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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결(書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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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서화 | 교육/문화-예술 | 자부-예술류
· 작성주체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2卷1冊 : 四周單邊 半郭 23.9 x 16.9 cm, 有界, 10行20字, 上2葉花紋魚尾 ; 34 X 21.7 cm
· 주기사항 識記: 大正四年(1915)七月朔素堂學人(淺見倫太郞)一讀過 
備考: 子 李令翊(1746-1780)의 書體學習을 위해 쓴 入門書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7.3

안내정보

조선후기 글씨로 유명한 이광사(李匡師)(1705-1777)가 중국 역대 서예 이론가들의 견해를 모으고 자신의 서론을 덧붙여 엮은 서예 이론 저작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광사는 왕실의 후예로 1705년(숙종 31)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李眞儉)과 파평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이다. 집안 인물들이 소론의 핵심 인물이어서 영조 등극으로 노론 정권이 들어서고 소론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을 단념하게 되었다. 1755년(영조 31) 소론 일파의 역모 사건인 ‘나주괘서(羅州掛書)사건’에 연좌되어 처음에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1762년 전라도 신지도(薪智島)로 이배되고 23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1777년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이광사는 일찍부터 출사를 단념하고 재야와 유배 생활을 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여 조선후기 정신사와 예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에게 필법을 익혔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로 이름이 높았으니, 원교체(圓嶠體)라고도 하는 특유의 필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하여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은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으로 「행서사언시(行書四言詩)」(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와 1746년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임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간송미술관 소장)와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또한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 을 비롯하여 시문을 모아 엮은 『원교집선(圓嶠集選)』, 『두남집(斗南集)』, 『동국악부(東國樂府)』 등의 저작이 있다.
『서결』은 저자가 신지도에서 유배하던 시기인 1764년과 1768년에 각기 「전편」과 「후편」이 편찬되었다. 이중 「후편」은 아들인 이영익(李令翊)에게 기록하게 하고 저자가 수정을 한 것이라 한다.
구성 및 내용
버클리 대학 소장 『서결』은 2권1책의 필사본으로 이루어졌다. ‘서결(書訣)’은 ‘서법(書法)의 비결(秘訣)’이라는 뜻으로 ‘필결(筆訣)’이라고도 한다. 표제는 ‘서결(書訣)’이며, 그 아래 ‘朝鮮李匡師著’라고 쓰여 있다. 『원교집』에 「전편(前編)」 부분만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전편」은 위부인(衛夫人)‚ 왕희지(王羲之)‚ 위관(衛瓘) 이래 당송(唐宋)의 서론(書論)을 모아 용필(用筆)과 운획(運劃)의 방법 등을 제시하였고‚ 「후편」은 아들 이영익에게 대신 쓰게 한 뒤 수정한 것으로, 자신의 경험과 전편에 미처 싣지 못한 서론을 보충하여 적었다.
「전편」에는 다음의 사항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일 앞에는 서문격인 책을 편찬하게 된 경위를 적은 글이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직필(直筆)을 써서 명필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언필(偃筆)이어서 명필이 적으며‚ 자신은 당송의 하승(下乘)을 배우다가 유배 이후 왕희지와 위관을 배워 자성하였기에 용필과 운획의 방법을 적어 아들 이영익에게 준다고 하였다. 이어서 서법과 관련된 중국 서예가들의 이론을 적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제일 처음은 위부인의 「필진도(筆陳圖)」로 시작하며, 이를 이어서 필법은 용필을 위주로 하고 용필은 근골(筋骨)을 근본으로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적고 있다. 그 외로도 ‘若初學先大書‚ 不得從小’‚ ‘善鑑者不寫‚ 善寫者不鑑’ 등 20여 조목을 적은 뒤 자신의 경험과 역대의 설을 인증하여 이러한 말의 타당함 여부를 검토하였다. 또한 천리진운(千里陣雲), 고봉추석(高峰墜石), 육단서상(陸斷犀象)‚ 백균노발(百鈞弩發)‚ 만세고등(萬歲枯藤)‚ 붕랑뢰분(崩浪雷奔)‚ 경노근절(勁弩筋節) 등의 「칠조필진출입참작도(七條筆陣出入斬斫圖)」를 예시하면서 종요(鍾繇)·위부인·왕희지 등의 필법과 운필의 방법을 기술하였다.
「후편」은 상하(上下)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편」에서는 종이와 붓의 관계‚ 서체에 따른 붓의 용법‚ 행서의 사결(四訣)‚ 영자(永字)의 필법 등을 기술하였다. 「하편」에서는 전편에 빠진 중국 육조부터 송원대까지의 서법과 우리나라의 서예사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이 중에서 송나라 고종(高宗)이 각체에 능하기는 어렵다고 하였으나 허목(許穆)은 각체에 능하였고‚ 우리나라 서예가 중에서 김생(金生)·안평대군(安平大君)·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등이 뛰어났으며 윤순(尹淳)이 동방의 누습을 씻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서예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명하였다.
서지적 가치
『서결』은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 단국대, 숙명여대, 단국대 등 국내 도서관에도 필사본과 탁본의 형태로 여러 종이 소장되어 있다. ‘서결’ 또는 ‘원교서결’이라는 제명의 단독 저작으로 전하기도 하지만, 이광사의 문집인 『원교집』 안에 「서결전편(書訣前編)」 만 따로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원교집』은 규장각을 비롯하여 장서각, 고려대 등에 전하고 있으며, 이 중 규장각본은 『한국문집총간』 221책에 영인되어 있다. 그 외로 이광사가 중국 문인들의 시문 등을 비단에 여러 서체로 쓴 것을 모아 엮은 필첩인 『원교필의(圓嶠筆意)』(규장각소장)가 있어 이광사의 필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참고할 수 있다.
버클리본은 책의 형태와 글씨, 종이 등으로 볼 때 상당히 후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표제는 ‘서결(書訣)’이며, 표제 아래 작은 글씨로 ‘조선이광사저(朝鮮李匡師著)’라 쓰여 있다. 서근(書根)에는 ‘서결단(書訣單)’이라 쓰여 있다. 1면당 10행 20자로 되어 있고‚ 본문 중에는 붉은 색으로 권점과 비점을 표시하고, 오탈자를 교정한 흔적이 있다. 책의 마지막에 같은 붉은 색 글씨로 ‘大正四年七月朔素堂學人一讀過’라 쓰여 있어서, 이 책의 소장자였던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1869-1943)가 1915년에 이 책을 읽고 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탈자 교정을 하는데 다른 저본을 참고한 것인지, 소장자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인지는 별도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이 책은 『서결』 전편과 후편이 모두 필사되어 있는 완성본이며, 소장자의 교정 기록과 독서 흔적이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사본과 대조할 가치가 충분하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식인의 독서 태도와 사유의 한 측면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내용적 가치
이광사의 『서결』은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불리웠던 조선 고유의 서체인 원교체의 형성 과정과 이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서예 원론에 대한 논의로부터 문방사우의 선별법과 같은 세부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이광사는 위부인과 왕희지의 서예 이론을 근간으로 한 가운데 당송 서예가의 이론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서결』을 기술하였는데,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 측면에 중점을 두어 자신의 서론을 전개하고 있다.
『서결』의 주장에서 주목되는 것으로는, 근골(筋骨)이 살아있는 필획과 자연스러운 결구와 장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서예 학습에서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점 등이 있다. 이는 당시 문징명·동기창 등의 당대(唐代)의 서풍(書風)이 유입되어 유미(柔媚)한 글씨가 풍미하던 조선 서단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글씨의 본질적 측면인 생동하는 필획과 자연스러운 조형을 주장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후대에 추사 김정희는 「서원교서결후(書員嶠書訣後)」를 지어 청의 서예 이론과 금석학을 토대로 이광사 서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의 이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바 있는데, 원교와 추사의 서론은 각각의 시대를 대변하는 것으로 각 이론이 처한 시대한 배경과 역할을 고려하여 그 의의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완우, 『員嶠 李匡師의 書藝』, 美術史學硏究, 1991.
문정자, 『(玉洞과 員嶠의) 동국진체 탐구』, 다운샘, 2001.
심경호 역, 『원교 이광사 문집』, 시간의 물레, 2005.
집필자 : 노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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