된 학자인데 조선에 직접 온 것 같지는 않다. 자는 세공(世功),강서(江西)덕흥(德興) 사람으로 상보사경(尚寶司卿) 등의 벼슬을 지냈다. 시와 초서에 뛰어났고 저술에 『환벽재시집(環碧齋詩集)』, 『척독(尺牘)』, 『환벽재소언(環碧齋小言)』 등이 있다. 한초명(韓初命)은 신흠의 기록에 따르면 자가 강후(康侯) 호는 견우(見宇)로 산동(山東) 동래부(萊州府) 액현(掖縣) 사람이며 1579년 거인(擧人) 향시(鄕試)에 급제하였는데 1598년 8월에 관량동지(管糧同知)로 나왔다가 1600년 10월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오명제(吳明濟)가 편찬한 『조선시선(朝鮮詩選)』의 교열자로 되어 있기도 하다. 오지과(吳知過)는 서문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할 때 호가 현치도인(玄癡道人), 자가 경백(更伯)이며, 민중(閩中) 사람임을 알 수 있지만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구성 및 내용
『조선시선전집』은 건곤(乾坤)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부터 4권까지가 ‘건’으로 묶여 있고, 5권부터 8권까지가 ‘곤’으로 묶여 있다. 이의현(李宜顯)은 『도협총설(陶峽叢說)』에서 “남방위라는 자가 있어 대사마를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의 시를 채집하여 6편으로 묶고 그 이름을 조선시선전집이라 하였다. 기자의 「맥수가」에서부터 허초희의 시에 이르기까지 600수로 되어 있다.(有藍芳威者, 隨大司馬東來, 採東詩, 裒成六編, 名曰朝鮮詩選全集. 起自箕子麥秀歌, 止於景樊詩凡六百首)”라 하였다. 7권과 8권은 순수한 선집(選集)이 아니라 허난설헌 등 몇 사람의 시를 모아 놓은 것인데, 이의현이 본 책은 이를 뺀 6권인 듯하다. 6권까지에는 「맥수가(麥秀歌)」에서 허난설헌의 시까지 수록되고 있다. 분권 표시가 따로 없고 7권까지는 판심의 상단에 권수를, 하단에 면수를 적어 놓았는데 마지막 권의 판심에는 권수가 적혀 있지 않고 흑구로 되어 있다.
권두에 오지과가 지은 「남장군선각조선시서(藍將軍選刻朝鮮詩序)」, 남방위가 지은 「선각조선시소인(選刻朝鮮詩小引)」이 실려 있다. 「남장군선각조선시서」는 행서로 되어 있다. 끝에 ‘현치인(玄癡印)’과 ‘오지과인(吳知過印)’이라 새긴 두 과의 도장이 함께 찍혀 있다. 「선각조선시소인」은 남방위의 서문인데 끝에 ‘남방위만리지(藍芳威萬里識)’라 되어 있고 ‘남방위인(藍芳威印)’ 외에 한 과의 도장이 더 있지만 일부가 훼손되어 있어 판독이 어렵다. 이들 서문에는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근거하여 조선이 고구려를 계승한 강대한 오랑캐의 나라로, 중화의 교화를 입어 문물이 성행하였다는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조선시선전집』의 편찬과 관련한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다.
1권부터 8권까지의 본문에는 585수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1권에 사언시 3수 및 오언고시 65수, 2권에 칠언고시 42수, 3권에 오언율시 83수 및 오언배율 3수, 4권에 칠언율시 84수, 5권에 오언절구 49수가 실려 있다. 일반적인 시선집은 이것으로 끝이 나고 7권과 8권에는 『조선시선전집』의 한시를 선발해준 조선의 시인과 유관한 인물들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7권에 56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허균(許筠), 양형우(梁亨遇) 등의 시 10여 수를 제외하면 모두 허난설헌의 것이며, 8권에 실려 있는 74수의 한시는 역시 허난설헌의 것이다. 시선집 자체는 6권에서 끝이 나고 7권과 8권에서는 이 책의 편찬자와 관련한 인물의 시를 모아놓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조선시선전집』은 그 내용에 문제가 많다. 작가가 잘못 표기된 예가 매우 많으며, 인명과 작품명에도 오자가 많다. 예를 들어 김종직(金宗直)의 「불국사(佛國寺)」가 「불도사(佛圖寺)」로 되어 있으며, 이숭인(李崇仁)의 「차임천루제운(次林川樓題韻)」이 김정(金淨)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또 임억령(林億齡)의 오언율시 「봉의기촌경운앙희근정(奉依企村瓊韻仰希斤正)」 제목을 아예 「절구(絶句)」라고 바꾸고, 수련과 함련만 절취하였다. 조선에서 취득한 자료를 옳게 정리하지 못한 채 간행하였기에 이러한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의 한시에 관심을 가진 중국 문인이 조선 문인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시를 수집하고 중국에 돌아가 조선의 한시 선집을 간행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다. 오명제(吳明濟)의 『조선시선(朝鮮詩選)』이 그중 가장 빠른 책이며, 지금 전하지는 않지만 초횡(焦竑)의 『조선시선(朝鮮詩選)』과 왕세종(汪世鐘)의 『조선시(朝鮮詩)』 등도 기록에 보인다. 『조선시선전집』은 이러한 중국인에 의하여 간행된 조선 한시 선집 중 그 양이 가장 방대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특히 허균, 이달(李達), 허난설헌 등의 한시 중에 문집에 실리지 않은 시가 상당수에 달하며, 문집이나 다른 자료에 실려 있는 작품 중에도 원문과 크게 다른 예가 많다. 한 예로 어무적(魚無跡)의 「유민탄(流民歎)」은 『국조시산(國朝詩刪)』 등에 실려 있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조선시선전집』은 오명제의 『조선시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명제의 『조선시선』보다 『조선시선전집』에 수록된 한시가 훨씬 많지만 지금 전하는 오명제의 『조선시선』이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윤국형(尹國馨)의 『갑진만록(甲辰漫錄)』, 홍만종(洪萬宗)의 『시평보유(詩評補遺)』 등에서 『조선시선』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 시들이 현전하는 『조선시선』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곧 북경도서관에 소장된 『조선시선』은 후대에 축약하여 간행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선전집』 역시 축약본이 북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북경도서관본은 권을 나누지 않고 시체별로 시를 수록하였고 마지막에 ‘연구(聯句)’라는 이름 아래 7개의 편구(片句)가 제시되어 있다. 북경도서관본은 『조선시선전집』보다 수록한 작품의 양이 훨씬 적을 뿐만 아니라, 작가명과 작품명에 오류가 매우 많다.
그런데 오명제의 『조선시선』에도 작자명과 작품명의 오류가 많은데 『조선시선전집』과 오류의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김종직의 「우식곡(憂息曲)」이 『조선시선전집』과 『조선시선』에 모두 작자를 눌지왕(納祗王)으로 적고 제목도 「우사곡(憂思曲)」으로 되어 있으며, 서문이 함께 실려 있는데 원래의 글을 축약한 것으로 그 내용이 완전히 일치한다. 또 남방위의 『조선시선전집』에는 7권의 뒷부분에 81수의 「유선곡」을 얻었다고 한 주석이 있는데 동일한 주석이 북경도서관본 『조선시선』에 실려 있지만, 허난설헌의 시는 27수밖에 실려 있지 않다. 이덕무(李德懋)가 『청비록(淸脾錄)』에서 “남방위가 유격장군으로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왔다가 『조선시선』을 편찬하였다. 이는 오명제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편찬한 것인데 무슨 연고인지 알 수 없지만 남방위의 것이 되었다. 대개 오류가 많아서 선본이 아니다.”라고도 한 바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남방위의 『조선시선전집』은 오명제의 『조선시선』을 거의 전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朴現圭, 『중국 명말 청초인 조선시선집 연구』, 태학사, 1998.
이종묵, 「버클리대학본 남방위의 『조선시선전집』에 대하여」, 『문헌과해석』 39, 문헌과해석사, 2007.
집필자 : 이종묵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