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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헌사궤장도(白軒賜几杖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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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G.0000.0000-20130520.TOYO_0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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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서화 | 교육/문화-예술 | 자부-예술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16張) : 彩色揷圖 , 四周單邊 36.6 cm, 12行27字 ; 24.6 X 17.3 cm
· 주기사항 書名은 表題임
敎書: 聖上卽位之十年(1670)十一月二十七日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Ⅺ-4-B-27

안내정보

1668년(헌종9)에 현종이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에게 궤(几)와 장(杖)을 하사(下賜)하는 전 과정을 그린 세 폭의 그림과 현종의 교서, 행사 참여자 명단, 서문, 경축문 등을 함께 엮은 화첩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편저자는 알 수 없으나 본 도첩의 앞부분에 보이는 세 폭의 그림은 궁중 화원의 것으로 보이며 이어지는 현종의 교서(敎書)는 남이성(南二星, 1625~1683)이 지은 것으로 확인된다. 궤장 하사의 주인공인 이경석은 인조․효종․현종의 3대에 걸쳐 관료 생활을 하였던 문인으로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후금(後金)이 사대(事大)를 요구할 때 이경석은 청의 형식적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친화(親和)를 주장한 바 있으며 병자호란 후에는 소현세자의 이사(貳師)가 되어 심양으로 갔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갈등을 겪은 조선과 청 사이의 외교문제를 잘 처리한 것으로 평가되나 명청 교체기라는 국제적 격변기에서 삼전도비문을 썼다는 사실로 인해 정치적 위상이나 역사적 평가가 폄하되기도 했다. 그러한 사실로 인해 이경석은 국가원로를 위해 기로소(耆老所)에서 베풀어지는 기로연(耆老宴) 받기를 사양하였고 74세에 자신의 집에서 궤장하사연만을 받았다.
구성 및 내용
1책의 필사본으로 구성된 본 도첩의 표제는 ‘백헌사궤장도(白軒賜几杖圖)’이다. 내제(內題)와 목차는 없고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세 폭의 그림 및 교서, 궤장 하사를 기리는 하송문(賀頌文) 등을 수록한 부분은 모두 붉은 색의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되어 있다. 항관(行款)은 12행(行)이다. 내용 면에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본 도첩 1장 ab면부터 3장 ab면까지가 첫째 부분으로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는 전 과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되어 있다. 둘째 부분은 4장부터 시작되는데, 4장 ab면은 남이성(南二星, 1625~1683)이 지은 현종의 교서(敎書), 5장 ab면은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을 적은 좌목(座目)이다. 셋째 부분은 6장부터 14장까지로, 6장 ab면은 이경석의 칠언율시(소서 포함)와 궤장을 하사받게 된 과정 및 소회, 7장부터 끝부분인 14장 a면까지는 궤장하사연 서(序)와 궤장 하사의 경위, 당대 주요 대신들이 지은 하송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경석은 1668년 11월 27일 74세의 나이에 궤장을 하사받았다. 궤와 장은 늙어서 쇠약해진 몸을 의지하고 편안히 쉬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연치와 덕이 높은 신하에게 내려지며 궤장을 하사받는 일은 국가원로에게는 극히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간혹 궤장을 받기에 하자가 있다는 여론이 있는 경우 이를 취소하기도 하여 하사의 기준이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경석의 궤장 하사는 영의정 이원익의 예를 따라 교서를 반포하고 내외에 선온한 뒤 기로소에서 기로연을 열고 일등악(一等樂)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궤장 하사에 이어지는 기로연은 이경석이 사양하여 열리지 않았고 나머지의 예는 이원익의 예대로 행하여 궤장(几杖)․선교(宣敎)․선온(宣醞)․일등사악(一等賜樂) 등이 모두 의례대로 하사되었다.
본 도첩의 앞부분에 보이는 세 폭의 그림은 궤장하사연의 절차를 상세히 보여준다. 1장 ab면의 첫 번째 그림은 궤장을 맞아들이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화면의 하단에는 궤장과 교서를 준비한 대신들을 비롯, 행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막 도착하여 대기하는 모습이, 상단은 임시무대로 활용될 뜰 안의 텅 빈 공간을 그려 놓았다. 임시무대는 마당의 평면 공간에 병풍만을 둘러놓았다. 화면 오른쪽의 임시막차는 잔치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공간을 그린 것이다.
2장 ab면의 두 번째 그림은 궤장을 받아 놓고 현종이 내린 교서를 낭독하는 장면이다. 궤장(几杖)은 도승지인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왕을 대신하여 하사하였다. 하사받은 궤는 오른쪽에, 장은 왼쪽에 놓았다. 마당의 한 가운데에 이경석이 앉아 있으며 마당의 오른쪽 하단에는 반주를 담당한 악공들과 춤을 준비한 무원(舞員)들이 준비된 모습을 묘사하였다. 뜰 바깥의 임시막차에는 행사에 참여할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3장 ab면의 세 번째 그림은 왕이 하사한 음식과 술을 받는 장면, 악공의 반주에 맞추어 추는 처용무와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마당의 가운데에서는 도승지가 연향의 주인공인 이경석에게 현종이 하사한 술을 내리고 있다. 마당의 왼쪽에는 11명의 좌석이, 오른쪽에는 3명의 좌석이 마련되어 궤장하사연에 참가한 사람이 모두 14명임이 확인된다. 오른쪽 하단에는 악공과 무원의 규모가 보이는데, 총 20명의 악인(樂人)과 무원(舞員)을 하사받았음이 확인된다.
5장 ab면의 좌목에는 내시부 상선 승전색 이엽(李燁),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정 남용익(南龍翼, 1628~1692), 승정원 주서 송광연(宋光淵, 1638~1695) 등 내시부와 승정원 관리의 명단에 이어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1602~1673), 판중추부사 정치화(鄭致和, 1609~1677), 공조판서 김좌명(金左明, 1616~1671), 의정부 우참찬 조형(趙珩, 1606~1679), 이조판서 박장원(朴長遠, 1612~1671), 예조판서 조복양(趙復陽, 1609~1671), 호조판서 민정중(閔鼎重, 1628~1692), 형조판서 서필원(徐必遠, 1614~1671), 예조참판 윤집(尹鏶, 1601~?), 예조참의 이준기(李俊耈, 1609~1676)의 명단이 보인다.
6장 ab면은 궤장하사에 대한 이경석의 소회를 적은 부분이다. 기로연(耆老宴)은 본인의 요청에 의해 열지 않기로 하였고 교서와 궤장, 술과 음식, 왕이 하사하는 음악인 사악(賜樂) 등을 받기로 한 과정이 설명되었으며 왕의 은혜가 커서 문자로 형용하기 어렵다는 소회를 적고 있다. 7면 이하에는 정태화, 정치화, 김좌명, 조형, 박장원, 조복양, 민정중, 서필원, 남용익, 송광연 등이 쓴 하송문이 수록되어 있다.
궤장을 하사할 때에는 일정한 의식 절차가 따르는데, 대개 삼공(三公), 육경(六卿), 한성판윤, 예조참판, 예조참의 등이 참여한 가운데 치러진다. 교서(敎書)를 낭독하고 궤장을 하사받은 후 의식의 뒷부분에 음악과 춤이 공연된다. 궤장을 하사 받은 이는 이후 감사의 전문(箋文)을 올리거나 그 일에 관련된 내용의 글을 주변 인물에게 의뢰하여 기록으로 남기기도 한다.
서지적 가치
백헌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는 본 『백헌사궤장도』 외에 고려대학교와 경기도 박물관 소장본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대학교 소장본과 경기도 박물관 소장본은 『백헌사궤장도』에 비해 채색이 선명하며 세 폭의 그림에 모두 제목을 붙여 놓았다. 세 폭 그림의 제목은 각각 ‘지영궤장도(祗迎几杖圖)․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내외선온도(內外宣醞圖)’로서, 지영궤장도는 궤와 장을 맞이하는 장면, 선독교서도는 왕의 교서를 낭독하는 장면, 내외선온도는 선온을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궤장 하사의 전 과정을 그림으로 그리고 관련된 인물들의 글을 한 곳에 모아 놓은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내용적 가치
『백헌사궤장도』는 17세기 왕이 궤장을 하사하는 전 과정을 상세하게 그림으로 묘사하고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과 참여자 혹은 당대 문장들이 지은 글을 함께 수록하여 궤장의 전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내용적 가치가 있다. 특히 궤장하사연의 전 과정을 여러 폭의 그림으로 묘사한 사례는 드물기 때문이다. 또 궤장을 하사하는 의례는 기로연(耆老宴)과 함께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경석의 경우 기로연을 생략하고 궤장하사연만을 행한 것을 기록한 사례라는 점에서도 특수하다.
현종이 이경석에게 내린 궤장 하사연의 그림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그 의의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17세기 후반 당시 일등 사악의 규모를 알려준다. 이경석의 궤장하사연에 내려진 사악의 규모는 악사 1인과 악공을 포함한 10인, 무원 10인이다. 성종 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제시되어 있는 일등 사악의 규모가 악사 1인, 여기(女妓) 20인, 악공 10인으로 30여명의 규모에 비한다면 크게 축소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궤장하사연에 연행되는 춤이 처용무임이 확인된다. 처용무는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벽사(辟邪)의 기능을 가진 ‘의식’으로서의 측면이 강조된 춤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행사를 마무리하는 파연악무(罷宴樂舞) 쓰이게 되는데, 그와 같은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궤장하사연은 여타 기로연에 비하여 자료가 드문 편이다. 그러나 이경석의 궤장하사연의 경우 그림을 비롯, 그와 관련된 서문 등의 자료가 남아 있어 자료적 가치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궤 하사연의 절차가 이처럼 단계적으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 그림은 없었다. 따라서 이는 미술사적인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송지원, 「현종이 이경석에게 내린 궤장하사연」, 『문헌과해석』 12, 태학사, 2000.
강혜선,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삶과 시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10, 한국한시학회, 2006.
집필자 : 송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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