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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연필(睡餘演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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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C.0000.0000-20150331.NS_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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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문집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수필류
· 작성주체 홍길주(洪吉周, 1786-1841)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인찰공책지)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9세기]
· 형태사항 2卷1冊 : 上下單邊 左右雙邊 半郭 19.5 × 13.4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無魚尾 ; 32.2 X 20.2 cm
· 주기사항 表題: 睡餘演筆
專用印札空冊表示(版下口): 自然經室藏(徐有榘, 1764-1845)
· 현소장처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 청구기호 韓5-10

안내정보

홍길주(洪吉周)가 지은 2권1책의 필기류(筆記類) 저작으로 일상에서 얻은 단상들이 특별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나열되어 있다. '수여삼필(睡餘三筆)'로 통칭되는 『수여방필(睡餘放筆)』·『수여연필(睡餘演筆)』·『수여란필(睡餘瀾筆)』과『수여란필속(睡餘瀾筆續)』시리즈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저작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는 헌중(憲仲), 호는 항해(沆瀣)이다. 초년에는 현산자(峴山子)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영의정을 지낸 홍락성(洪樂性)의 손자로, 우부승지를 지낸 홍인모(洪仁謨)와 서형수의 딸 서영수합(徐令壽閤) 사이에서 태어났다. 풍산 홍씨는 한 집안에서 두 번 부마를 배출한 집안으로 정치적으로 거족일 뿐 아니라 문화적 벌열가문이기도 하다. 외가인 달성 서씨 역시 독특한 실학적 가학과 장서로 유명한 집안이다. 김원행(金元行)의 외손녀이기도 한 어머니 서씨는 특히 산술학에 전통하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좌의정을 지냈으며 문장가로 유명한 홍석주(洪奭周)가 그의 형이고, 정조의 부마로서 당대 문화계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홍현주(洪顯周)가 그의 동생이다.
홍길주는 특별한 사승관계 없이 가학으로 학문과 문학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홍길주의 지적, 문화적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12살 연상의 형 홍석주이다. 홍석주가 편찬한 『홍씨독서록(洪氏讀書錄)』은 홍길주의 독서 지침으로 마련된 것이기도 하다.
홍길주의 관력은 간단하다. 16세에 초시에 합격, 22세에 진사와 생원 양과에 합격하였으나 26세 무렵에는 과거를 포기한다. 집안이 지나치게 번성한 것을 염려한 어머니 서씨의 권고가 있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과거를 통한 입신에 회의가 있었던 듯하다. 이후 37에 음직으로 휘릉 참봉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동몽교관, 장흥고 주부, 의금부 도사, 경모궁령 등을 거쳐, 45세에 평강 현감, 48에 보은 군수, 55세에 김포 군수 등 외직을 거친 것이 관력의 전부이다. 지방관 재직 기간은 매우 짧아 김포 군수의 경우에는 채 반 년이 되지 않는다. 생애 후기에 일어난 지방관의 경험은 홍길주에게 무력감과 피로감만을 경험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문장과 시에는 초년의 이상론과 다른 무력감과 현실비판의식이 짙게 토로된다. 보은 군수를 사직하고 돌아와 칩거하던 시기에 지어진 『수여연필』에는 지방관의 경험과 관련된 단상들이 여럿 나온다.
일찍 현실적 입신을 포기한 홍길주는 오로지 문장가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의 문학은 기발한 구성과 종횡무진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특징으로 하는, 당대 최고의 기문으로 평가되었다.
당대 유명인사 중 반은 8촌 이내의 친척이라는 『수여연필』의 언급처럼 홍길주 주변은 당대 지성의 복판에 존재한다. 홍길주의 가장 중요한 교유관계는 오히려 형제들이다. 홍석주, 홍길주, 홍현주 삼형제는 집안에서 서로 사우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그밖에 홍길주와 직접적인 교유가 확인되는 인물로 선배 세대로는 김매순(金邁淳), 서유구(徐有榘), 정약용(丁若鏞) 등이 있고, 동세대로 이여성(李汝成), 윤정진(尹正鎭), 정학연(丁學淵), 김정희(金正喜), 초의(草衣) 등이 있다. 후배 세대인 박규수(朴珪壽), 김낙호(金樂浩), 김상현(金尙玄), 윤종의(尹宗儀), 김영작(金永爵), 유신환(兪莘煥), 홍한주(洪翰周), 윤정현(尹定鉉) 등과의 교유가 확인된다. 이밖에 홍씨 집안의 인척이나 문객, 혹은 겸인으로 평생에 걸친 친밀한 관계를 지속했던 인물들로 정세익(鄭世翼), 이정리(李正履), 이정관(李正觀), 유무환(兪茂煥), 심능숙(沈能淑), 김소행(金紹行), 상득용(尙得用), 진의경(陳宜敬), 이헌명(李憲明) 등이 확인된다.
직접적인 사승이나 교유관계는 없으나 박지원(朴趾源)의 저작에 대한 경도가 두드러지고, 교유 중에는 정약용·정학연 부자에 대한 특별한 경모가 눈에 뜨인다.
문장가로서 정체성을 구성한 홍길주는 자신의 저작을 편집하는 문제에서도 실험적 시도를 했다. 홍길주 자신이 직접 체재를 구성한 삼부작 문집으로 『현수갑고(峴首甲稿)』·『표롱을첨(縹礱乙㡨)』·『항해병함(沆瀣丙函)』이 있다. 환상세계에 자신의 문장을 배치한 『숙수념(孰遂念)』과 일력의 형식으로 전대의 시문을 편집한 『서림일위(書林日緯)』역시 매우 독특한 방식의 저술이다. 여기에 '수여삼필(睡餘三筆)'이라고 불리는 『수여방필』·『수여연필』·『수여란필』과 『수여란필속』의 삼부작 필기류 저작이 있다.
구성 및 내용
『수여연필』은 '수여삼필'로 불리는 삼부작 필기의 한 부분이다. '수여삼필'의 구성과 저작연대는 다음과 같다.
『수여방필』 | 1835년 10월 하순 50세 | 상하2권 | 124칙(상권66칙, 하권58칙)
『수여연필』 | 1835년 12월 50세 | 상하2권 | 151칙(상권71칙, 하권80칙)
『수여란필』 | 1836년 여름 51세 | 상중하3권 | 209칙(상권70칙, 중권67칙, 하권72칙)
『수여란필속』 | 1837년-1841년 52-56세 | 상하2권 | 169칙(상권83칙, 하권86칙)
『수여방필』·『수여연필』·『수여란필』까지는 저자 자신의 편집이고, 『수여란필속』은 저자 사후 1842년 아들 홍우건의 편집이다.
『수여연필』은 전형적인 필기류 저작이다. 특별한 구성이나 일정한 주제 범위 없이 일상에서 얻은 자유로운 단상들을 무작위로 나열한 형태이다. 상·하 2권으로 분절되어 있으나, 분권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권에 71칙, 하권에 80칙의 단락이 실려 있어서 전체 151칙이다. 홍길주 자신은 서문에서 153칙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현존하는 모든 이본은 151칙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저자 자신의 언급과 차이가 난다.
상권의 첫머리에는 홍길주가 붙인 서문이 붙어 있다. 여기에서는 『수여방필』의 탈고 이후 여전히 샘솟는 자유로운 단상들을 이어 기록한다고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더불어 자신의 저술에 대한 자부심, 독자에 대한 기대와 집필 연도 등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수여방필』을 탈고한 뒤 곧 이어 집필을 시작하여 1835년 12월에 탈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여연필』의 내용은 워낙 산만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쉽지 않다. 일상의 사소한 동기들로부터 촉발된, 인생과 세계·현실과 이상·학문과 문학에 대한 종행무진의 자유로운 상념들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기 집안이나 형제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들, 주변 인물들에 대한 기록, 자신의 생에 대한 성찰적 기록들, 인생에 대한 잠언적 경구들, 처세와 사교에 관한 지침들, 지방관으로서의 유의사항, 과시장(科試場)이나 시회(詩會) 같은 당대의 풍속에 대한 기록에서부터 자신의 꿈 이야기까지, 자신의 이루지 못한 저술 구상에 대한 기록과 자신의 문장에 대한 당대인들의 평가, 문장 감상방법과 독서법, 시문에서 평측을 운용하는 문제처럼 구체적인 문학비평적 언급들, 고증적인 언급들이 뒤섞여 있다.
『수여연필』의 이런 내용에 대하여 홍길주 자신은 '일상 속에서 귀와 눈으로 접한 것과 사람들과 이야기한 것을 반드시 기록'한 것이지만, '한 번 뒤집어 부연해놓으면 모두 기묘한 말이 될',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할 만한 독자적인 깨달음과 창의적인 논설'이라는 자부를 내비치고 있다.
자료 가치
서지적 가치
『수여연필』은 현재 세 가지 종류의 필사본이 보고되어 있다.
일본 오사카 부립 나카노지마(中の島) 도서관 소장본
일본 동경대학교 아천문고(阿川文庫) 소장본
한국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표롱을첨』총비기(叢秘紀) 수록본
세 본 모두 2卷1冊, 151칙으로 구성되어 있고 쌍행협주(雙行夾註)를 사용하여 정자로 단정하게 필사되어 있으며,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는 선본이다. 필체를 제외하면, 형식이나 내용상의 차이가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또한 세 본 모두 필사자나 필사시기를 확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 다만 필사의 전후 차이는 비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경대학 아천문고 소장본은 동일인에 의해 단정하게 필사된 선본이다. 그러나 필사자나 시기를 추정할 단서는 현재로선 발견할 수 없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은 홍길주의 문집에 수록되어 전한다. '수여삼필'은 홍길주의 문집에 저술 시기별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는데, 『수여연필』은 『표롱을첨』 14권과 15권에 총비기 4와 5로 수록되어 있다. 총비기가 단독 저작들을 문집 내로 수합하는 형식임을 생각하면 단독 저작으로 문집에 수합된 형태이다. 이 문집 필사본은 여러 사람의 필체로 필사되어 있고, '산(刪)'이라는 주서(朱書) 표시가 여러 곳에 되어 있다. 따라서 출판을 위해 흩어진 저작들을 모아 전체를 한꺼번에 필사하고 산삭하는 과정의 산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의 견해로는 한장석(韓章錫)이 20권 10책의 『항해집(沆瀣集)』으로 홍길주 문집의 출판을 추진하였던 과정의 저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에 포함된 『수여연필』역시 적어도 홍길주 사후 일정 시간이 흐른 뒤의 필사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나카노지마 도서관 소장본은 가장 초기의 필사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본은 판하구(版下口)에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이라고 인쇄된 전용인찰공책에 필사되어 있어서, 서유구의 자연경실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카노지마 도서관에는 『수여방필』필사본도 함께 소장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자연경실장'의 인찰지에 필사되어 있다. 장황(裝潢) 상태도 일치한다. 『수여란필(하)』(1836년 9월)에는 서유구가 『수여방필』과 『수여연필』 '이필(二筆)'을 자신이 편찬하는 『동국총서(東國叢書)』에 수록하려고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나카노지마 도서관 소장의 『수여방필』과 『수여연필』이 바로 이 '이필(二筆)'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이 두 필사본은 동일한 시기에 필사되어 서유구가 소장하던 것으로 동일한 경로를 거쳐 함께 나카노지마 도서관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유구가 '이필'을 가져간 것은 1836년 9월 이전이다. 따라서 자연경실에서 나온 이 이본은 『수여연필』의 완성시기에서 멀지 않은 시점의 필사본으로 최초의 필사본일 가능성이 높다.
내용적 가치
『수여연필』은 '수여삼필'의 일부로서 가치를 지닌다. '수여삼필'은 조직되지 않은 자유로운 형태의 비망록에 해당하는 글이다. 때문에 조직되기 이전의 자유로운 발상단계의 사유를 보여준다. 결과가 아니라 의도와 기획, 사고패턴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필기류의 분방함 때문에 문집과는 성격이 다른 다양한 정보를 포함하면서, 홍길주 문학의 저변을 게릴라식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홍길주의 다른 글들에서는 찾기 힘든 문학 비평에 해당하는 자료들도 풍부하게 담고 있으며, 홍길주의 문학에 대한 당대인들의 평가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홍길주의 신상과 문학 활동을 둘러싼 구체적인 정보들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따라서 홍길주의 문학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수여연필』이 담고 있는 다양한 19세기의 풍속과 인물에 대한 정보들은 또한 19세기 조선 문화사 연구에도 훌륭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박무영, 「‘수여삼필’의 문학적 사유」, 『열상고전연구』 17, 열상고전연구회, 2003.
박수밀, 「항해 홍길주 문학세계의 인식 기반」, 『동아시아 문화연구』 39,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5.
정민, 「‘수여삼필’을 통해 본 항해 홍길주의 사유방식」, 『동아시아 문화연구』 39,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5.
집필자 : 박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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