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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실유고(玄同室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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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문집 |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집부-별집류
· 작성주체 정동유(鄭東愈, 1744-1808)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2卷2冊 : 四周雙邊 半郭 21.2 x 15.7 cm, 有界, 10行20字, 上2葉花紋魚尾 ; 31.6 X 20.7 cm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9.101b

안내정보

현동(玄同) 정동유(鄭東愈)(1744-1808)의 시문집(詩文集)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정동유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여(愉如), 호는 현동실(玄同室)이다. 정동유의 집안은 정광필(鄭光弼), 정유길(鄭惟吉), 정창연(鄭昌衍), 정태화(鄭太和)로 이어지는 명가로, 회동(檜洞)에 대대로 세거하여 거듭 고관대작을 내었기에 회동정씨라 일컬어진다. 정태화의 맏아들 정대재(鄭載岱)의 후손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정대재는 정덕선(鄭德先), 정욱선(鄭勖先), 정각선(鄭覺先), 정혁선(鄭赫先) 네 아들을 두었다. 정동유는 정욱선의 손자이다. 정욱선의 장남 정석명(鄭錫命)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일찍 죽었기 때문에, 차남 정석경(鄭錫慶)의 아들 정원순(鄭元淳)을 후사로 삼았는데, 곧 정동유의 부친이다. 정석경의 장인이 소론의 명가 서종태(徐宗泰)이다.
정동유는 어려서 이광려(李匡呂)와 중부인 정경순(鄭景淳)으로부터 학문을 익혔고 조사명(趙祉命)의 사위가 되면서 그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이만수(李晩秀)의 계부(季父) 이학원(李學源)과 형제처럼 지냈다. 이광사(李匡師) 집안과 세교가 있어 이광사의 아들 이충익(李忠翊)과 특히 절친하여 시를 주고받은 것이 많다. 이문익(李文翊), 이영익(李令翊), 이천익(李天翊), 이영익(李榮翊), 이면백(李勉伯), 신대우(申大羽), 이학원, 이만수와도 교분이 깊었다.
정동유는 1777년 34세의 늦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사옹원봉사(司甕院奉事) 등을 차례로 지냈다. 공조(工曹)와 호조(戶曹)의 좌랑(佐郞)을 역임한 후 의흥현감(義興縣監)으로 나갔다. 부친의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바로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로 복귀하였다. 1782년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는데 바로 모친의 상을 당하여 잠시 벼슬을 쉬었다가 탈상한 후 1784년익위사위솔(翊衛司衛率)로 문효세자(文孝世子)를 모셨다. 1785년익산군수(益山郡守)가 되었는데 5년 동안 공정한 정사로 칭송을 받았다. 담양군수(潭陽府使)로 옮겼을 때에도 제방을 보수하여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이듬 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791년선혜청낭청(宣惠廳郞廳)을 지냈고 이듬해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감동하여 부처라 불렀다고 하지만 오히려 1796년호서암행어사(湖西暗行御史)정만석(鄭晩錫)으로부터 정무를 잘못 처리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은 바 있다. 1806년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를 지냈으며, 1808년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지만 곧바로 1월 20일 본가에서 세상을 떴다. 원래 이 집안의 선영이 사당동에 있었기에 먼저 간 부인 조씨(趙氏)의 묘도 사당동에 있었는데 나중에 진천(鎭川)의 장양리(長楊里)로 옮겨 합장하였다.
정인보(鄭寅普)는 정동유가 이충익과 함께 정음학(正音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유희(柳僖)에게 전하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문집 『현동실유고(玄同室遺稿)』와 함께 『한고동(閒古董)』이 버클리대학교에 소장되어 있고 국내에는 『주영편(晝永編)』만 몇 종이 전한다.
구성 및 내용
건(乾), 곤(坤) 2책으로 되어 있는데 건책에는 시가 실려 있고 곤책에는 산문이 실려 있다. 곤책에는 권두에 목록이 실려 있지만 건책에는 목록이 실려 있지 않다. 건책에는 118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연작시가 많아 전체 작품 수는 이를 훨씬 상회한다. 정동유의 시는 대부분 집안의 어른이나 형제, 그밖에 정지검(鄭志儉), 정동원(鄭東元), 정대용(鄭大容) 등 집안사람이나 박지원(朴知源), 이천익(李天翊), 이영익(李令翊), 신대우(申大羽) 등의 벗들과 어울려 지은 일상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이만수는 묘지명에서 “시문은 자주 짓지 않았지만 맑고 참되며 우아하여 절대 남의 것을 모방하거나 틀에 맞추는 모습이 없었다.”라 평가한 바 있다. 그의 시는 대체로 이 시기 문인의 일반적인 한시의 특징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사(詞)를 다수 짓기도 하고 이 시기 새롭게 부각된 육언절구(六言絶句)도 지었다. 정동유의 한시는 수식을 억제하고 사실을 적시하는 주지적(主知的)인 계열의 것이 특히 높게 평가할 만하다. 또 정동유는 인명체(人名體), 팔음체(八音詩), 약명시(藥名詩), 건제시(建除詩), 괘명시(卦名詩), 십이신체(十二辰體), 이십팔수시(二十八宿詩), 은명체(隱名體), 자일지십체(自一至十體), 옥련환체(玉連環體), 회문시(回文詩), 집구시(集句詩) 등 다양한 잡체시(雜體詩)를 제작하였고, 생활 주변의 식물이나 기물을 소재로 한 연작시를 제작한 것도 그의 시세계의 한 특징으로 들 수 있다.
『현동실유고』의 곤책에는 ‘문(文)’이라는 항목 아래 15편의 산문이, ‘속편(續編)’의 항목 아래 14편의 글이 더 실려 있다. 그의 산문은 일반 문집처럼 서(序), 발(跋), 기(記), 설(說), 제후(題後), 묘지명(墓誌銘), 잠(箴), 명(銘) 등 다양한 문체의 글이 실려 있지만, 가장 큰 특징은 사실을 변증하는 글이 많다는 점이다.
그런데 『현동실유고』에는 『주영편』에 실려 있는 내용과 같거나 비슷한 것이 제법 있다. 정삭(正朔)에 대한 학설을 두루 검토하고 인(寅)을 건월(建月)로 삼는 것이 옳음을 변증한 「정삭변(正朔辨)」, 박성원(朴聖源)이 우리나라 제현(諸賢)의 각종 예법에 대한 글을 모아 편찬한 책인 『예의류집(禮疑類輯)』의 문제점을 따진 「논예의유집(論禮疑類輯)」, 서유방(徐有防)이 편찬한 『송도지속편(松都志續編)』을 읽고 그 오류에 대해 기록한 「제송도지속편후(題松都誌續編後)」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와 함께 이수광(李睟光)이 『지봉유설(芝峯類說)』의 내용에 대해 변증한 25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는 「서지봉유설(書芝峯類說)」은 그 중 13편이 『주영편』에 다시 실려 있다. 『주영편』에 보이지 않는 글로는 왕세정(王世貞)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은하수, 달 속에 보이는 검은 그림자, 달에 산다는 두꺼비 등 12편이 있다.
「서지봉유설」이라는 제목 아래 이어지는 글이 7편이 더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봉유설』에 보이지 않는 글이다. 목차에는 「서지봉유설」이 25편이라 하였는데, 이 7편은 25편에 포함되지 않는 글이기도 하다. 『현동실유고』 편집 과정에서 「차기(箚記)」에 해당하는 내용이 잘못 끼어든 것으로 보인다. 문천상(文天祥)의 16대손 문가상(文可尙)에 대한 일화, 『후한서(後漢書)』에서 명제(明帝)가 벽옹(辟雍)에 행행할 때 나오는 오경(五更)의 의미에 대한 변증, 『예기(禮記)』에 천자나 제후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봄, 가을, 겨울 에 세 번 사냥을 한다는 삼전(三田)의 설에 대한 변증, 오행생극(五行生克)의 설에 대한 변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차기」는 상하로 나누어 11조목에 걸쳐 제도, 학설, 용어 등에 대한 고증을 실은 글이다.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뜻으로 쓰이는 장송(張松), 충신은 효자의 문중에서 구한다(求忠臣必於孝子之門)는 말의 유래, 『예기』에 나오는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의 욕구이다(感於物而動, 性之欲也)”에서 ‘성지욕(性之欲)’에 대한 변증, 「금곡서(金谷序)」에 대한 변증 등이 볼 만하다. 또 도소주(屠蘇酒)에 대한 글도 실려 있는데 『주영편』에도 실려 있다.
그밖에 「집안에서 예전에 들은 일(家中舊聞)」은 “들은 것이 실제가 아니면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행실이라도 거짓으로 적지는 않는다.”는 주석이 달려 있는데 정태화와 증조모에 대한 일화를 기록하였다. 「잡록(雜錄)」은 박사수(朴師洙)와 임정(林珽), 강윤(姜潤), 김재기(金在己), 공지문(孔志文), 이종성(李宗城), 윤태국(尹泰國), 홍재(洪榟)와 홍억(洪檍), 조윤대(趙允大), 박인영(朴仁榮), 이심원(李心源) 등의 일화를 10조목에 걸쳐 기술하였다. 「남원 박지원 행록(朴南原知源行錄)」은 박지원(朴知源)과 관련한 일화를 5조목과 하윤원(河允源)에 대한 일화 1조목을 수록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자음왕복서(字音往復書)」이다. 이 글은 30조목에 걸쳐 성운학(聲韻學)에 대한 왕복서한을 기록한 것인데, 부전지에 “여윤성주광수왕복(與尹星州光垂往復)”이라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성주목사로 있던 윤광수(尹光垂)와 토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윤광수가 훈민정음에 대한 책을 편찬하였는데 이에 대한 왕복의 토론서한이다. 윤광심의 편지도 함께 실었다. 정인보가 「서주영편후(書晝永篇後)」(『薝園文錄』)에서 정음(正音)을 따진 남에게 준 선생의 편지를 찾아내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글을 가리킨다.
「역수설(易數說)」도 주목되는데 공영달(孔穎達), 정강성(鄭康成), 왕필(王弼), 모기령(毛奇齡) 등 다양한 학자의 상수학(象數學)에 대한 설을 변증하고 다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괘(卦)와 연결시킨 도설(圖說)을 붙인 글이다. 이만수가 묘지명에서 “더욱 역학(易學)에 깊어 일찍이 대연괘륵(大衍掛扐)의 수에 대해 말하였는데 독창적인 견해가 있었다.”라고 한 것이 이 글을 가리키는 듯하다. 『현동실유고』에는 「역영서(易影序)」가 수록되어 있는데 『주역』의 복서(卜筮)와 관련한 내용을 초록한 책인 『역영(易影)』에 서문을 쓰면서 점술로서의 역학을 비판하면서 역수(易數)의 원리에 대해 자세하게 따진 바 있다.
이 외에 주목할 만한 글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익산의 상원사 중창 모연문(益山上院寺重修募緣文)」은 익산의 용화산(龍華山)에 있는 상원사 중창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하여 쓴 글이다. 익산군수로 있을 때 이 글을 지은 것으로 추정되므로 불교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인 생각을 가졌음을 알게 한다. 「맥수가변(麥秀歌辨)」은 기자(箕子)의 「맥수가(麥秀歌)」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아 위작임을 논변한 글이다. 「괴석에 대한 기(怪石記)」는 자신의 집에 소장하고 있던 관북 지역에서 실어온 괴석을 두고 쓴 글로, 기름진 생선과 육류를 좋아하고 달콤한 엿을 즐겨 먹으며 옷을 유행에 맞추어 입고 화려한 꽃을 정원에 두고 감상하였으며 품위 있는 그림을 걸어놓고 보았고 음악도 좋아하여 즐겨 들었다는 정동유의 취향을 적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그밖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벼루에 붙인 「연명(硯銘)」, 잘못을 바로 고쳐나갈 뜻을 밝힌 「구회잠(懼悔箴)」, 부족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지족의 뜻이라 풀이한 「지족설(知足說)」, 조선 초기의 학자 심은(深隱)이수(李隨)의 실기에 붙인 발문 「이문정실기발(李文靖實記跋)」, 당질 정기용(鄭耆容)의 묘지명 「종질학생묘지명(從姪學生墓誌銘)」, 정동유의 종형제인 정동기(鄭東驥)의 부인이자 서휘선(徐徽善)의 딸에 대한 묘지 「종수숙인서씨묘지(從嫂淑人徐氏墓誌)」, 정동유의 종제 정동규(鄭東圭)의 묘지명, 「종제학생묘지명(從弟學生墓誌銘)」, 정기일(鄭基一)의 처이며 진사 이채진(李寀鎭)의 딸 덕수이씨(德水李氏)의 묘지명 「손부유인이씨묘지명(孫婦孺人李氏墓誌)」, 신계현감(新溪縣監)으로 있던 같은 집안의 아우 정동원(鄭東元)이 부탁에 의하여 신계현에 있던 청심정(淸心亭) 중건의 과정을 적은 「청심정중건기(淸心亭重建記)」, 자신이 거처하던 만호암(萬好菴)에 붙인 기문 「만호암기(萬好菴記)」, 김육(金堉)이 편찬한 『종덕신편(種德新編)』에다 1781년 쓴 「제종덕신편후(題種德新編後)」, 이동명(李東溟)의 『연행일기(燕行日記)』를 초록하고 1796년에 지은 발문 「제이서장일기초후(題李書狀日記抄後)」, 1798년위응물(韋應物)의 시집을 필사한 『주영첩(晝永帖)』 뒤에 쓴 「제주영첩후(題晝永帖後)」등도 수록되어 있다.
서지적 가치
정동유의 문집은 국내에 다른 이본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유일본이라 할 수 있다. 그간 정동유의 문학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자료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적 가치
정동유의 문집,『현동실유고』에 실린 글 중 상당수가 『주영편』에 다시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주영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또 「자음왕복서」는 최세진(崔世珍), 최석정(崔錫鼎), 신경준(申景濬), 남극관(南克寬), 이광사(李匡師), 홍양호(洪良浩), 황윤석(黃胤錫), 유희(柳僖) 등으로 이어지는 국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이해하는 데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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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묵, 「정극순의 연뇌유고」, 『문헌과해석』 통권 36호, 2006
김동준, 「18세기 소론계 학통의 다각적 조명 ; 소론계 학자들의 자국어문 연구활동과 양상」,『민족문학사학회』35호, 2007
조성산, 「조선후기 소론계의 東音인식과 訓民正音 연구」, 『한국사학보』36, 2009
이종묵, 「鄭東愈와 그 一門의 저술」, 『진단학보』 110호, 2010
집필자 : 이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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