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관화약초(關話畧抄)

장서인영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D.0000.0000-20150331.OGURA_046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운서 | 교육/문화-문학/저술 | 자부-역학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15張) : 29.4 X 20.3 cm
· 주기사항 假表題: 關話畧抄
書根題: 關話畧抄
假綴
· 현소장처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 청구기호 L174575

안내정보

편자 미상의 조선 후기 필사본 중국어 회화서이다. 화자의 구분 없이 대화를 수록하였으며, 주요 화자는 조선 상인 김지선(金芝仙), 중국 상인 하가차국(何家車局)과 원창호(源昌號) 주인 하팔(何八)이다. 그 밖에 마부 양병일(楊秉一), 거간 장삼(張三)과 이사(李四) 등이 등장한다. 본문은 상하 양란으로 나뉘며 상단은 원문, 하단은 한글번역문이 있고 상단 원문은 우측에 한글 주음이 달려 있다. 이는 일본 다쿠소쿠문고(濯足文庫) 소장의 『중화정음』, 오구라문고 소장의 『화음촬요(華音撮要)』와 비슷하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편자 및 필사자는 미상이다. 소장자인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는 언어학자로 1911년 한국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하면서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서울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조선어문학부(朝鮮語文學部) 교수를 역임하였고, 『조선어학사』, 『향가 및 이두의 연구』, 『증정 조선어학사』등을 저술하여 조선어학의 연구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오구라문고에 소장된 자료는 경서류, 종교서류(불경류/성서류), 실용잡학서류(의학서/병서), 역학서류(한학서/왜학서/청학서), 敎民類(윤음류/학습류/교화류), 문학작품언해, 운서류, 언문문학작품(시가류/소설류), 사서류, 기타(훈민정음관계서) 등 다양하다. 또한 모든 자료에 적절한 직어(職語)라든지 부전(符箋)이 붙어 있어 어학자로서 서지학자로서의 수집가의 면목을 알 수 있으며 수집된 자료는 모두 독파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구성 및 내용
이 책은 화자의 구분 없이 대화를 수록하였다. 주요 화자는 조선 상인인 김지선(金芝仙), 중국 상인인 하가차국(何家車局)과 원창호(源昌號) 주인 하팔(何八)이다. 그 밖에 주요 인물로 수레를 몰고 북경을 왕래하는 마부 양병일(楊秉一), 거간 장삼(張三)과 이사(李四)가 보인다. 전체적인 내용은 대화의 주제와 화자에 따라 크게 여섯 대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조선 상인 김지선과 하가차국 주인 하팔과의 대화 (1a-4b)
② 조선 상인과 거간 장삼․이사와의 대화 (4b-7a)
③ 조선 상인 김지선과 객점 하인과의 대화 (7a-8b)
④ 조선 상인과 수레꾼 양병일과의 대화 (9a-10a)
⑤ 조선 상인과 객점 하인과의 대화 (10b-11b)
⑥ 하팔이 조선 상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조선 상인이 물건을 구매하는 이야기 (12a-14a) 이다.
각 대목별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조선 상인 김지선과 하가 차국 주인 하팔과의 대화 (1a-4b)
조선 상인 김지선이 봉물 바치는 대인과 중국 변문의 탕산참에서 하룻밤 자고 책문의 하가점에 이르러 점심을 먹는다. 봉황산 밑에는 양국의 상인들이 변경무역을 하는데 거래량이 무려 일만 팔천 냥이나 된다. 조선 상인은 원창호란 가게를 찾아가 주인과 통성명을 한다. 주인은 하가 차국의 주인이기도 한데 이름은 하팔, 나이는 스물여덟이다. 조선 상인은 서울 사람으로 대인을 따라 북경에 장사하러 가는데 주로 금과 종이와 인삼을 취급한다. 물량은 종이가 삼십 강, 인삼이 팔백 근이다. 건륭 도광 연간에 수당관을 지낸 김지선의 선친 김소산은 하팔 선친과는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이다. 이를 알고 두 사람은 무척 반가워한다.
〔2〕조선 상인 김지선과 장삼․이사와의 대화 (4b-7a)
조선 상인은 장가 이가를 불러 이곳 시장 상황을 물어본다. 유증상․순성영․항길상 등 점포에는 생양목, 옥양목 등 각종 양목과 말총, 각종 약재가 쌓여 있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유증상에 들어가 양목 견본을 가져오라 하여 값을 물어보니 상품은 다섯 냥 오전, 이등품은 넉 냥 팔전, 삼등품은 넉 냥 오전이다. 너무 비싸 한 필당 은 삼전씩을 깎으려 하나 받아주지 않자 순성영으로 발길을 옮긴다. 각양각색의 삼승포와 말총을 보여 주는데 삼승포는 대원발 한 짝에 육십 냥이고 말총은 한 짝에 오십오 냥이나 한다. 시세를 비교하니 너무 차이가 나 밑질 것이 분명하므로 할 수 없이 거래는 중단하고 돌아간다.
〔3〕조선 상인 김지선과 객점 하인과의 대화 (7a-8b)
객점으로 돌아온 조선 상인은 구들이 얼음장같이 차서 어떻게 자느냐고 묻자, 객점의 하인이 땔나무는 얼마든지 있으니 여덟 단이고 열 단이고 더 때면 더워진다며 그때 가서 방이 너무 더워 이불이 타도 원망하지 말라고 한다. 조선 상인은 방이 썰렁하고 외풍이 너무 세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기에 숯불을 방안에 피워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생숯을 가져오므로 바깥에서 피워 가지고 들여올 것을 주문한다. 창문도 구멍이 숭숭 나 있어 백지와 풀을 가져다가 다시 바르라 하니 하인은 주인에게 직접 말하라고 한다. 점주를 불러 창문에 구멍이 뚫어져 바람이 스며들어 잘 수 없다고 호소하자 종이와 풀을 갖다 주며 하인을 시켜 바르게 한다.
〔4〕조선 상인 김지선과 수레꾼 양병일과의 대화 (9a-10a)
조선 상인이 남방에서 온 자점죽과 각종 사기그릇이 있는지 묻자 남방에 도적이 일어나 물건들이 들어오지 못해 값이 올랐다면서 초면에 통성명을 한다. 그 사람은 북경을 왕래한 지 십여 년 경력을 갖고 있는 수레꾼으로 무영현 양자촌 사람 양병일이다. 수레는 심양에서 새로 산 것이며 노새는 두 마리에 천 이백 냥 주었다고 한다. 조선 상인은 그와 수레 삯 흥정을 마치고 사흘 후 떠나기로 한다. 그러자 수레꾼은 관례대로 수레를 덮을 유단(油單) 두 장을 달라 한다. 조선 상인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객점으로 돌아간다.
〔5〕조선 상인 김지선과 객점 하인과의 대화 (10b-11b)
날이 어두워 불을 켜도록 하자 초 하나와 촛대를 가져왔는데 초의 심지가 너무 굵어서 쉽게 닳겠다면서 초 한 개를 더 달라면서 주인과 옥신각신한다. 하가 집터와 논밭 산림 따위가 볼 만하다던데 하고 운을 떼자 그보다 저들 집안에 큰댁과 작은댁과 딸과 계집들이 한결같이 예쁘다고 말한다. 조선 상인이 삼강오륜을 모르는 상놈이라며 남의 집안 여인들의 일은 말하는 법이 아니라고 질책하자, 누구든지 젊었을 때 좋은 옷 빼 입고 체면 차리기 좋아하는 것은 기생과 화냥질하는 계집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 때문이라며, 요즘 젊은 양반들은 계집 있는 곳에 가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하자 조선 상인은 이런 고약한 놈은 처음 본다며 계집 붙이는 놈같이 나를 어른다며 화를 내고 내쫓는다. 한편 뒤가 마려워 측간을 물으니 월담 밑에 등불을 켜고 보라고 한다. 뒤 닦는 종이를 서너 장을 받아 든다.
〔6〕주인장 하팔이 조선 상인에게 음식 대접받고 물건 구매하는 이야기 (12a-14a)
아침에 일어나니 주인장 하팔이 찾아와 차린 것은 별로 없고 술이나 한 잔 대접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탁자에 차린 것을 보니 각종 산해진미는 말할 것도 없고 신선로와 크고 작은 그릇에 요리를 내오는데 하나같이 맛이 있다. 주인이 관례대로 석 잔 술을 권하고, 이것저것 요리를 맛볼 것을 권한다. 이 사람 저 사람 술을 받아 마시고 밥을 세 그릇씩이나 배불리 먹은 다음에는 양치를 하고 담배와 차를 즐긴다. 차가 향기로워 차 한 근 값을 물어 보니 중품이 한 냥 오전이라 한다. 차 스무 근을 주문하고 사탕류를 물어보니 원하는 대로 공급해 줄 수 있다 한다. 사탕류는 짝이나 통째로 저울을 다는데 한 짝은 백근, 한 통은 팔십 근이다. 소 모는 사람을 불러 짐을 싣게 하고 값을 셈하니 도합 이백오십오 냥으로 표를 끊고 통사를 시켜 문 밖에 내 보내도록 한다.
다음날 새벽 동틀 무렵 수레꾼 양병일이 약속한 대로 짐을 부리러 온다.
서지적 가치
이 책은 행간에 맞추어 쓴 노련한 서체의 필사본으로, 작자나 필사자, 필사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책의 형태는 사주쌍변(四周雙邊) 광곽(匡廓) 유계(有界)이며, 크기는 29.4×20.3cm이다. 표지가 없으며 본문 첫 면에 '關話畧抄'라는 서명이 쓰여 있고 바로 내용이 시작된다. '關話畧抄'의 '關話'는 아래의 대목에서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這个山名找鳳凰山, 關東地方頭一个名山, 山淸水秀, 一處不到一處迷. 이 산 일홈을 봉황산이라고 부니라 관동 디방 뎨일 명산이니라 산이 고 물이 혀난데  곳에 니지 못면  곳은 흐미니라 (1b)
원문의 내용을 통해 '關東' (관동은 옛 명칭으로, 지금의 河北 山海關 동쪽의 遼寧․吉林․黑龍江을 關東이라 칭함) 지방에서 사용하는 말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조선후기 필사본 한어회화서류에 많이 보이는 서명인 '중화정음(中華正音)' 또는 '화음(華音)'이 아닌 구체적인 지역 명칭이 서명에 쓰인 점이 독특하다.
전체 14장이며 반엽 11행간으로 되어 있고 매 행간에는 각각 두 행씩, 전체 22행이 필사되어 있다. 본문은 상하 양란으로 나뉘며 상단은 원문, 하단은 한글번역문이 있고 상단 원문은 우측에 한글 주음이 달려 있는 점은 일본 다쿠소쿠문고(濯足文庫)『중화정음』, 오구라문고『화음촬요(華音撮要)』와 비슷하다.
내용적 가치
이 책은 중국어 원문 및 한글 주음, 번역문을 통해 중국어학적 특징 및 근대 국어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이 문헌의 표기 형태를 보면, 비슷한 발음의 다른 글자를 가차해 기록한 음차자(音借字)나 속자가 많이 보인다.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가) 중국 어음 간의 음차 및 방언의 영향을 받아 음차한 경우: '一(以)後', '你你(呢)貴姓', '勾(跟)', '旁(房)子', '覆盖(鋪盖)', '頭疔(頭疼)', '賬(糨)', '找(叫)', '多小(少)', '講主(究)', '口弄(窟窿)', '連(攆)', '拿(拉)尿', '拿(拉)倒'.
(나) 한자의 우리말 독음을 음차한 경우: '强(剛)纔', '那把(怕)', '筭板(盤)', '淳(燻)', '汗後(含糊)'
(다) 우리나라 속자나 오자: '価(價)', '戔(錢)', '寔(實)', '辨(辦)', 荅(答), '呌(叫)塌', '[火+市](蠟)', '一介(個)', '呵(啊)', 砧(站), 涯(捱 /挨)凍涯餓, '烟代(袋)', '隨邊(便)', '楊(養)漢的'.
(가)는 중국 어음 간에 상호 음차한 글자이거나 방언의 영향을 받아 음차한 경우이다. 동북관화(東北官話)의 설첨전음과 설첨후음을 혼용하는 특징을 보이는 음차자 표기가 있는데, '多小(少)', '講主(講究)', '找(叫)' 등이 그러하다. 『기착일필(騎着一匹)』․『학청(學淸)』․『니니귀성(你呢貴姓)』등과 같은 다른 필사본 한어 회화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대개 동북지역 방언의 영향인 듯하다. 이외에 '口弄(窟窿)', '連(攆)', '拿(拉)尿', '拿(拉)倒'는 비음 'n'과 변음 'l'을 혼용하고 있는 강회관화(江淮官話)의 특징을 보여주는 음차자이다. 이런 현상은 당시의 우리나라 사신들이 다니던 연행 노정이나 상인들의 상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사료(史料) 상의 연행과 관련된 지역은 요녕성(遼寧省)․하북성(河北省)․산동성(山東省)․강소성(江蘇省)의 4개 성으로, 이는 동북관화․북방관화․북경관화․교료관화(膠遼官話)․중원관화(中原官話)․강회관화구에 해당된다. 이 자료에서도 나타나듯이 우리나라의 중국어자료에는 자연스럽게 이 지역 방언들의 특징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한자의 우리말 독음을 음차한 경우이다. 이 자료를 필사한 사람의 식자 능력이나 중국어 수준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닌 듯하며, 이와 같은 양상은 다른 필사본 한어 회화서에도 나타난다.
근대 한어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구어 어휘, 즉 방언이나 속담이나 비속어, 그리고 외래어 어휘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휘들의 대량 출현으로 인해 근대 한어의 어휘 수는 더욱 풍부해졌다. 그러나 시대적 어휘나 방언들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책에 출현하는 일부 어휘들은 근대시기에 생긴 후 지금은 소멸되었거나 표기가 달라졌는데, 이들 어휘를 식별하는 과정은 근대 한어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예를 보면 아래와 같다.

□ 天道

(1) “風大雪深, 天道好冷, 一天不到到湯山砧睡, 一夜涯凍涯餓說不得.”

    람이 크고 눈이 깁허 하이 됴히 차매 하로에 니지 못고 탕산참에 니러

    자고 하로밤 칩고 주린 거 말노 다 못리라 (1a)

(2) “天道黑咧点照罷.”

    어두엇다 불 혀라 (10a)

(1, 2) '天道'는 (1) '하'로 번역되어 '날씨'의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아가와문고『중화정음』에 '天道'는 5차례 나오는데, 『老乞大』에서도 보인다. 우리나라 역학서에는『역어유해보(譯語類解補)』(1775),『방언유석(方言類釋)』(1788)에 처음 수록되었으며『화음계몽언해(華音啓蒙諺解)』(1883)에도 보인다. 원대 희곡과 명대 소설에서도 나타나며, 일제강점기 필사본 한어 회화서인『관화총집(官話叢集)』에도 '日氣'로 뜻풀이 한 것을 보면 1910-20년대까지도 '날씨'의 뜻으로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 底些們 /打子的 /底子 /打更的

(3-ㄱ) “有紙賬兩樣都拿來咧, 敎底些們好糊罷.”

       잇쇼 조희와 풀 두 가지 가져와시니 하인을 쳐 잘 르시오 (8b)

(3-ㄴ) “底些們帶着烟代、荷包跟着來罷.”

       하인아 와 지 가조고 조 오나라 (12a)

(4) “店裡回來了, 打子的來一个人.”

    졈에 도라왓다 하인 하나 오라 (7a)

(5) “我頭看這樣怪古東西, 保山的底子嚇我咧.”

    내 이런 고약 놈을 쳐음 본다 계집 부치 놈치 나 어르이고나 (11b)

(6) “店裡打更的說, 這个山名找鳳凰山, 關東地方頭一个名山.”

    졈의 부리 놈이 말 이 산 일홈을 봉황산이라고 부니라 관동 디방 뎨일

    명산이니라 (1b)

(3)의 '底些們'와 (4)의 '打子的' (5)의 '底子' (6)의 '打更的'은 유의 관계에 있다. (3) '底些們[듸셜문]'과 (4) '打子的[다乙듸]'는 '하인'으로 대역되었고, (5) '底子[듸즈]'는 '놈', (6) '打更的[다징디]'는 '부리 놈'으로 대역되었다. 이들은 "아랫사람"의 뜻으로, "객점에서 부리는 점원"을 지칭한다. '底些[디셜]'도 '아레 /디셜'로 대역되어 '아래'란 뜻으로 '底下'의 음이 약화된 표기로 보인다. '底些們'이란 호칭은『기착일필』과『중화정음』(아라아시문고 /아가와문고)에도 보인다. 장서각본『중화정음』에는 '打使夥 /打使輩'의 형태로 나타난다.

□ 們子 /官保子 /楊漢的

(7) 別管誰年靑的時候, 好穿衣服好體面是, 敎官保子、們子、楊漢的照看意思否咧, 年靑老

    爺如今大軆面, 若到花消地方只怕不軆面哪.”

    아모던지 절머실 에 됴흔 의복 닙고 치면 거시 기과 갓나의 다 환녕

    계집으로 잘 뵈이려  의가 아니오 절문 노야가 시방은 치면노라 만일 계집

    의 디방에 사셔 다못 치면 업가 두려워 노라 (11a)

(7) '們子[문즈]'는 '갓나의'로 '官保子[관즈]'는 '기'으로 대역하였다. 전자 '갓나의'는 근대 한국어에서 '갓나희', '갓나' 등으로 나타나는데 "계집아이"란 뜻이다. 다른 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장서각본『中華正音』에 한 예가 보인다.
'官保子'는 '官婊子'의 음차자로, '관가에 속한 기생어미' 정도로 풀이될 수 있겠다. '楊漢的'('楊'은 '養'의 음차자임)을『동문류해(同文類解)』(1748)․『몽어유해(蒙語類解)』(1768)에서는 '나'로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官保子'․'們子'․'楊漢的'는 모두 같은 뜻이다. 조선시대 역학서에서는 대개 '화냥이[花娘]'로 풀이하였는데 이 문헌에서 '환녕 계집'으로 푼 것과 완전 일치한다. 현대국어의 '화냥년'은 바로 여기에서 온 것이다.

□ 水紙

(8) “老爺要拿尿嗎?”

    노야 뒤 보시고 시부니잇가

    “西邊月墻底些好拿, 照着灯籠往那邊拿罷.”

    셔편 월담 밋 보기 됴흐니 등불 혀고 뎌긔 가 보시오

    “水紙兩三張給我罷.”

    뒤 씨슬 조희 두셋을 날 다고 (11b)

(8) '水紙[즈]'는 '뒤 씨슬 조희'로 대역되었다. '手紙'의 음차자로 '휴지' 또는 '대변 용지'를 말한다.

□ 油紙

(9-ㄱ) “那嗎一定就給我兩張油紙.”

       그러면 뎡엿시니 나 유단 두 쟝만 주오 (10a) 

(9-ㄴ) “油紙是包車子的規矩, 給車伴兩張油紙罷.”

       유단은 수레 싸 법이니 수레군 유단 두 장만 주니라 (10a)

(9-ㄷ) “我拿油紙回店去咧.”

       내 유단 가지고 졈으로 가오 (10a)

(10) “你拿油紙用得那乙?”

     네 유지 갓다가 무어 쓰려 냐 (10a)

(9)는 '유단'으로, (10)은 '유지'로 대역되었다. '유단'의 한자어는 '油單'으로 '기름 먹인 천'을 의미한다. '油紙'는 중국소설『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과『충렬협의전(忠烈俠義傳)』에도 나온다.

□ 嗎子

(11) “放心罷. 包子一百斤桶子八十斤. 元來元封的嗎子一点錯不了.”

      노흐시오 은 一百斤이오 통에 八十斤이오 원 봉야 온 호산이니 조곰

     도 틀니지 아니오 (13b)

여기서 (11) '嗎子'가 '호산'으로 대역되었는데, '호산'은 '胡算'으로 물건의 수효를 적는 데 쓰는 중국 특유의 부호로 치부(置簿)하는데 쓰며 '⫠、⫨、⫼、⫼、=' 등과 같은 부호다. 아가와문고『중화정음』에 '麽子'의 형태로 한 예가 나타난다.

□ 勾

(12) “邊門口老何家用老爺是勾我先老人義拜弟兄的朋友.”

     변문에 노하가 융노야라 이가 우리 션노인과 의형뎨  벗인데 (3b)

(12) '勾'는 단 한 차례 나온다. '󰠏과'로 대역되었다. 이 문헌에서 '跟'은 동사의 형태로만 나타나 분리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가와문고『중화정음』에 17회 나온다. 이 오구라문고『화음촬요』에는 아가와문고『중화정음』과 중복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도 6회 이상이나 더 쓰였다. 『화음계몽언해』에도 한 번 나오는데 '󰠏려'로 대역되어 같은 용법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이재홍·김영, 『華音啓蒙諺解』, 鮮文大學校 中韓飜譯文獻硏究所, 2002.
朴在淵·周發祥, 『你呢貴姓·學淸』, 鮮文大學校 中韓飜譯文獻硏究所, 2002.
更科愼一, 「9世紀末朝鮮の北方漢語資料『華音撮要』の硏究」, 『アジア の歷史と文化』9輯, アジア歷史·文化硏究會, 2005.
박재연, 「조선 후기 필사본 한어회화서 小倉文庫『關話畧抄』에 대하여」, 『중국어문논역총간』26집, 중국어문논역학회, 2010.
汪維輝·遠藤光曉·朴在淵·竹越孝, 『朝鮮時代漢語敎科書叢刊續編』, 中華書局, 2011.
집필자 : 박재연

이미지

장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