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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백선(古文百選)

장서인영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C.0000.0000-20160331.NS_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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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문집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총집류
· 작성주체 김석주(金錫胄, 1634-1684)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목판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7세기]
· 형태사항 7卷3冊 : 四周雙邊 半郭 19.6 × 12.9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28.2 X 17.8 cm
· 주기사항 表題, 書根題: 古文百選
版心題: 古文選
版種: 各冊 卷頭 수록 目錄, 本文 一部分은 筆寫本임
印: 完山人李[?]華[?][?]之印
· 현소장처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 청구기호 韓9-53

안내정보

김석주(金錫胄, 1634-1684)가 중국 선진(先秦) 시대부터 당송(唐宋) 시대까지의 명문장(名文章) 백여 편을 뽑아 놓은 산문선집(散文選集)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김석주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백(斯百)이고, 호는 식암(息庵)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식(湜)의 6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문정공(文貞公) 육(堉, 1580-1658)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좌명(佐明, 1616-1671)이며, 어머니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部都摠管)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의 딸이다.
1657년(효종8)에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에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1661년(현종2)의 친림시(親臨試)를 통해 직부전시(直赴殿試)되었고,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장원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674년(현종15)의 2차 예송(禮訟) 때 남인(南人) 허적(許積) 등과 결탁해 산당(山黨)을 숙청하고 수어사(守御使)에 이어 도승지(都承旨)로 특진되었다. 1680년(숙종6)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불리는 허견(許堅)의 역모 사건을 일으켜 남인을 숙청하였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병조 판서 등을 거쳐 1682년(숙종8)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하였다. 이해 겨울 사은사(謝恩使)로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1684년(숙종10) 병조 판서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후인 1689년(숙종15)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집권하자 공신호(功臣號)와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재집권하면서 복권되었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치적 부침과는 별개로 그는 당대의 일류 문인으로서 이름을 날렸고, 특히 소차(疏箚)와 책론(策論) 등의 공거문(公車文)에 능했다고 평가된다. 또한 중국 문예를 적극 수용하여 다양한 편저를 남김으로써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개인 활자인 한구자(韓構字)를 제작하여 자신의 편저서 및 다양한 서적들을 출판함으로써 조선 후기 출판문화에도 기여한 점이 많다. 그의 저술로는 문집 『식암유고(息庵遺稿)』 25권 14책이 현전하고 있으며, 편저로 『고문백선(古文百選)』, 『해동사부(海東辭賦)』, 『여문초(儷文抄)』, 『행군수지(行軍須知)』 등이 전한다.
구성 및 내용
표제(標題)는 "고문백선(古文百選)"이며 판심제(版心題)는 "고문선(古文選)", 권수제(卷首題)는 "고문(古文)"이다. 천(天), 지(地), 인(人) 3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록 작품 수는 모두 101편으로, 천책(天冊)에는 상편(上篇) 1과 2 도합 30편, 지책(地冊)에는 상편 3과 중편(中篇) 1 도합 25작품, 인책(人冊)에는 중편 2와 3, 하편(下篇) 도합 46편이 각각 목록과 함께 수록되었다. 전문이 수록된 본 작품 외에도 참고 작품을 해당 작품 뒤에 전문 혹은 초록의 형태로 실어 두는 경우가 있어서, 참고로 제시된 작품 22편까지 포함하면 총 수록 작품은 모두 123편이다.
전체 내용은 상, 중, 하 세 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상편과 중편은 작품의 시대에 따라 다시 1, 2, 3으로 구분되어 있다. 즉 선진 시대 작품을 1, 당대(唐代) 작품을 2, 송대(宋代) 작품을 3에 배치하여 구분하였다. 다만 하편의 경우는 따로 구분 없이 모든 작품들을 한꺼번에 수록해 둔 점이 상, 중편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상, 중, 하편의 구분 기준은 작품 수록 상에 뚜렷한 특징이 보이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다. 각 편별 수록 작가와 작품 제목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편 1 : 燕 樂毅, 「報燕惠王書」 / 秦 李斯, 「上秦皇諫逐客書」(附 柳宗元, 「與崔饒州論石鍾乳書」) / 漢 賈誼, 「過秦論」 / 漢 鼂錯, 「言兵事書」(附 「上書論貴粟」) / 漢 鄒陽, 「獄中上梁王書」(附 中山王, 「聞樂對」 / 江淹, 「詣建平王上書」) / 漢 枚乘, 「諫吳王書」(附 「又說吳王」) / 漢 李陵, 「答蘇武書」 / 漢 楊惲, 「報孫會宗書」 / 漢 朱浮, 「與彭寵書」(附 「與陳伯之書」) / 漢 諸葛亮, 「出師表」(附 「後出師表」 / 後漢 孔融, 「與曹公論盛孝章書」)
상편 2 : 唐 韓愈, 「論佛骨表」 / 「後十九日再上宰相書」 / 「後卄九日復上書」 / 「上張僕射書」 / 「代張籍與李浙東書」 / 「與于襄陽書」 / 「送李愿歸盤谷序」 / 「送浮屠文暢師序」 / 「送石洪處士序」 / 「送溫處士赴河陽軍序」 / 「送楊少尹序」 / 「原毁」 / 「進學解」 / 「諱辯」 / 「師說」 / 「南海神廟碑」 / 唐 柳宗元, 「與韓愈論史書」 / 「愚溪詩序」(附 「愚溪對」) / 「種樹郭橐駝傳」 / 「捕蛇者說」
상편 3 : 宋 王禹偁, 「待漏院記」 / 宋 范仲淹, 「岳陽樓記」 / 宋 石介, 「擊蛇笏銘」 / 宋 歐陽修, 「醉翁亭記」 / 「豐樂亭記」 / 「晝錦堂記」 / 「有美堂記」/ 「釋秘演詩集序」 / 「送徐無黨南歸序」 / 「朋黨論」 / 宋 蘇洵, 「管仲論」 / 「高祖論」 / 「張益盖州畫像記」 / 宋 蘇軾, 「代滕甫辯謗乞郡書」 / 「喜雨亭記」 / 「超然臺記」(附 「凌虛臺記」) / 「潮州韓文公廟碑」 / 「表忠觀碑」 / 宋 蘇轍, 「上樞密韓太尉書」(附 馬子才, 「子長遊贈蓋邦式」) / 宋 張耒, 「答李推官書」(附 「送秦少章赴臨安簿序」)
중편 1 : 漢 賈誼, 「治安策」 / 漢 劉安, 「諫伐南越書」 / 漢 司馬遷, 「答任安書」 / 漢 劉向, 「論山陵書」 / 漢 揚雄, 「諫不受單于朝書」
중편 2 : 唐 韓愈, 「平淮西碑」 / 「原道」 / 「與孟簡尙書書」 / 「張中丞傳後敍」 / 「祭十二郞文」(附 「祭河南張員外文」 / 唐 柳宗元, 「寄許京兆孟容書」 / 「答韋中立論師道書」 / 「梓人傳」 / 「封建論」
중편 3 : 宋 歐陽修, 「上范司諫書」(附 韓愈, 「諍臣論」) / 宋 蘇洵, 「上歐陽內翰書」 / 「上田樞密書」 / 「春秋論」 / 宋 蘇軾, 「代張方平諫用兵書」 / 「倡勇敢策」 / 宋 胡銓, 「上高宗封事」
하편 : 楚 屈原, 「漁父」 / 「卜居」 / 「對楚王問」 / 漢 司馬相如, 「諫獵書」 / 晉 李密, 「陳情表」 / 唐 韓愈, 「獲麟解」 / 「雜說」 / 「應科目時與人書」(附 「爲人求薦書」 / 「答陳商書」) / 「送王含秀才序」 / 「送董邵南序」 / 「送段員外序」(附 「送石昌言爲北使引」) / 「送廖道士序」(附 「靈谷詩序」) / 「殿中少監馬君墓誌」(附 「謝陽夏夫人高氏墓碣」) / 唐 柳宗元, 「始得西山宴游記」(附 「錮鉧潭西小丘記」) / 「零陵郡復乳穴記」 / 「永州鐵爐步志」 / 「晉文公問守原議」 / 「桐葉封弟辨」 / 宋 王禹偁, 「黃州竹樓記」 / 宋 歐陽修, 「縱囚論」 / 「伶官傳論」 / 宋 司馬光, 「諫院題名記」 / 宋 王安石, 「讀孟嘗君傳」 / 宋 李覯, 「袁州學記」 / 宋 濂溪周子, 「愛蓮說」 / 宋 陳師道, 「與秦少游書」(附 「思亭記」) / 宋 李廌, 「書洛陽名園記」 / 宋 唐庚, 「家藏古硯銘」(附 「上席侍郞書」) / 橫渠張子, 「西銘」 / 伊川程子, 「明道先生墓表」
각 작품은 제목과 작가명을 한 줄에 기록하고, 곧바로 본문이 시작된다. 참고 작품이 제시된 경우에는 본문이 끝난 뒤 한 칸 내려서 제시하고, 초록해 제시하는 경우에는 "약왈(略曰)"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작품을 수록할 때에는 작품 본문만을 수록하는 것이 본서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되는 원칙이지만, 하편 끝부분에 수록된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한 편에 대해서만은 소주(小註)로 상세한 주석이 부기(附記)되어 있다.
본문 말미에는 3칸 내려서 미비(眉批)가 수록되어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미비의 내용은 대체로 누방(樓昉)의 『숭고문결(崇古文訣)』이나 진덕수(陳德秀)의 『문장정종(文章正宗)』, 당순지(唐順之)의 『문편(文編)』, 모곤(茅坤)의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등 중국의 문장 선집에 실린 논평을 인용해 놓은 것이 많고, 간혹 김석주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논평이 등장하기도 한다.
한편 본서에는 낙장(落張)된 부분이 적지 않은데, 해당 부분은 새로 필사해 삽입되어 있다. 목판본(木版本)의 자체(字體)가 새로 필사해 넣은 부분과 현저히 달라 구별하기가 용이하다. 해당 면은 아래와 같다.
상편 1(3장) : 목록, 22, 31
상편 2(3장) : 목록, 15, 16,
상편 3(3장) : 14, 27, 33
중편 1(8장) : 3, 10, 11, 18, 27, 28, 31, 32
중편 2(3장) : 목록, 3, 14
중편 3(4장) : 10, 31, 32, 33
하편(3장) : 2, 9, 17
이상 도합 27장
서지적 가치
본서는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하여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활자본으로는 무신자(戊申字)본, 한구자(韓構字)본이 있고, 목판본으로는 한구자본의 번각본(飜刻本)이 남아 있으며, 그 외에 다수의 필사본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한문산문 선집으로서는 드물게 언해본의 존재까지 확인되고 있다. 그중 가장 널리 유통되었고 현재까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판본은 한구자본의 번각본으로 본서 역시 이 판본의 하나이다. 따라서 본서의 존재는 『고문백선』이 조선 후기에 얼마나 유행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서 서지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판본 상의 희소성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내용적 가치
본서의 내용적 가치는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첫째, 본서는 편자인 김석주의 산문관 및 산문 비평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본서는 특히 다른 한문산문 선집에 비해 선진(先秦) 시대의 작품을 압도적으로 많이 수록하여 당송(唐宋) 고문 위주의 한문산문 학습 풍토를 개혁하고자 하였던 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일반적으로 널리 읽혔던 문장학습 교본들이 당송 고문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학습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데 반해, 본서는 선진 고문의 수록 비중을 대폭 늘려서 독자들이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모범 작품을 균형 있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둘째, 본서는 조선 후기 문인들의 한문산문 학습 경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본서의 서문(본서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김석주의 『식암유고(息庵遺稿)』에 수록되어 있음)에 따르면 당초 본서는 과거 시험 대비를 위한 작문 교과서로서 편찬된 것이었지만, 간행 후에는 오히려 초학자(初學者)들의 문장 학습을 위한 교과서로서 더 널리 읽혔다. 이점은 본서가 문장 교과서로서 조선 후기 자료에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는 점, 다양한 판본이 현전하는 점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본서는 조선 후기 문인들이 한문 산문 감상 및 창작의 기초를 다지는데 주로 어떤 작품들을 참고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본서는 조선 후기 평점(評點) 비평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한국 고전 비평사에서 한문산문에 대한 평점 비평이 본격화된 것은 대체로 16-17세기 전후부터로 보고 있는 바, 본서는 조선시대의 평점 비평서로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7세기 중엽에 출현하여 18세기 이후 다양한 평점 비평서들의 등장을 추동(推動)했다는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김광년, 「息庵 金錫胄 散文 硏究」, 고려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집필자 : 김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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