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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산첩(寶山帖)

장서인영 이미지 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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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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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서-서화 | 교육/문화-예술 | 자부-예술류
· 작성주체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서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無匡郭,  無界,  行字數不定,  無魚尾 ; 32.0 X 22.8 cm
· 주기사항 印: 筆下無一點塵 ; 李麟祥印
內容: 18世紀-19世紀初期 書藝家의 墨跡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7.8

안내정보

『보산첩(寶山帖)(寶山帖)』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이 설성(雪城,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부근)의 종강모루(鐘岡茅樓)에 은거하던 시기에 쓴 서첩(書帖)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은 시(詩)·서(書)·화(畵)에 두루 능했던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인화가(士人畵家)이자 문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 보산인(寶山人) 등을 사용하였다.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후손이었으나 증조부 이민계(李敏啓, 1637-1695)가 서자였으므로 서출(庶出)이라는 제약을 안고 있었다. 26세 때 북부(北部) 참봉(參奉)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43세 때 음죽현감(陰竹縣監)을 그만두기까지 18여 년간 관직에 있었지만 항시 은거의 뜻을 품고 있었다. 당대의 명망가 자제인 이윤영(李胤永, 1714-1759), 오찬(吳瓚, 1717-1751), 송문흠(宋文欽, 1710-1752), 임매(任邁, 1711-1779) 등과 교유했다. 말년에 이들과 함께 단양에 은거할 계획을 가졌으나 이루지 못했다. 문집으로는 『능호집』(凌壺集) 4권(卷) 2책(冊)이 있다. 그림은 약 60여 점이 전하고, 글씨는 첩자 형식으로 된 『능호첩』(凌壺帖), 『원령필첩』(元靈筆帖), 『이인상서화첩』(李麟祥書畵帖) 외에 약 10여 점이 전한다.
구성 및 내용
『보산첩』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본문의 제 1면부터 제 2면까지이다. 전서(篆書)로 "尸居龍見, 淵黙雷聲"이라 쓰여 있다. 『장자』(莊子) 제 11편 「재유」(在宥)에 나오는 구절을 옮긴 것인데, 무위(無爲)하면서도 그 효용이 미치지 않는 바 없는 군자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본문의 제 3면부터 제 7면까지이다. 전서로 "忽然半夜壹聲雷, 萬戶千開次第門, 若識無形含有象, 許君親見伏犧來"라고 쓰여 있다. 주희(朱熹)의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논한 원기중(袁機仲)의 글에 답하다(答袁機仲論啓蒙)」라는 시를 옮긴 것이다. 이 시는 동지날 양(陽)의 기운이 땅속에서 소생하는 것을 우레 소리에 비기고, 봄의 기운이 시작되는 상황을 일천만 문호가 열리는 것에 비겨, 주역의 복괘(復卦)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단, 『회암집(晦庵集)』 권9에는 두 번째 구의 '萬戶千開次第門'이 '萬戶千門次第開'로 되어 있고, 세 번째 구의 '形'이 '心'으로 되어 있다.
세 번째 부분은 본문의 제 9면부터 제 18면까지이다. 제 9면부터 제 13면까지는 "昆侖大無外, 旁薄下沈廣. 陰陽無停機, 寒暑互來往. 皇犧古神聖, 妙契一俯仰. 不待窺馬圖, 人文已宣朗. 渾然壹理貫, 昭晰非象. 珍重無極翁, 爲我重指手"라 쓰여 있다. 제 14면부터 제 18면까지는 "人心妙不測, 出入乘暣機. 凝氷亦焦火, 淵淪復天飛. 至人秉元化, 動靜體無違. 珠藏澤自媚, 玉韞山含輝. 神光燭九垓, 玄思徹萬微. 塵編今寥落, 歎息將安歸"라 쓰여 있다. 각각 주희의 「한가히 거하매 흥취를 느끼어(齋居感興)」 20 수 중 첫째 수와 셋째 수를 전서로 옮긴 것이다. 이 시는 위로는 천지음양의 원리를 논하고 아래로는 역사의 흥망성쇠를 논하여 주희의 사상을 총괄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그 중 여기 인용된 첫째 수는 우주론에 해당한다. 천지간에 음양(陰陽)·한서(寒暑)의 운행에는 반드시 하나의 이치[理]가 관통하여 주재함을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셋째 수는 심성론에 해당한다. 인심은 오묘하여 헤아릴 수 없고 기(氣)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하지만 지인(至人)은 조화의 이치를 꿰뚫어 어긋남이 없다고 노래한 것이다.
네 번째 부분은 본문의 제 19면부터 제 24면까지이다. 제 19면부터 제 22면까지는 "儂家近隔岳陽樓, 斑竹籬邊湘水流. 遙念故園磯下柳, 多秊虛繫釣魚舟"라 쓰여 있고, 제 23면부터 제 24면까지는 "孝 顯之際, 楚人胡克己, 漂到流離北靑, 其思鄕詩, 令人涕下, 克己乃皇明翰林也"라 쓰여 있다. 전자는 명나라 유민(遺民) 호극기(胡克己)의 시를 옮긴 것이고, 후자는 호극기가 조선에 온 내력을 소개하고 그 시에 대한 감상을 붙인 것이다. 호극기에 대해서는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뇌뇌락락서(磊磊落落書)」와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황명유민전(皇明遺民傳)」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북송시대의 성리학자 호안국(胡安國)의 후손으로, 만력 경신년(1620)에 진사가 되었는데 산동성(山東省) 등주(登州)에서 배를 타고 노닐다가 조선의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에 표류하게 된 후 함경도 지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인용된 시는 멀리 있는 강남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인데, 당대 북부지방 문인들 사이에 널리 읊어졌다고 한다.
다섯 번째 부분은 본문의 제 25면부터 제 28면까지이다. 제 25면과 제 26면은 주자의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 중 「강절선생화상찬(康節先生畵像贊)」을 해서(楷書)로 쓴 것이고, 제 27면과 제 28면은 원나라의 성리학자 오징(吳澄)이 지은 「회암화상찬(晦庵畵像讚)」을 해서로 쓴 것이다. 다만, 「회암화상찬」의 경우 원시의 1, 2구와 3, 4구의 순서를 바꿔 옮겨 놓았다. 즉 『오문정집(吳文正集)』에 실린 원시에는 "義理玄微, 蠶絲牛尾. 心胷恢廓, 海闊天高. 豪傑之才, 聖賢之學. 景星卿雲, 泰山喬岳"으로 되어 있다. 제 28면의 좌측 하단에는 낙관(落款)이 되어 있는데, "龍門餘韻, 氷壺的源 理一分殊, 折衷群言, 潮呑百川, 雷開戶, 灑落荷珠, 沛然敎雨. 雨中偶書, 正陋巷"이라는 관지(款識)와 수결(手決)이 적혀 있다.
서지적 가치
이인상의 글씨 중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서첩 형식으로 된 것이 넉 점, 그 외에 개별 작품으로 혹은 병풍 형식으로 된 것이 약 10여 점 있다. 그 중 첩자 형식으로 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원령필첩(元靈筆帖)』과 『이인상서화첩(李麟祥書畵帖)』,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소장된 『단호묵적(丹壺墨蹟)』 그리고 개인 소장의 『능호첩(凌壺帖)』 등이 있는데, 이번에 버클리대 아사미 소장의 『보산첩(寶山帖)』이 새로 공개되면서 주요한 글씨 자료가 추가되었다.
글씨 자료의 측면에서 볼 때 『보산첩』은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로 되어 있어, 이인상의 다양한 서체를 보여준다.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이윤영은 이인상의 대전(大篆)에 평하길 "봄 밭의 아름다운 백조이자 가을 숲의 외로운 꽃과 같아서 그 격조가 조선의 묵적과 매우 다르매 조금의 티끌도 붙을 수 없다(如春田鮮鷺̖ 秋林孤花, 氣韻逈異, 一塵着不得)"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평은 『보산첩』의 속표지에 있는 글귀인 '필획에 조금의 티끌도 없다(筆下無一點塵)'라는 말과 그 의미가 상통하여, 이인상 글씨에 대한 당대의 공통된 평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본문을 차례대로 살피면, 첩의 첫 장을 장식하는 「尸居龍見, 淵黙雷聲」은 자연스런 비백(飛白)의 구사와 힘 있고도 부드러운 결구 처리가 돋보인다. 또한 제 3면부터 제 18면까지의 전서 역시 개인 소장의 「전서팔곡병(篆書八曲屛)」과 함께 조형성이 강한 이인상 전서의 특징을 확인케 한다. 전서 외에도 이인상은 예서에 능했는데, 예기비(禮器碑) 등 한나라 때 비석의 글씨를 임모하여 옛 자형을 궁구하면서도 고인의 필적에 매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산첩』의 제 19면부터 제 24면까지 실린 글씨는 『이인상서화첩』에 있는 「朝飮木蘭墜露, 夕餐秋菊落英」과 더불어 그의 주요한 예서 작품으로 거론됨 직하다. 특히 이 작품의 맨 마지막에 제시된 관지에는 이인상 스스로가 후한시대 채옹(蔡邕)의 필의(筆意)를 방했다고 밝히고 있어, 그 예서의 연원을 밝히는 데 주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한편 본문의 제 2면, 제 7면, 제 26면의 좌측 하단에는 각각 백문방인(白文方印)으로 '이인상인(李麟祥印)'이라 찍혀 있다. 똑같은 도장이 본문 전편에 걸쳐 찍힌 것으로 보아 이 첩에 실린 작품들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보산첩』의 표지에는 "甲戌秊 九月日"이라 하여 제첩(制帖)의 날짜가 적혀 있으므로, 이 첩에 실린 작품은 적어도 1754년 9월경, 혹은 그 이전에 모두 제작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정확한 제작시기를 알기 위해서는, 제 24면의 관지에 등장하는 고우관(古友館)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이것이 이인상이 만년에 오갔던 서울 남산의 집과 관련된 것인 지, 설성의 종강(鐘岡)에 세운 집과 관련된 것인 지 확증할 수 없다. 다만 고우관(古友館)이란 당호는 계명대 소장 『단호묵적』의 본문 제 3면의 관지에서 언급된 바 있으므로 추후 상세한 논구를 요한다.
내용적 가치
『보산첩』은 본문 제 23면과 24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인의 글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선대 혹은 당대의 글을 필묵으로 남길 경우, 누구의 어떤 작품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생애의 어느 시기에 제작하였는지는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전자는 작가의 예술적 취향과 사상적 성향을 짐작케 하며, 후자는 그 작가의 생의 한 국면을 조명하는 데 긴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산첩』에 실린 글들은 『능호집』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던 글귀이고, 또한 이제껏 공개된 글씨에서도 인용되지 않았던 작품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또한 『보산첩』에는 명말 유민 호극기의 시가 실려 있는데, 조선시대 개인의 작품에서 호극기가 언급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 파악된다. 대명의리에 충실했던 작가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겠는데, 이인상 이후 이덕무, 성해응,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의 글에서 그에 대한 소개가 거듭 이루어지거니와 내조(來朝) 대명 유민에 대한 조선 사대부의 관심이 어떻게 진전 발전해갔는가를 가늠케 한다.
따라서 서첩 제작의 구체적 상황을 재구하고, 『보산첩』에 실린 글들 간의 유기적 관련성을 추적해보면, 이 서첩의 심층적 의미와 더불어 이인상의 사상적·학문적 지향, 이후 세대와의 영향관계를 파악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참고문헌
김수진, 「능호관 이인상의 문학과 회화에 대한 일고찰」, 『고전문학연구』26, 2004.
유홍준, 「능호관 이인상」, 『화인열전』, 역사비평사, 2001.
홍석란, 「능호관 이인상의 회화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2.
집필자 : 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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