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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국석남산고국사비명후기(新羅國石南山故國師碑銘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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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H.0000.0000-20090720.AS_SA_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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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금석문 | 교육/문화-예술 | 사부-금석류
· 작성주체 순백(純白, ?-?) 찬
김생(金生, 711-?) 서 역대인물바로가기
숭태(嵩太, ?-?) 각
수규(秀規, ?-?) 각
청직(淸直, ?-?) 각
· 판종 탁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張 : 22行49字 ; 172.2 X 96.6 cm
· 주기사항 識記: 顯德元年歲在甲寅(954)七月十五日立
備考: 43a와 43b는 帖裝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43

안내정보

이 탁본은 첫 행에 '신라국고양조국사교시낭공대사백월서운지탑비(新羅國故兩朝國師敎諡朗空大師白月棲雲之塔碑)'로 되어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의 음기를 탁본한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인 낭공대사(朗空大師)행적(行寂, 832-916)의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인 최인연이 짓고, 신라 명필 김생(金生)의 행서 글씨를,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하여 승려 숭태(嵩太), 수규(秀規), 청직(淸直), 혜초(惠超)가 새겼다.

상세정보

저자사항
이 탑비의 비양은 찬자가 최인연(崔仁渷)이다. 최인연은 곧 최언위(崔彦撝, 868-944)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비음을 탁본한 것으로, 비음의 찬자는 승(僧) 순백(純白)이다. 순백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낭공대사(朗空大師) 행적(行寂, 832-916)의 법손(法孫)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승(僧) 단목(端目)에 대해서는 상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각자인 승(僧) 숭태(嵩太), 승(僧) 수규(秀規), 승(僧) 청직(淸直), 승(僧) 혜초(惠超) 등에 대해서도 상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자료개관
이 탁본은 첫 행에 '신라국고양조국사교시낭공대사백월서운지탑비(新羅國故兩朝國師敎諡朗空大師白月棲雲之塔碑)'로 되어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의 음기를 탁본한 것이다. 낭공대사비는 고려광종 5년인 954년에 태자사에 세웠다.
버클리 대학에는 비양의 탁본이 3종류 소장되어 있다.
A본은 비양(碑陽)을 탁본하여 원래의 크기대로 배접한 것이다.
B본은 비양(碑陽)을 탁본하여 1행 12자씩으로 배열한 것이다.
C본은 비양(碑陽)을 탁본하여 1행 12자씩으로 배열한 것이다. 탁본 첩의 겉표지 안쪽에 '1908'의 연도 표시가 있어서, 이 탁본을 수집한 해가 1908년임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버클리 대학에는 이 탑비의 음기를 탁본한 「신라국석남산고국사비명후기(新羅國石南山故國師碑銘後記)」도 3종류 소장되어 있다.
A본은 비음(碑陰)을 탁본하여 원래의 크기대로 배접한 것이다.
B본은 비음(碑陰)을 탁본하여 1행 12자씩으로 배열한 것이다.
C본은 비음(碑陰)을 탁본하여 1행 12자씩으로 배열한 것이다.
비양 탁본의 A본과 비음 탁본의 A본은 비의 원래 크기대로 배접한 것으로, 같은 시기의 탁본인 듯하다. 그러나 비양 탁본의 B본과 비음 탁본의 B본, 비양 탁본의 C본과 비음 탁본의 C본이 각각 같은 시기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더구나 비음 탁본의 B본은 보존 상태가 나빠서 벌레 먹은 구멍이 많다. 그리고 음기의 탁본은 별도로 D본이 버클리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이 탑비는 귀부 및 이수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68호이다. 본래 태자사 터에 있던 것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비신 중앙이 절단되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낭공대사(朗空大師) 행적(行寂, 832-916)의 비로,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인 최인연이 짓고 신라 명필 김생(金生)의 행서 글씨를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하여 승려 숭태(嵩太), 수규(秀規), 청직(淸直), 혜초(惠超)가 새겼다. 이 비양의 원문은 31행에 1행 83자로 구성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낭공대사(朗空大師)가 태어나 해인사로 출가하고 사굴산문 범일의 제자가 되어 당에 건너가 석상경저(石霜慶諸)의 법을 잇고 돌아와 효공왕의 초빙도 받고 김해 호족인 김율희의 귀의도 받다가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비문은 입적한 이듬해에 지었으나 세운 것은 38년이 지난 954년이었다.
비는 일찍이 절터의 잡초에 묻혀 있었으나, 글씨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었기 때문에, 1509년(중종4) 가을에 군수인 낙서(洛西) 이항(李沆)이 이 비를 관아에 옮겨 보관하고 다음과 같은 추기를 적었다. 그 글씨는 박눌(朴訥)이 썼다.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에 관해서는,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약천집(藥泉集)』 권29에 수록된 「영남잡록(嶺南雜錄)」에 보면, 임인년 즉 1662년(현종3) 3월 초에 영천(榮川)에 도착해서 탑비를 본 기록이 나온다.
한편, 음기는 954년에 비를 세울 때 순백(純白)이 대사의 제자인 양경(讓景)과 윤정(允正)에 대해 길게 서술하고 비문 찬자인 최인연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마지막에 건립 담당 승려와 각자, 확대된 삼강직이 나온다.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新羅國石南山故國師碑銘後記」
門下法孫釋純白述」
恭維   我國大師始自出胎終於沒齒生緣眷屬觸事因緣卽門生金長老允正所修錄之門人崔大相仁滾所撰」
碑述之今白之所記者 ▨以大師於唐新羅國景明王之天祐年中化緣畢已 明王諡號銘塔仍勑崔仁滾侍郎使」
撰碑文然以世雜人猾難爲盛事是以年新月古未立碑文至後高麗國几平四郡鼎正三韓以顯德元年七月十五日樹此」
豐碑於太子山者良有良緣者乎爰有國師之門神足國主寺之僧頭乾聖院和尙者法諱讓景俗姓金氏字曰舉國爲師」
而或體或心爲王而乍耳乍目將恐芳塵風掃美跡雲消黃絹將爛翠琰弗植  師恩雀報自立龜碑和尙王父藹」
元聖王之表來孫憲康王之外庶舅淸廉聒於街路忠孝譽酣於尊卑內知執事侍郞外任浿江都護父詢禮才兼六藝」
學慣五經月下風前屬緣情體物之句春花夜月呈撫絃韻竹之聲內至執事含香外赴朔州長史和尙始自華色終於叟」
身動止言謨行蹤風格可備別錄此略言焉且   國師碑之與錄可記而未記者曰龍潭式照乾聖讓景鷰▨惠希宥」
襟允正淸龍善觀靈長玄甫石南逈閑嵩山可言太子本定右九師者    國師存日羽翼在卵未翥靑雲之際」
國師歿後角足成體始遊碧海之中  師之在時法席牛毛之數師之入滅禪座財鍾乳之多人謂之評曰九乳若鍾養」
九方之佛子一面如鏡正一國之君臣古所謂翼衆詵詵玆焉在焉其允正長老者乾聖同胎之弟也戒高持者名出有人存」
歿言行門人別錄其母氏夢任孟之日日入於寢室娠季之月月入於密窟果誕乾聖與宥襟也豈趐曇諦阿母夢二物之」
徵慧住阿孃獲二果之瑞而已哉其仁滾者辰韓茂族人也人所謂一代三崔金牓題迴曰崔致遠曰崔仁滾曰崔承祐猶」
中中人也學圍海岳加二車於五車才風雲除三步於七步實君子國之君子亦大人鄕之大人是或折桂中花扇香風」
於上國得多羅域曜景色於東鄕承 大師重席之恩撰 大師鴻碑之記白也執尺占天那終近遠傾蠡酌海豈」
度小多然則言而不當默猶不可後來君子取之捨之而已」
 顯德元年歲在甲寅七月十五日立」
      句當事僧 逈虛長老」
      刻字僧 嵩太尙座 秀規尙座 淸直師 惠超師」
      院主僧 嵩賢長老 典座僧 淸良 維那僧」
      秀宗史僧 日言 直歲僧 規言」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1984)
비문 음기의 원문을 해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국(新羅國) 석남산(石南山) 고국사비명(故國師碑銘) 후기(後記)
문하법손(門下法孫) 석순백(釋純白) 지음.
공손히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 대사께서 출태(出胎)로부터 몰치(沒齒)에 이르기까지 생연(生緣)과 권속들, 그리고 모든 촉사(觸事)에 대한 인연은 문생(門生)인 김장로(金長老) 윤정(允正)이 지은 기록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으며, 문인(門人) 최대상(崔大相)인 인연(仁渷)이 지은 비문에 서술하였으니, 지금 순백(純白)이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오직 대사께서 당신라국(唐新羅國) 경명왕(景明王) 때인 천우년중(天祐年中)에 화연(化緣)을 마치고 열반에 드셨을 때, 명왕(明王)이 시호와 탑명(塔名)을 추증하고 이어 최인연(崔仁渷) 시랑(侍郞)에게 칙명을 내려 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복잡하고 인심은 교활하여 뜻있는 일을 하기에 더욱 어려운 시대였다.
그 후 해가 바뀌고 여러 달이 지났지만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후고려(後高麗)가 사군(四郡)을 평정하고 삼한(三韓)이 정정(鼎正)됨에 이르러서 현덕(顯德) 원년(元年) 7월 15일에 태자산(太子山)에 이 큰 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국사(國師)의 문하(門下)에 제일 신족(神足)은 국주(國主)인 임금이고, 사찰(寺刹)의 승두(僧頭)는 건성원(乾聖院)의 화상이니 휘는 양경(讓景)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자는 거국(擧國)이다. 낭공대사(朗空大師)에게 경우에 따라 몸이 되고 마음이 되어 보필하였으며, 국왕(國王)의 편에 스스로 귀가 되고 눈이 되어 보국(補國)하였다. 장차 방진(芳塵)이 바람에 날아가고, 시간이 오래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아름다운 위적(偉蹟)도 구름처럼 잊혀져 빛나는 기록마저 연멸되리니, 취염(翠琰)도 세우지 않으면 대사의 법은(法恩)은 작보(雀報)만이 스스로 세워진 비가 되리라.
화상(和尙)의 왕부(王父)는 애(藹)이니, 원성왕(元聖王)의 표래손(表來孫)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장인이다. 청렴결백하여 모든 사람들의 입에 자자하였고, 충효는 높아 낮은 모든 사람들의 입으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칭송되었다. 안으로는 집사시랑(執事侍郞)을 지냈고, 밖으로는 패강(浿江) 도호(都護)를 역임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순례(詢禮)니, 재주는 육예(六藝)를 겸하였고, 학문은 오경(五經)을 관통하였다. 월하(月下)와 풍전(風前)에서 읊으면 연정체물(緣情體物)의 시구(詩句)에 속하고, 봄꽃과 달밤에는 무현(撫絃)과 운죽(韻竹)의 소리를 나타내는 풍류(風流)가 있었다. 내직(內職)으로는 집사함향(執事含香)에 이르고, 외임(外任)으로는 삭주장사(朔州長史)를 역임하였다. 화상의 젊은 시절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의 행동거지와 언모(言謨)와 행적(行蹤)과 풍격(風格) 등은 모두 별록(別錄)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국사(國師)의 비문과 어록에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것이 기록되지 아니한 것들만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용담식조(龍潭式照), 건성양경(乾聖讓景), 연▨혜희(鷰▨惠希), 유금윤정(宥襟允正), 청룡선관(淸龍善觀), 영장현보(靈長玄甫), 석남형한(石南逈閑), 숭산가언(嵩山可言), 태자본정(太子本定)이 있으니, 앞에 열거한 아홉 분의 스님은 국사가 생존시에는 날개가 알 속에 있어서 아직 청운(靑雲)의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국사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각자 나름대로의 각족(角足)이 발달하고 완전한 몸체가 이루어져 비로소 자유롭게 푸른 바다 가운데로 유희(遊戲)하게 되었다. 스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법석(法席)의 대중이 우모(牛毛)처럼 많았으나, 입멸(入滅)하신 후에는 선좌(禪座)가 겨우 종유(鍾乳)의 수에 불과(不過)하였다. 흔히 사람들이 평하기를 구유(九乳)는 종과 같아서 그 젖으로 구방(九方)의 불자(佛子)를 기르되 일면(一面)은 거울과 같다하였으니, 마치 일국(一國)의 군신(君臣)과 같은 격이라 하였다. 이른바 날개와 같은 대중이 많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것 같다. 윤정장로(允正長老)는 건성양경(乾聖讓景)과 동태(同胎)의 동생이다. 계(戒)를 고상하게 가져 이름이 뛰어났던 것과 생몰연대(生歿年代)와 언행(言行) 등은 모두 그의 문인이 따로 기록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태양이 침실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만삭이 되어 해산하려는 달에는 달이 밀굴(密窟)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니, 과연 꿈대로 건성양경(乾聖讓景)과 유금윤정(宥襟允正)을 분만하였다. 어찌 석담체(釋曇諦)의 어머니가 이물(二物)의 상징을 꿈꾸고, 혜▨(慧▨)의 아양(阿孃)이 이과(二果)의 상서를 얻은 것 뿐 이겠는가. 최인연(崔仁渷)은 진한(辰韓)의 무족(茂族) 사람이다. 이른바 일대(一代)의 삼최(三崔)가 모두 당나라에 유학하여 금방(金榜)으로 급제하고 귀국하였으니 최치원(崔致遠), 최인연(崔仁渷), 최승우(崔承祐) 등인데, 인연(仁渷)은 그 중간에 속하는 사람이다. 학문은 해악(海岳)을 두루 덮었고, 열람한 책은 오거(五車)에 이거(二車)를 더하였으며, 재주는 풍운(風雲)을 모두 맡아 칠보시(七步詩)의 재능에서 삼보(三步)를 제하였으니, 실로 군자국(君子國) 군자(君子)이며 또한 대인향(大人鄕)의 대인(大人)이라 하겠다.
이는 월계수(月桂樹)의 가지를 중화(中華)에서 꺾었고, 향풍(香風)은 상국(上國)에서 드날렸으며, 다라국(多羅國)에서 불교를 배워 동향(東鄕)인 우리나라를 빛나게 하였다. 대사의 무거운 은혜를 입었기에 스님에 대한 홍비(鴻碑)의 기록을 순백(純白)이 찬술하였으나, 마치 잣대로 하늘의 높이를 재려함과 같으니 어찌 그 가깝고 멀음을 알 수 있으며, 달팽이 껍질로 바닷물을 짐작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그 많고 적음을 헤아릴 수 있으리오. 그렇다면 말을 해도 부당하고, 또한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도 옳지 않으니, 후래(後來)의 군자(君子)들은 취하거나 버리는 것을 각자 자의(自意)에 맡길 뿐이다.
현덕원년(顯德元年) 세재갑인(歲在甲寅) 7월(七月) 15일(十五日) 세우다.
句當事僧:逈虛長老
刻字僧:嵩太尙座 秀規尙座 淸直師 惠超師
院主僧:高賢長老
典座僧:淸良
維那僧:秀宗
史 僧:日言
直歲僧:規言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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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한국역사연구회, 『譯註 羅末麗初金石文』 上下, 혜안, 1996.
李智冠,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高麗篇1), 伽山文庫, 1994.
許興植, 『韓國金石全文』 中世上, 亞細亞文化社, 1984.
劉燕庭, 『海東金石苑』 上, 亞細亞文化社, 1976.
朝鮮總督府, 『朝鮮金石總覽』 上 , 朝鮮總督府, 1919.
劉喜海, 『海東金石苑』, 亞細亞文化社, 1976.
박윤진, 「高麗初 高僧의 大師 追封」, 『韓國史學報』 14, 경인문화사, 2003.
한국 문화관광부 문화재관리청,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 http://gsm.nricp.go.kr/_third/user/main.jsp
집필자 : 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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