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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록(正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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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C.0000.0000-20090728.RICH_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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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개인-전기 | 사부-전기류
· 작성주체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고용후(高用厚, 1577-?) 편
· 판종 목판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四周單邊 半郭 19.3 x 15.8 cm, 有界, 10行18字,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30.2 X 20.0 cm
· 주기사항 序: 萬曆紀元之己亥(1599)十月日...海平府君兼知經筵事尹根壽敍
序: 萬曆紀元辛丑(1601)冬資憲大夫禮曺判書...延安李廷龜敬書
序: 萬曆紀元癸卯(1603)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李德馨書
序: 乙巳(1605)孟春鰲城府院君李桓福謹書
序: 萬曆壬子(1612)冬十一月下澣晉原府院君柳根書
跋: 歲崇禎紀元之庚午(1630)冬十二月下澣男用厚謹書于北京之玉河館
跋: 崇禎紀元戊午(1678)初夏安東金壽恒謹書于郎州之纍居坎亨窩
跋: 時辛巳(1641)元月之下澣平山申翊聖謹識
跋: 歲庚申(1740)九月上遊曹命敎謹識
跋: 歲萬曆紀元後戊辰(1748)仲秋外裔錦城林聖憲謹識
跋: 曹顯命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487.0248

안내정보

『정기록(正氣錄)』은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막내아들인 고용후(高用厚)(1577-?)가 1599년(선조 32)에 부친의 임진년 때 사적과 부친과 함께 전사한 두 형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의 유적을 기록한 일종의 충절록(忠節錄)이다. 내용은 도내에 보낸 격서와 통문, 의병장들과의 서한, 신도비명·제문·시장 등이 실려 있으며, 윤근수(尹根壽)·이정구(李廷龜)·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김수항(金壽恒)·신익성(申翊聖)·손원화(孫元化) 등 당대 우리나라와 중국의 명현들이 지은 서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는 임진왜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어떻게 징병하고 운영했으며, 또한 급변하는 전쟁의 상황에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했는가를 비교적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편자의 부친 고경명의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558년(명종 13)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3년 교리에 있을 때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곧 파직되었다. 1581년(선조 14)에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이후 서산군수·한성부서윤·한성군수·순창군수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仁厚)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는데, 결국 금산에서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무등산 기행문인 『서석록(瑞石錄)』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각 지방에 보낸 격서·통문·서한 등이 본 자료인 『정기록』에 실려 있다.
편자인 고용후의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이다. 1605년(선조3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남원부사가 되었으며, 1624년(인조 2) 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 1631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판결사(判決事)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청사집(晴沙集)』, 편서로는 본 자료인 『정기록』이 있다.
구성 및 내용
『정기록』은 서문 5편, 발문 11편, 그리고 격서(檄書) 7편, 통문(通文) 3편, 편지 2편, 제문(祭文) 1편, 신도비명(神道碑銘) 1편, 시장(諡狀)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서문과 발문을 수록된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윤근수(尹根壽)[1599년], 이정구(李廷龜)[1601년], 이덕형(李德馨)[1603년], 이항복(李恒福)[1605년], 유근(柳根)[1612년] 등이 작성한 서문이 있고, 정경세(鄭經世)[1594년], 신흠(申欽)[1605년], 박승종(朴承宗)[1609년], 윤훤(尹暄)[1617년], 손원화(孫元化)[1631년], 고용후(高用厚)[1630년], 김수항(金壽恒)[1678년], 신익성(申翊聖)[1641년], 조명교(曹命敎)[1740년], 임성헌(林聖憲)[1748년], 조현명(趙顯命)[1744년] 등이 작성한 발문이 있다. 서발문의 작성자만 보더라도 당대 우리나라와 중국의 명현들이 빠짐없이 나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서에 수록된 격문, 통문, 편지 등의 글은 고경명과 고종후가 작성한 것들인데, 고경명의 것을 먼저 수록한 다음 고종후의 것을 이어서 실었다. 참고로 고종후의 글은 “복수문(復讐文)”이라는 큰 항목 아래 배열하여 고경명의 글과 구분하였다. 격문은 다음과 같다. 「격도내서(檄道內書)」는 2편이 있는데, 1편은 고경명이 발송한 격문이고 다른 1편은 고종후가 발송한 격문이다. 둘 다 1592년에 작성된 것으로, 전라도 도내의 여러 고을의 인사들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고 있다. 「격제주서(檄濟州書)」도 2편이 있는데, 1편은 고경명이 제주절제사에게 통고한 것으로 제주도의 명마를 시급히 육지로 우송해 줄 것을 촉구하고 있으며, 다른 1편은 고종후가 부친에 이어 또 다시 명마를 지원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격제도서(檄諸道書)」는 고경명이 각 도의 수재(守宰) 및 병졸들에게 통고한 것으로, 역시 의병을 규합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칠 것을 충고하고 있다. 「격전라순찰사서(檄全羅巡察使書)」는 고경명이 전라도순찰사에 고한 것으로, 호남 지방에서 군사를 널리 모집하여 요충지를 방어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재격도내서(再檄道內書)」는 고종후가 다시 한 번 의병청(義兵聽) 소속 사람들에게 통고한 것으로, 내용은 앞서의 「격도내서」와 대동소이하다.
통문은 다음과 같다. 「통제도문(通諸道文)」은 고경명이 당시 전라도 의병대장 유팽로(柳彭老) 등과 함께 작성한 것으로, 각 도의 수령 및 향교의 유사에 통고한 것이다. 그 내용은 순국의 뜻을 분발하여 군량미를 보조해 주기를 촉구하고 있다. 「통제사승도문(通諸寺僧徒文)」은 고종후가 작성한 것으로, 도내의 여려 사찰의 승도에게 통고하여 참전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통제주삼가문(通濟州三家文)」은 고종후가 작성한 것으로, 제주도의 고씨(高氏), 양씨(梁氏), 문씨(文氏) 집안의 장로에게 전쟁에 사용할 명마를 보조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편지는 다음과 같다. 「여재상서(與宰相書)」는 고경명이 당시 순찰사였던 이광(李洸)에 보낸 서한으로, 이광이 도내에서 봉기한 의병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회유하고자 보낸 것이다. 「답이적서(答李適書)」는 고종후가 이적(李適)에게 보낸 서한으로, 우선 부친과 동생의 장사를 마치고서 다시 의병에 참가하기를 기약하고 있다.
부록에는 제문, 신도비명, 시장 등이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우선, 제문에는 국왕 및 왕세자가 고경명에게 내린 사제문(賜祭文) 4편과 고종후에게 내린 사제문 1편이 있다. 신도비명은 윤근수(尹根壽)가 고경명을 위해 찬한 것이고, 시장은 고종후를 위해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효열공시장(孝烈公諡狀)」과 고인후를 위해 조헌(趙憲)이 지은 「의열공시장(毅烈公謚狀)」이 있다.
서지적 가치
『정기록』은 고경명의 막내아들인 고용후가 부친의 문집에 간행에 앞서 편찬한 것이다. 1605년 이항복의 서문까지 수록된 간행본이 성암고서박물관[성암2-201]에 소장되어 있고, 1617년 윤훤의 발문까지 수록된 간행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B12-A14]과 국립중앙도서관[BC古朝57-가11]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로 발문, 시장, 편지 등이 추가되어 계속 간행되었는데, 본서는 그 중에서 1748년 임성헌의 발문까지 포함하고 있다. 본서와 비슷한 시기에 간행되었다고 추측되는 자료는 현재 규장각[奎4170]에 소장되어 있는데, 다만 수록된 내용에 조금 차이가 보인다. 예컨대, 규장각 소장본에는 고경명이 작성한 「답도순찰사서(答都巡察使書)」, 「여최담양우서(與崔潭陽遇書)」, 「격해남강진양사군서(檄海南康津兩使君書)」 등과 고종후가 작성한 「답백진사진남서(答白進士振南書)」가 더 추가되어 있다. 그 이후에도 고경명을 위해 원경하(元景夏)가 지은 「충렬공묘표문(忠烈公墓表文)」, 김수항이 지은 「충렬공시장(忠烈公諡狀)」, 고인후를 위해 이정보(李鼎輔)가 지은 「의렬공묘갈명(毅烈公墓碣銘)」, 조헌(趙憲)의 「중봉장계별지(重峰狀啓別紙)」, 정철(鄭澈)의 「송강정공서(松江鄭公書)」 등이 추가되어 계속 간행되었다.
이처럼 『정기록』은 임진왜란 직후 17세기 초반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간행되었는데, 본서는 그 중에서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것이다. 본서와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자료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지만 수록된 글들이 편차가 보이고, 본서와 동일한 체재와 글을 수록하고 있는 자료는 현재 국내에 발견되지 않는다.
내용적 가치
『정기록』은 조선 중기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친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인 고종후와 고인후가 임진왜란의 의병으로서 전사한 사적을 기리기 위해 편찬된 일종의 충절록(忠節錄)이다. 수록된 글들은 고경명 부자가 임진왜란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주변의 각 도·읍 관리와 선비들에게 의병을 일으켜 목숨 바쳐 나라를 구제하기를 촉구한 것들이다. 각 도·읍에 보낸 창의격문(倡義檄文)과 창의통문(倡義通文)을 위시하여 전라도순찰사에게 본분을 자각하라고 일침을 가한 서한, 제주도 삼씨(三氏)의 장로에게 전쟁에 사용할 명마를 조속히 조달해 주기를 구한 서한, 심지어 각 도의 사찰 승려들에게 의병으로서 참전하기를 권유하는 글까지 망라하고 있다. 고경명 부자가 창의(倡義)한 여러 글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어떻게 징병하고 운영했으며, 또한 급변하는 전쟁의 상황에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했는가를 비교적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한편, 본서에는 당대를 포함하여 이후시기에 문명을 떨쳤던 여러 문장가들의 서발문이 특기할 정도로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전례를 찾기 드물다 하겠다. 윤근수·이정구·이항복·김수항·신익성·신흠 등은 물론, 심지어 명나라 사람인 손원화의 글까지 보인다. 이는 조선 시대 명망 있는 문인이었던 고경명 부자가 의병으로 전화(戰火)를 극복하고자 했던 충의정신(忠義精神)을 높이 찬양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본서가 조선 후기까지 계속하여 간행된 사실은 각 시대의 지식인 계급들이 이 충절록을 통해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충절과 애국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역 제봉전서 상·중·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집필자 : 권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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