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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시집(薑山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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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C.0000.0000-20150331.NS_0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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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문집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별집류
· 작성주체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인찰공책지)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9세기]
· 형태사항 2卷1冊 : 上下單邊 左右雙邊 半郭 19.3 × 13.4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中黑口, 無魚尾 ; 27.9 X 18.4 cm
· 주기사항 裝訂: 四針眼
表題(題簽): 薑山詩鈔
專用印札空冊表示(版下口): 自然經室藏(徐有榘, 1764-1845)
序: 戊戌嘉平後三日席帽山人自序, 李調元雨邨撰, 潘庭筠書
評語
· 현소장처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 청구기호 韓9-28

안내정보

본서는 이서구(李書九)의 시 196제 284수가 실려 있는 2권 1책의 필사본 시집이다.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이라고 표시된 원고용지에 선사(善寫)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의 구장본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자는 낙서(洛瑞), 호는 강산(薑山)·척재(惕齋)·석모산인(席帽山人), 당호(堂號)는 소완정(素玩亭)·녹천관(綠天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선조(宣祖)의 열두 째 아들인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 1604-1651)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노론 청류로 활약한 인물로 사간원 정언을 지낸 원(遠, 1723-1770)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을 증직 받은 평산(平山) 신씨(申氏, 1724-1758)로서 부사(府使)를 지낸 사관(思觀)의 딸이다. 이서구는 5세 때 어머니를 여읜 뒤로 외가에서 자랐다. 그리하여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에 아버지에게 돌아왔는데, 1770년에 아버지마저 잃게 되었다.
이에 이서구는 어릴 때부터 외숙인 신간(申暕, 1709-1770)과 외종형인 신광려(申光呂, 1731-1771)에게 글을 배웠고, 성장한 이후로는 종조부인 이언묵(李彦黙, 1717-1771)을 스승으로 여겼으며, 14세에 치른 관례(冠禮)를 전후해서는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을 따라 배웠다. 이들 외에 젊은 시기에 이서구가 따라 배운 사람으로는 조연귀(趙衍龜, 1726-?)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를 들 수 있다.
21세 되던 1774년 가을에 정시(庭試) 병과에 제16인으로 뽑혔고, 10월에 섭기주(攝記注)로 첫 벼슬을 시작했다. 22세 때인 1775년부터는 약 6년간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었는데, 특히 역사책을 깊이 공부했다. 그 해에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포함됨으로써 사가시인(四家詩人) 또는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1785년(정조 9)에 시강원사서, 1786년(정조 10)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이서구의 학풍 형성은 크게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학(家學)과 박지원 등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과의 학문적 교류에 기인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서구는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1693) 이래로 계승된 금석(金石)과 육서(六書) 등의 가학에 기반하여, 전통 주자학의 테두리에 머물지 않고 고증학의 성과를 일정 부분 수용하였다.
또한 그는 홍대용과 박지원의 문하에 출입하고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과 사귀며 학문과 문학을 연마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조선의 역사와 현실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문학에서는 독창성과 개성을 중시하였다. 이를 통해 이서구의 산문은 격조 있는 작품성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시는 청나라 왕사정(王士禎, 1634-1711)의 신운설(神韻說)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종래의 진부하고 상투적인 시풍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2권 1책으로서 196제 284수의 시가 실려 있다. 권두에는 이서구 자신이 무술년(戊戌年)인 1778년(정조 2)에 쓴 서문,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의 서문과 평어(評語), 축덕린(祝德麟)의 평어가 차례대로 기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이정원(李鼎元)의 오언율시 「제강산시집후(題薑山詩集後)」와 심심순(深心淳)의 칠언절구 「집중명구여이채입포준시화인제(集中名句余已采入匏尊詩話因題)」가 기록되어 있다.
본서는 이서구가 19세였던 1772년(영조 48)부터 25세였던 1778년(정조2)까지의 작품을 창작 시기 순으로 수록한 것이다. 본서의 「자서(自序)」에는 본서의 간행 경위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이서구가 자신의 시를 선별해 놓았는데,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중국에 사행을 가면서 그 작품들을 베껴 갔다. 그리고 중국 문단에 소개하여 앞서 언급한 중국 문사들의 서문과 시평, 발문 등을 받아 왔다. 이에 이서구가 그것을 모두 책 속에 기록하게 함으로써 『강산시집』의 체제를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강산시집』에 기록된 이조원·반정균의 총평과 개별 시에 대한 평어 중에서 일부는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도 있다.
서지적 가치
이서구의 저작은 모두 필사본으로 전하는데, 본서는 서울대 규장각본 『강산시집』, 단국대 연민문고 소장본 『강산초집』,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강산초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강산초집』(古3648-62-1086)과 편차가 같은 이본이다. 그 중에서도 본서는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이라고 표시된 원고용지에 선사(善寫)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구장본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서지적 가치가 있다.
본서의 서지적 가치를 보다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이서구의 다른 시집에 대한 서지 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녹천지위(綠天之爲)』 : 김윤조 소장본.
② 『강산초집(薑山初集)』 :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 단국대 연민문고, 성균관대 존경각, 서울대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려대 도서관(2질).
③ 『강산시집(薑山詩集)』 : 서울대 규장각, 일본 동양문고.
④ 『석모산인미정초(席帽山人未定草)』 : 서울대 규장각.
⑤ 『고시첩(古詩帖)』 : 국립중앙도서관 일사문고.
이서구의 시집은 위의 5종과 문집인 『척재집(惕齋集)』에 있는 것을 더해서 모두 6종이 전한다. 창작 시기별로 나열하자면 10대 때의 창작집인 『녹천지위』, 20대 때의 시집인 『강산초집』과 『강산시집』, 30대 이후 작품이 주를 이루는 『척재집』의 세 가지가 주요한 시집이다. 이 중에서 『강산초집』과 『강산시집』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시집으로서 대체로 전자가 시의 체제별 분류인데 반해 후자는 창작 시기에 따른 편집이다. 그러나 김윤조 교수의 상세한 서지적 고찰을 통해 『강산초집』과 『강산시집』의 명칭에 의한 분류가 일관되지 않는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서울대 규장각본 『강산시집』은 4권 1책이다. 책의 표지는 '강산시집', 각 권 첫머리의 내제는 '강산초집'으로 되어 있다. 267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창작 연대순으로 수록하였고, 창작 연도가 표시되어 있는 시가 많다. '경성제국대학 도서'인이 찍혀 있고, "1934년 9월 6일, 이순용(李淳鎔)씨 소장 필사본을 등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국대 연민문고 소장 『강산초집』은 표제가 '강산선생초집'이며, 192제 279수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제2책의 끝에 신필영(申弼永)의 발문이 첨부되어 있고, 제1권 내제(內題) 아래 '신필영인'이라는 장서인이 있는 것이다. 이서구가 직접 산정(刪定)했다는 발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연민문고 소장 『강산초집』이 정본에 가장 가까운 이본으로 판단된다.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강산초집』은 4권 2책이다. 목록에 책의 각 장 하단 판신 부분에 '석모산방(席帽山房)'이라는 원고용지 표기가 있지만, 강산이 사용한 원고용지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강산초집』(古3648-62-1086)은 편차가 연민문고본과 같다. 다만 신필영의 발문이 없으며, 대신에 권1의 첫 면과 권4의 끝면에 김창신(金昌臣)이라는 사람의 장서인이 있다. 그리고 제일 끝에 김창신 또는 그와 긴밀한 사람이 1946년에 쓴 발문이 있다. 이상 소개한 4종의 이본은 본서와 같은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성균관대 존경각 소장 『강산초집』은 『초집』의 체제에 따르면서도 『초집』과 『시집』 두 책에 실린 작품을 모두 실어서 406제 617수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특히 첫머리에 『강산초집』을 읽고[讀薑山初集]」라는 제목의 오언 장편 고시가 놓여 있다. 다른 이본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 시는, 전체 1,100자 220구에 달한다. 이는 1852년 신필영(申弼永)의 작으로서 신필영의 문집인 『옥파집(玉坡集)』에도 같은 작품이 실려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본 『강산초집』은 신필영의 장편 고시가 빠진 것을 제외하고 존경각본의 첫 두 권과 일치한다.
고려대 육당문고본 『강산초집』은 표제가 '소완시(素玩詩)', 내제가 '강산초집'이다. "서만보인(徐晩輔印)"이라는 도서인이 있다. 서만보(1837-1917)는 1875년(고종 12)에 검서관에 임명된 뒤 외직으로 적성현령, 온양군수를 거쳐 1895년(고종 32)에 공주부 관찰사까지 오른 인물이다. 고려대 도서관에는 『초집』이 하나 더 소장되어 있다. 표제는 '강산집'으로 1책이고, 책의 내력과 관련되는 특별한 기록이나 도서인은 없다.
또 다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강산초집』(古3648-62-991)은 분권되어 있지 않고 모두 47장이며, 210제 318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강산초집』과 『강산시집』 가운데 가장 혼란을 보이는 이본이다. 이상의 서지적 비교 사항은 참고문헌에서 밝힌 김윤조 교수의 해제와 남재철 교수의 연구성과를 요약한 것이다.
일본 동양문고에도 『강산시집』이 한 책 소장되어 있다. 1책 43장의 필사본으로서 표제는 '강산유집(薑山遺集)'인데 표제 아래 '단(單)'이라고 쓰였고, 표지 오른쪽 상단에 '지원부이십구수(芝園附二十九首)'라는 내용이 부기되어 있다. '지원(芝園)'은 조수삼(趙秀三)의 자(字)이다. 내제가 '강산시집'이다. 동양문고본 『강산시집』은 이서구의 시 182수를 시체별로 필사하고, 이어서 조수삼(1762-1849)의 오언율시 10수와 칠언율시 19수를 필사한 책이다.
이처럼 동양문고본 『강산시집』은 다른 『초집』이나 『시집』과는 편차가 아주 다르다. 책의 마지막 장에 기록되어 있는 "세재병진중춘곡우전이일, 시완우행화소옥(歲在丙辰仲春穀雨前二日, 試腕于杏花小屋)"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할 때, 동양문고본 『강산시집』은 1856년에 누군가가 이서구의 시와 조수삼의 시를 함께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양문고본의 시작품들은 비록 제목·본문·주석이 생략되거나 누락된 경우가 많지만, 조선후기에 이서구와 조수삼의 시작품이 유통되던 정황과 두 사람의 어떤 작품이 주목 받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내용적 가치
본서는 이서구가 20대 초중반에 창작한 시작품들을 시대 순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 문사들의 서문과 시평, 발문을 통해 당시 중국 문사들이 이서구의 작품을 평가한 구체적인 내용과 당대 한·중 문사들이 교류하던 실상을 알 수 있다.
이조원은 서문에서 본서에 수록된 이서구의 시가 도연명(陶淵明)의 시풍과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이서구의 시가 "비단을 펼쳐놓은 듯 하면서도 화려함에 치우치지 않고, 장강대하와 같으면서도 넘치지 않아, 유장한 모습이 한결같이 바른 성정에서 표출되었다.(鋪錦列繡而不失於綺, 長江大河而不失於濫, 渢渢乎, 一出於性情之正焉.)"라고 극찬하였다. 또한 반정균은 서문에서 이서구의 시가 왕사정(王士禎)을 잘 본받았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본서의 전체적인 평어(評語)에서 이조원․반정균․축덕린 모두 이서구 오언고시의 풍격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윤조, 「『강산전서』 해제」,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5.
김윤조, 「『강산초집』 해제」,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김윤조, 「『강산초집』 해제」, 단국대 소장 연민문고 동장귀중본 해제집, 문예원, 2012.
남재철, 『강산 이서구의 삶과 문학세계』, 소명출판, 2005.
집필자 : 이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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