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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초초(經山初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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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C.0000.0000-20130518.TOYO_0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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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문집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별집류
· 작성주체 정원용(鄭元容, 1783-1873)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고종조말엽]
· 형태사항 不分卷1冊(31張) : 四周雙邊 半郭 21.8 x 15.3 cm, 10行20字 註雙行 ; 28.1 X 20.0 cm
· 주기사항 書名: 舊藏者의 識語에 의해 補記함
表題: 雜考
識語: 昭和丁卯(1927)在山樓主人識
印: 在山樓蒐書之一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4-361

안내정보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1810년(순조 10) 10월부터 1811년 4월 8일까지 지은 시(詩) 46수와 문(文) 26편을 편집한 미정초고본(未定草稿本)으로 불분권(不分卷) 1책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저자 정원용은 1783년(정조 7)에 돈녕부 도정 정동만(鄭東晩, 1753-1822)과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 1723-1789)의 딸인 용인 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이다. 20세인 1802년(순조 2)에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을 시작했으며, 37세 되던 1819년(순조 19) 대사성과 대사간에 임명될 때까지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규장각 등의 청직을 두루 거쳤다. 이후 영변부사, 전라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회령부사, 수원유수, 평안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의 외직과 승지,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59세 되던 1841년(헌종 7)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며, 1842년(헌종 8)에 좌의정을 거쳐 1848년(헌종 14)부터 1868년(고종 5)에 마지막으로 영의정에 임명될 때까지 20년의 대부분을 영의정으로 지냈다.
그는 90년 동안 기록한 일기 제목을 『경산종환일록(經山從宦日錄)』이라고도 표기할 정도로 벼슬과 관련된 기록을 철저히 정리한 문인인데, 그의 저술은 성격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는 벼슬이 바뀔 때마다 그 동안 지은 글들을 모아서 문집 초고를 편집하고 벼슬과 관련된 제목을 붙였다. 문집류로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국학자료실에 『약산록(藥山錄)』(1819-1822), 『경산북정록(經山北征錄)』(1829-1830), 『기성록(箕城錄)』(1833-1835) 등의 초고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경산집초초(經山集初草)』도 문집 초고에 해당된다.
공문류(公文類)로는 1833년(순조 33) 11월부터 1835년 7월까지 평안도관찰사 재직시에 평안도감영에서 하급 관청으로 내려보낸 공문 30편을 편집한 『관첩록(關牒錄)』 1책, 역시 같은 시기에 평안도감영에서 상하급 관아로 오고간 공문을 편집한 『서첩록(西牒錄)』 3책, 1831년 4월부터 1832년 10월까지 형조판서로 재임하면서 전국의 살인사건 31건을 처리한 『유경록(惟輕錄)』 1책과 1833년 11월부터 1835년 7월까지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살인사건 185건을 처리한 『유경록』 5책, 1840년 3월부터 1841년 4월까지 함경도관찰사 재임시에 감영에 오고간 공문을 편집한 『북첩록(北牒錄)』 4책(전5책)이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국학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총서류(叢書類)로는 중국 문헌에서 참고가 될 만한 기록을 뽑아 편집한 『총진편금(叢珍片金)』 1책(전3책), 조정의 전장(典章)이나 의칙(儀則), 사가(私家)의 덕행, 선배들의 문장과 의론을 편집한 『수향편(袖香編)』 3책이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국학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일기류(日記類)로는 1807년 4월부터 5월까지 열성(列聖) 실록을 포쇄하고 정조의 지장(誌狀)을 봉안하기 위해 오대산을 다녀오면서 기록한 『쇄사동정일기(曬史東征日記)』 1책, 1831년 10월부터 1832년 3월까지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북경을 다녀오면서 기록한 『연사록(燕槎錄)』 2책, 90년 한평생을 기록한 『경산일록(經山日錄)』 17책이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국학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 및 내용
『경산집초초(經山集初草)』는 정원용이 경오년(1810) 10월부터 신미년(1811) 4월까지 영유현에 머물며 지은 글들을 모은 문집 초고이다. 정원용의 다른 시기 문집 초고들과 달리 제목에 약산(藥山, 영변)이나 북정(北征, 회령), 기성(箕城, 평양) 등의 고을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자신이 벼슬한 시기가 아니라 영유현령으로 부임해 있는 아버지 정동만을 모시기 위해 휴가를 얻은 기간에 지은 글들을 편집한 초고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수집한 마에다 교사쿠(前間恭作)는 『경산집초초』 의 내용을 5권으로 분류하여 목록을 만들었는데, 제1권에는 서(序) 3편, 기(記) 4편, 독(讀) 2편, 서(書) 2편, 제2권에는 전문(箋文) 6편, 제3권에는 시 46수, 제4권에는 기우제축문(祈雨祭祝文) 7편, 제5편에는 기(記) 1편이 실려 있다. 이러한 순서는 활자본 『경산집(經山集)』과 다르다. 활자본 『경산집』의 목록은 賦(권1), 詩(권1-4), 疏箚(권5-8), 奏·啓(권9), 議·狀(권10), 應製文·箋文·上樑文(권11), 書·序·記·跋(권12), 祭文·雜著(권13), 神道碑(권14-5), 墓碣·墓表(권16), 誌銘(권17), 家狀·行狀(권18), 諡狀(권19-20)의 순서로 편집되었다. 이 초고를 필사한 사람은 표지에 표제(表題)를 ‘잡고(雜考)’라 쓰고 “附 祈雨祭文, 箋文”이라 썼는데, 정원용의 문집에서 이 글들은 부록이 아니다. 정원용은 70년 동안 벼슬하면서 왕실이나 국가와 관련되는 글을 많이 지었으며, 벼슬이 바뀔 때마다 문집 초고를 편집하며 그런 글들을 모두 실었다. 따라서 활자본 『경산집』에도 시(詩, 권1-4)와 소차(疏箚, 권5-8)의 분량이 같을 뿐만 아니라, 奏·啓(권9), 議·狀(권10), 應製文·箋文·上樑文(권11), 祭文·雜著(권13), 神道碑(권14-5), 墓碣·墓表(권16), 誌銘(권17), 家狀·行狀(권18), 諡狀(권19-20)의 대부분이 벼슬과 관련된 성격의 글이다. 표지를 쓴 사람이 정원용 문집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초고에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 어느 시기에 지은 글인지 정확한 단서가 없지만, 제3권 첫 번째 편집한 시 「庚午...」를 보아서 1810년 10월부터 지은 글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정원용의 일기 『경산일록』에 기록한 행적과 대조해보면 그는 1810년 7월 12일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어 근무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정동만이 8월 15일에 영유현령으로 임명되자 10월 5일부터 ‘부모의 병’을 이유로 휴가를 얻어 영유현에 가서 아버지를 모셨다. 그러나 10월 5일 밤에 수찬에 낙점되었으므로, 첫 번째 시에 “이때 경연의 겸직을 받았다[時帶經筵兼啣]”고 주를 붙였다. 두 번째 시는 10월 9일 총수관에서 지었으며, 세 번째 시는 10월 13일 영부사 이시수의 생신에 지었다. 제1권 첫 번째에 실린 「이상국수석시첩서(李相國壽席詩帖序)」도 이때 지은 것이다. 1811년 4월 19일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출발했으니, 4월 중순까지 지은 글들이 실린 셈이다.
이 초고에 실린 작품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영유현 시기에 지은 글들은 활자본 『경산집』에 한 편도 실리지 않았으므로, 제목을 소개하고 필요에 따라 간단한 설명만 붙이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제1권】
「李相國壽席詩帖序」(영부사 이시수의 생신을 축하하며 지은 시첩의 서문이다.)
「送李應敎使倭國序」
「送通信副使序」(1811년에 마지막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는데, 부사 이면구(李勉求)를 전송하며 지은 글이다.)
「四宜堂記」(영유현 동헌의 서실인 사의당에 머물며, 사철 아름다운 경치와 그 즐거움을 설명한 기문이다.)
「梨花亭記」
「種樹記」
「聽民堂蓮塘記」(영유현의 동헌인 청민당 뒤에 연못을 만들고 지은 기문이다.)
「讀圬者王承福傳」
「讀毛穎傳」
「某縣伺候廳記」
「書贈射校康錫烈」
「淸溪書徒」
【제2권】
「惠慶宮患候平復後大殿賀箋」(1811년 1월에 혜경궁에게 감기 기운이 있어 약원에서 숙직하고, 18일에 회복하였다. 정원용을 비롯한 백관들이 28일에 진하하였다.)
「王大妃殿賀箋」
「中宮殿賀箋」
「惠慶宮賀箋」
「嘉順宮賀箋」
「王大妃殿冊禮五旬大殿賀箋」(2월에 왕대비가 가례를 올린 지 50년이 되어, 대신 이하가 전문을 인정전에서 올렸다.)
【제3권】
「庚午初冬日奉板輿作永淸覲行路占」(경오년(1801) 10월 6일에 신주를 모시고 영유로 가면서 지은 칠언절구 1수. ‘영청(永淸)’이나 ‘청계(淸溪)’는 모두 영유현의 옛이름이다.)
「宿蔥秀舘答盧金郊휘書因尾示」(10월 9일 총수관에서 자며 지은 오언절구 1수)
「箕營次李相國晬席韻」(10월 13일 영부사 이시수의 생신을 축하하는 칠언절구 4수)
「夜泛舟次李相國韻」(같은 날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이시수의 시에 차운한 칠언절구 2수)
「簡李泰川」
「送有之從」(10월 24일 종제 시용을 서울 집으로 돌려보내며 지은 오언율시)
「百祥樓送南上舍正客赴燕京」(11월 10일 연행사 일행을 안주에서 만나 지은 오언율시)
「陪輿西來無暇吟咏尹戚兄士瞻甫有書索詩故詩以簡之」(칠언절구 2수)
「寓居淸溪書帷靜寂松濤拍案推囱見寒山雪霽月輪皎潔悄坐無眠瞻懷友人是夜夢與諸賢會唔松園覺來耿耿然尤增此懷曉枕輾轉詩以識之寄示社中諸友」
「鶴山舘與崔友國輔相逢夜得七律」(강서현령 최길헌의 둘째아들 최원이 진사에 합격해 축하하는 잔치에 갔다가, 11월 22일에 그의 형 최황(崔璜)을 만나 지은 칠언율시이다.)
「與國輔同宿三夜耳明將歸矣爲賦一律」
「練光亭逢申學士仲立甫按試歸路夜與聯枕賦贈」
「鶴山衙參聞喜宴呈崔太守」(11월 22일 진사 최원의 문희연에 참석해서, 그의 아버지 강서현령 최길헌에게 지어 준 칠언율시이다.)
「寄崔友國輔」(친구 최황(1783-1874)에게 지어 준 칠언절구 5수. 국보는 최황의 자인데, 나중에 거창부사를 지냈다.)
「更和前韻」(위의 시에 다시 화운한 칠언절구 6수.)
「嘉辛未正朝覲留永淸恭賦二詩獻家大人」(신미년(1811) 설날 아침에 아버지 정동만에게 지어 바친 칠언절구 2수.)
「余沾沐洪造出入邇密已十載矣迓新之日敬寫戀結之忱」(진사에 합격한 지 10년이 되어, 성은에 감사하며 지은 칠언절구 2수.)
「安陵使君過余留宿歸後謝之」(1월 22일 안주목사 조종영이 찾아와 함께 자며 연구(聯句)를 지은 뒤에 돌아가자, 고마워하며 지어 보낸 칠언절구 3수.)
「又一絶謝留書迹」(조종영이 써준 글씨에 감사하며 지은 칠언절구 1수.)
「春日偶閱山谷道人集聞谷鳥流音忽懷友人曺儀卿仍效集中分韻寄贈軆以相彼鳥矣猶求友聲爲韻援筆成詩旣成矣聊書置俟褫」
「梨亭春日醉賦相屬」(봄날 영유현 이화정에서 지은 칠언율시 1수와 오언율시 1수.)
「又和族祖淑葆氏留別詩」
「疊箕營子舍李友韻」
「又和燈夕相邀韻」(사월 초파일에 화운한 오언율시 1수.)
【제4권】
「米豆山初次祈雨祭祝文」(영유현 동쪽 4리에 있는 진산 미두산에서 첫 번째 올린 기우제의 축문이다.)
「紫華山再次祈雨祭祝文」
「大圓山三次祈雨祭祝文」
「石連山四次祈雨祭祝文」
「臥龍山五次祈雨祭祝文」
「社稷六次祈雨祭祝文」
「盆浦七次祈雨祭祝文」
【제5권】
「養士樂育二齋記」(양사재(養士齋)와 낙육재(樂育齋)를 중건하며 지은 내용인데, 영유현과 관련이 없을뿐더러, 이 시기에 정원용이 지은 글이 아니다.)
서지적 가치
정원용의 아들과 손자가 활자본 문집 『경산집(經山集)』을 간행하기 전에, 시기별로 편집해 놓았던 초고이다. 아버지 정동만이 1810년 8월 15일에 영유현령으로 임명되자, 홍문관 수찬으로 재직중이던 정원용이 부모의 병을 이유로 휴가를 얻어 영유현에 가서 부모를 모셨는데, 이 시기에 지은 글들을 모아 놓았다. 어느 필사자가 초고의 제목을 『경산집초초(經山集初草)』라고 썼지만, 정확하게 제목을 붙이자면 ‘영유집초초(永柔集初草)’, 아니면 ‘영청집초초(永淸集初草)’나 ‘청계집초초(淸溪集初草)’가 적합하다. 정원용의 문집 초고들은 ‘약산(藥山, 영변)’이나 ‘북정(北征, 회령)’, ‘기성(箕城, 평양)’처럼 수령으로 재임하던 고을의 이름을 붙였는데, 정원용은 영유 시기에 지은 시나 산문에서 ‘영유(永柔)’라는 현명(縣名)보다 ‘영청(永淸)’이나 “청계(淸溪)‘라는 옛이름을 즐겨 썼기 때문이다. 영유 시기의 문집 초고는 국내외에 없으므로, 이 초고는 유일본으로 가치가 있다.
내용적 가치
이 초고에 실린 글들은 활자본 『경산집』에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손자 정범조는 활자본 『경산집』 발문에서 ‘초고의 10분의 1-2만 활자본에 실렸다[用活字擺印, 僅十之一二耳.]’고 했는데, 허경진의 연구에 의하면 『약산집(藥山集)』에 실린 시 170수 가운데 18수만 활자본 『경산집』에 실렸으니, ‘10분의 1이 실렸다’는 정범조의 말이 과장은 아니다. 그런데 『경산집초초(經山集初草)』 에 실린 시문은 활자본 『경산집』에 한 편도 실리지 않았다. 따라서 이 초고는 정원용이 1810년 8월 15일부터 1811년 4월 중순까지 지은 글들과 그 동안의 행적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활자본 『경산집』에 실린 글 말고도, 그가 평생 얼마나 많은 글을 지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정원용 저, 허경진·구지현 역, 『경산일록(經山日錄)』 1, 보고사, 2009.
허경진, 『정원용 관련 저술 해제집』, 보고사, 2009.
집필자 : 허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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