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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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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H.0000.0000-20090720.AS_SA_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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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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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서-금석문 | 교육/문화-예술 | 사부-금석류
· 작성주체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정사호(鄭賜湖, 1553-?) 서 역대인물바로가기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전액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탁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張 : 185.0 X 80.0 cm
· 주기사항 識記: 萬曆三十六年(1608)五月日黃海道延安竪立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41

안내정보

이 자료는 찬자는 이항복(李恒福), 서자는 정사호(鄭賜湖), 각자는 미상으로 해서(楷書)로 쓰여진 탁본(拓本) 1장의 금석문이다. 이 비는 1608년(선조 41)에 임진왜란 때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이 황해도(黃海道)연안부(延安府)에서 승전했던 사실을 기록한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로 오래되어 판독이 어렵다.

상세정보

저자사항
저자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0년 영의정이 되고,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1617년 이이첨(李爾瞻)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백사집(白沙集)』,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이 비문은 『백사집』에는 권3에 「연안이공비(延安李公碑)」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서자 정사호(鄭賜湖, 1553-?)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자는 몽여(夢輿), 호는 화곡(禾谷)이다. 아버지는 장령 정이주(鄭以周)이며, 어머니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으로 부사과 정응서(鄭應瑞)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로 있었으나 1582년 경망(輕妄)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86년 안동부사가 되었고, 1599년호조참의로 구관당상(句管堂上)을 겸직하였다. 대사헌으로서 진하사은사(進賀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철(鄭澈)의 아들 정종명(鄭宗溟)을 안성군수로 삼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조참판에 복직되었고, 곧 이조참판에 올라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대사헌·지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612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서인으로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죄가 없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군량을 관장하여 보급에 힘썼으며, 소를 올려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을 논책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는 이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가 유명하다. 청주 수락서원(壽樂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자료개관
이 비는 1608년(선조 41)에 임진왜란 때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이 황해도(黃海道) 연안부(延安府)에서 승전했던 사실을 기록한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이다. 비석이 오래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비는 황해도(黃海道) 연백군(延白郡) 용봉면(龍鳳面) 횡정리(橫井里)에 있다.
비문은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이 연안에서 왜적을 쳐부수며 선전했다는 사실, 1605년에 임금이 포상하고 1608년에는 연안사람들이 의논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기록하고, 이정암의 관직명을 자세히 적은 후, 대첩의 전말을 상세하게 밝혔다. 이정암은 동생 이정형과 함께 임진에서 적을 막다가 실패하고 연안으로 들어가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과 함께 의병 500여명을 모아 연안을 지키는데 왜장이 해주로부터 3,0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포위·공격하자 4일 동안 혈전 끝에 적병을 반 이상 사살하였다. 이에 왜적이 끝내 포위망을 풀고 도망하였다고 한다.
탁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延安 延城大捷碑
延城大捷碑(篆 題)
昔在萬曆辛卯  上謂羣臣曰日本酋秀吉塹海負隅噓喝隣邦虐始於我終圖射天夸慢自雄出不遜語其嚴諭禍福逞折姦猖毋俾再肆明年壬辰戌人」
走呼有寇大來踣釜拉萊踰嶺涉湖袒裼而蹈腹內指顧之頃遂大鞣我四境時則有若李統制舜臣以舟師拒閑山挫銳海上有若金節度時敏以孤軍嬰」
晋陽抗難南州有若李招討廷馣以義旅守延安奮忠於前有若權元帥慄以南軍鎭幸州嘬鋒於後會  天朝大將軍李提督如松提兵五萬擊破平壤聲」
生勢張互爲掎角以能復我三京再全八路  天子嘉之褒  詔賜金有差於是天下游談者咸一口言曰武夫職耳儒者迺亦爾耶後十三年乙巳  上策」
勳頒賞又後四年戊申延安人謀所以載烈埀 永者來問銘余辭不可謹按故資憲大夫知中樞府事 贈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崇政大夫議政府右賛」
成兼判義禁府事  世子貳師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月川君李公諱廷馣字仲薰故爲吏曹叅議時  主上西巡以公弟廷馨前守開城寄惠未兦」
命留鎭之廷馨乞與兄同守及臨津師潰公擇形便爲分守計以是年八月二十二日至延安府中豪傑有宋德潤趙光庭等聚徒百餘迎曰公有舊恩在本」
土乞留活我公笑曰吾今日得死所矣卽入城募得五百餘人提衡以勒之曰疇能爲我管四門鑰疇能坐甲登陴使賊不敢近壕疇管我糧餉疇繕我器械」
隨才部分訖聚礮於墩列釜於傍老幼趨事羣能着職二十八日賊酋長政刧掠載信諸郡攻陷海州以兵三千餘人與江陰之賊悉銳而來城中色駭有欲」
出陣計者公曰我旣與兵民約同死生陷民自濟所不忍也良怖甚者任自出城不汝拘也一軍咸願死守日旣吳賊進圍三匝俄有一賊帥周觀城外摩壘」
而過勢益張甚門將張應祺一箭洞胸而死賊氣死不敢輕出別於西城以飛衝下瞰城中以砲碎之則亂發火箭圍中多草屋人皆心內懼汹汹忽廻風大」
起烟㷔外靡賊計無奈何撤廬舍塡壕塹遂皷士陵城羣而蟻附之公知不可爲乃坐積芻戒其子濬曰城陷可自焚聞者感泣一力而齊致死如是者凡四」
日賊亦死傷過半是夜師熠 賊己聚死屍盡焚之翌朝乃觧圍去我軍僅斬一十八級奪牛馬九十餘匹軍糧一百三十餘石  朝廷聞公被圍上下憂危及」
捷至只言賊以某日圍城以某日觧去一無張皇語議者咸言却賊易不伐功尤難  上特加嘉善爲本道都巡察使文武將官皆聽公節制仍賞諸將以下有差公之在兵  車駕西狩龍灣隆景持重兵據松 京列營黃鳳連綴江陰危動浿南直搖關西長政猖海濱放兵四刧南路阻絶公一戰而剪其觜距賊」
喘汗自戢蒭牧不敢近公城下海西十三州皆復爲我有二南勤  王之士由牙山江華渡龍岡達  行在奔問有路漕輓無碍公之力也公慶州人與余同」
自出相善年十八陞上庠二十一明經及第少試郡邑民呼召杜及叅 銓衡世期姚宋餘事文章亦多鳴世不幸遭亂功光䟽勒辨冕中興精神汗竹秩登勳」
尊享有  元祀恩堆祖先事載
無止旣全忠孝兩有文武作人如公寔維大夫
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効節協筞扈 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領  經筵監春秋館事  世子傅鰲城府院君李恒福撰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鄭賜湖書
折衝將軍行龍驤衛上護軍知製  敎金尙容篆
萬曆三十六年五月  日
비문의 원문에 대해 해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만력(萬曆) 신묘년(선조 24, 1591년)에 왕께서 여러 신하에게 말씀하시기를 “일본의 추장 수길(秀吉)은 바다가 막혀있고 멀리 한 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믿고, 거짓으로 이웃 나라를 공갈(恐喝)하며 우리를 업수이 보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천자의 나라마저 공격하려 하는구나. 스스로 으뜸이라고 뽐내며 불손한 말을 함부로 지껄이니, 화복(禍福)의 이치로써 엄히 훈계하고 간사하고 미쳐 날뛰는 행동을 꺾어서 두 번 다시 방자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다음 해 임진(壬辰)년에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이 달려와 왜구들이 크게 쳐들어온다고 소리지르더니,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는 재를 넘고 호수를 건너 웃통을 벗어젖히고 서울에 다다르니, 손가락질하고 돌아보는 사이에 이미 우리나라의 사방을 모두 짓밟아 버렸다.
이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장군은 해군을 거느리고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을 막아 해상에서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으며, 절도사(節度使) 김시민(金時敏) 장군은 얼마 안 되는 군사로서 진양(晋陽; 지금의 진주)을 보호하여 남쪽 지방을 어려움으로부터 막아내었다. 또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공은 의롭게 500 명의 군대로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의 일부)을 지켜내어 앞에서 충성심을 떨쳤으며, 원수(元帥) 권율(權慄)장군은 남쪽의 군대를 이끌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쳐서 후방에서 적의 예봉을 꺾어 버렸다.
마침 중국에서 대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이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평양을 격파하고 서로 소리 높여 호응하니, 앞뒤로 뿔을 잡고 꼬리를 붙드는 형세를 이루어 적을 협격(挾擊)하여 우리의 삼경(三京) 을 수복하고 다시 팔로(八路; 전국 八道로 가는 길)를 온전하게 복구할 수 있었다. 중국의 천자께서 이를 가상하게 여겨 널리 포상(褒賞)하고 상금을 차등있게 하사하셨다. 이 때에 세상에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한결같이 입을 맞추어 “무부(武夫; 장수)가 할 만한 일이니, 유자(儒者; 선비)는 네가 하거라”고 할 정도였다. 그 후 13년이 지난 을사년(선조 38, 1605년)에 왕이 지난 전쟁에서의 공훈에 따라 작위를 책봉하고 상을 내렸는데, 또 4년 뒤인 무신년(선조 31, 1608년)년에 연안(延安) 사람들이 그 공적을 영원히 전하고자 하여 나에게 그 비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니 사양하였으나 피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돌아가신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賛成) 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 세자이사(世子貳師)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추증받은 월천군(月川君) 이공(李公)의 이름은 정암(廷馣)이고 자는 중훈(仲薰)이다.
이전에 공이 이조참의(吏曹叅議)의 벼슬에 있을 때에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난하셨는데, 공의 동생인 정형(廷馨)이 이전에 개성(開城)의 수령을 지내면서 백성들에게 끼친 은혜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개성에 남아 지키도록 하니, 정형(廷馨)이 형과 함께 지킬 것을 청하였다.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러 군대가 패하여 무너지자 공은 형편에 맞추어 나누어 지켜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이해 8월 22일에 연안부(延安府)에 이르니 이곳의 호걸(豪傑)인 송덕윤(宋德潤)·조광정(趙光庭) 등이 무리 백 여명을 이끌고 맞이하며 말하기를 “공이 이전에 남긴 은택(恩澤)이 아직 이곳에 남아있으니 청컨대 여기에 남아 우리들을 살려 주소서.”라 하였다. 이에 공(公)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오늘 죽을 곳을 얻었도다.”하고는 곧 성으로 들어가 군사 오백 여 명을 모을 수 있었다. 저울대를 잡고 자세히 말하기를 ”누구누구는 우리를 위하여 사방의 문을 굳게 지키고, 누구누구는 갑옷을 입고 여장(女牆) 에 올라 적들이 성의 해자(垓字)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누구누구는 우리 군량미를 책임지고, 누구누구는 병장기들을 손질하라.”고 각자의 능력과 재주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기를 마치자, 돈대(墩臺)에 돌을 쏘는 쇠뇌들을 모아 놓고 그 옆에는 솥을 늘어 두었다. 어린이와 노인들 까지도 모두 참여하여 모든 사람들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였다. 28일에 적의 두목 쿠로타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재령(載寧)과 신천(信川)의 여러 군을 겁탈하고 노략질한 다음 해주(海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거느린 군사 3,000여 명과 강음현(江陰縣; 황해도 金川郡의 일부)의 도적들을 합하여 예봉(銳鋒)을 날카로이 하여 공격해왔다.
성안에서는 놀라 실색(失色)하여 군진(軍陣)을 벗어나 도망가자는 계책을 내어놓는 이도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병사와 백성들에게 생사(生死)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백성을 사지(死地)에 빠뜨리고 스스로 빠져 나간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정말로 두려운 자들은 붙잡지 않을 터이니 마음대로 성을 나가도 좋다.”고 하니 모든 군사들이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날이 기울자 적이 몰려와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의 장수 하나가 성 바깥을 둘러보고 성채를 만져보고 지나가니 기세가 더욱 커졌다. 문장(門將) 장응기(張應祺)가 화살 하나로 가슴을 관통시켜 사살하니 적의 기세가 죽어 감히 함부로 나오지 못하였다. 따로 성의 서쪽에서 높은 충차(衝車)로 성을 내려다보며 포를 쏘아 부수고 불화살을 어지럽게 쏘니, 성안에는 초가집이 많은지라 사람들이 모두 속으로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 불꽃과 연기를 바깥으로 몰아내니 적의 계책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적이 오두막 집들을 철거하여 해자와 웅덩이를 메우고 드디어 북을 치며 성을 기어오르는데 그 무리가 개미가 달라붙은 듯하였다. 공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에 섶을 쌓아놓고는 그 위에 앉아 아들 준(濬)에게 이르기를 “성이 함락되면 스스로 불을 질러 죽겠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이들이 모두 감읍(感泣)하여 힘을 합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이와같이 하기를 4일 간이나 계속하니 적 또한 죽고 상한 자가 태반이 넘었다. 이날 밤에 적의 군대가 훤하더니, 적들이 죽은 시체를 모아 불태우고는 다음날 아침에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우리 군대가 참한 적의 수급(首級)이 열여덟이고, 빼앗은 우마(牛馬)가 90여 필이며 군량미가 130여 석이었다. 조정에서는 공이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였는데,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그 내용에 단지 몇일날 포위를 당했다가 몇일날 포위를 풀고 떠났다고만 되어 있을 뿐 장황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의논하는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물리치기는 쉬워도 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下)의 품계를 하사하고 본도(本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문무(文武)의 장관(將官)들이 모두 공의 명을 받도록 하였다. 이어 여러 장수들에게도 상을 내리되 차등이 있었다. 공이 병조(兵曹)에 있을 때에는 서쪽으로 수레를 몰아 용강(龍岡)의 바다 지역까지 살펴보았으며, 중무장한 병사들을 개성(開城)에 배치하고 황주(黃州)에서 봉산(鳳山)까지 군영(軍營)을 줄지어 설치하고 강음(江陰)에까지 이르도록 하니, 패수(浿水) 남쪽에서 적의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관서(關西)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쿠로타 나가마사(黑田長政)가 바닷가에서 미친 듯 날뛰며 군사를 놓아 사방을 노략질하니 남쪽으로 연결하는 길이 막혀버렸으나, 공이 한 번 싸워 그 예봉을 꺾어 적을 멀리 쫏아버리니, 적들이 땀 흘리고 숨차 허덕거리며 스스로 무기를 거두고 말을 먹일 뿐 감히 공이 있는 성 아래로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해서(海西; 황해도)의 13개 주(州)가 모두 다시 우리의 차지가 되었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의 왕을 모시고자 하는 군사들이 아산(牙山)과 강화(江華)를 거쳐 용강(龍岡)을 건너 왕이 계신 행재소(行在所)까지 올 수 있었다. 말 달리고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길에 가득하고, 물자를 실어나르는 배와 수레가 막힘이 없게 된 것도 모두 공의 힘이라 할 것이다.
공은 경주 사람으로 나와 본관이 같으니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21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고을의 벼슬을 살았는데, 고을 사람들이 소두(召杜) 라고 칭송하였다. 이조(吏曹)에 나아가 관리의 인선(人選)을 맡으면서부터는 세상에서 요송(姚宋)과 같은 명재상이 되리라 기대하였으며, 문장 또한 세상에 널리 떨쳤다. 불행하게도 난리를 만나 그 공적들이 빛을 잃게 되었으나, 뚜렷이 왕실을 중흥하니 그 정신(精神)은 한죽(汗竹)에 기록되고, 품계는 높아지고 으뜸가는 제사를 받으니, 은택은 조상에게까지 미쳤고 그 사적은 영원히 남을 비석에 새겨졌다. 충효(忠孝)를 모두 온전히 하였으며 문무의 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공만큼만 한다면 진실로 대장부(大丈夫)라고 할 것이다.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効節協筞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 영경연(兼 領經筵)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정사호(鄭賜湖)가 글씨를 쓰고,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 지제교(知製敎)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씀.
만력(萬曆) 36년(선조 41, 1608년) 5월 일
[번역 : 이우태 번역을 참고]
임진왜란 때 이정암은 아우 이정형(李廷馨, 1549-1607)과 함께 동궁의 명으로 초토사가 되어 황해도 일대의 주민을 이끌고 연안의 성으로 들어가 수호했다. 그 사실은 『국조보감』에 상세하게 나온다.
도요토미 나가마사(豐臣長政)는 해주․평산의 왜군들을 모아 연안을 공격했다. 어떤 이는 초토사라면 성을 수호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므로 일단 예봉을 피하는 것이 옳다고 권했다. 하지만 이정암은 말했다. “나는 경연의 자리에 참여했던 신하이거늘 군주를 행재소로 따라가지 못했다. 이제 왕세자로부터 초토의 명을 받았으므로 성 하나의 수비라도 맡아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떻게 구차하게 살려고만 하겠는가? 주민을 이끌고 성으로 들어오게 했다가 적이 왔다는 기별을 듣고 주민을 버리는 짓을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함께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마음대로 빠져 나가라.”
이정암은 노복을 시켜 섶을 쌓고 횃불을 들고 기다리게 하고는, 적이 성을 올라오거든 즉시 불을 살라서 적의 손에 더럽게 죽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종사관우준민(禹俊民)이 군중에게 거듭 약속을 밝히자 군중이 일제히 외치기를 ”대장이 죽기로 결단하는 판에 우리들이 어찌 살기를 도모하랴!” 했다. 왜적이 드디어 성을 포위했다. 그런데 왜장이 흰 깃발을 등에 지고 백마를 타고 성을 돌다가 갑자기 부는 바람에 깃발이 넘어졌다. 그러자 한 무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을 쏘아 왜장의 가슴을 꿰뚫어 죽였다. 왜적은 수천 개 조총으로 일제히 사격을 하고, 밤낮으로 공격했다. 이정암은 사람들을 시켜 경솔하게 활을 쏘지 말고 적이 성에 기어오르거든 쏘아 죽이도록 했다. 그리고 늙은이․어린이․부녀자들까지 동원해서, 문짝이나 다락을 뜯어 방패로 삼고 쌓아둔 풀을 묶어 횃불을 만들고 가마솥을 벌여 두고 물을 끓이게 했다. 적이 시초를 참호에 채우고 올라오면 이쪽에서는 횃불을 던져 태우고, 적이 긴 사다리로 성에 오르거나 판자를 지고 성을 훼손시키면 이쪽에서는 나무와 돌로 부수고 끓는 물을 퍼부었다. 또 적이 남산에다 높은 다락을 세워 판자 벽에 구멍을 내고 내려다보며 총을 쏘자, 성 안에서도 흙 담을 쌓아 막았다. 적은 밤안개를 틈타 서쪽 성으로 기어올랐는데,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가 횃불로 40여 명을 태워 죽였다. 이렇게 나흘간 공방을 하니, 적도 탄환이 떨어졌다. 성 안에서 환호하며 쇠북을 쳐 대자, 적은 시체를 모아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이정암은 군사를 출동시켜 수급을 베어 오게 했다.
이정암은 이 공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1594년(선조 27) 봄, 전라감사로 있을 때 주화를 주장하여 무고와 비난을 받았으므로 스스로를 변호하고자 했다는 이유로 지탄을 받았다. 즉, 1594년에 왜적이 심유경을 통해 강화를 청했을 때 전라감사로 있던 그는 심유경의 말에 따르기를 청했다. 당시 주화는 주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성혼은 “이정암이 절개를 지켜 의(義)에 죽을 마음이 없다면 이런 논의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이정암은 조목(趙穆)의 탄핵을 받았다. 성혼이 구제해서 중한 형벌만은 면했다.
이정암은 1600년에 죽은 뒤 1604년(선조 37)에 이르러 선무공신 2등으로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연안 현충사에 모셔졌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죽기 전에 이정암은 〈자만(自挽)〉2수를 남겼다.
첫째
효행도 충성도 모두가 무능하여 爲孝爲忠百不能
하늘의 재앙과 귀신의 앙화가 다투어 닥쳤거늘, 天殃鬼禍競相乘
헛된 이름은 누가 금관자 초미관 쓰게 했나 浮名誰使金貂貴
말로에는 그저 질병만 몸뚱이에 엉겼다. 末路都成疾病仍
나그네 베개에 누워 천일의 숙취를 깨지 못하고 羈枕未醒千日醉
여관 창 아래 등잔 심지 하나를 죄다 돋궜다. 客窓挑盡一釭燈
황천길에 무궁한 원한을 품으리니 只應泉路無窮恨
동해가 능곡으로 변함을 보지 못했기에. 不見扶桑海作陵
둘째
외모는 왜소하지만 정신은 살아 있어 形容短小只精神
육십년 세월 동안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도다. 六十年來不侫人
강물 같은 인생은 승려이면서 머리 기른 존재 流水生涯僧有髮
뜬구름 세간사는 시루에 먼지가 낀 격. 浮雲世事甑埋塵
시시비비를 예로부터 누가 정하랴 是非從古誰能定
즐거움과 기쁨도 그 자취가 진부하기만 하다. 憂樂如今跡已陳
노정이 감로사에 가깝기에 웃으며 가리키나니 笑指歸程甘露近
절 앞 강물의 달이 나의 전신이로다. 寺前江月是前身
일생을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내용이다. 그 해 9월 10일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서, 개성전포(錢浦) 밖 선영에 장사 지내졌다. 이정암은 관모에 금초 장식을 할 수 있는 고관의 직에 올랐다. 한나라 중상시 벼슬은 황금당에 매미를 붙이고 초미(貂尾)로 관모를 장식했다. 그래서 금초라고 하면 고위 관직을 상징한다. 그렇게 고관의 지위에 올랐지만, 육십 평생을 돌이켜보면 내게는 소순기(蔬筍氣)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일생 효도 충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점을 깨달았다. 마치 아득한 옛날 염제의 딸이 동해에 빠져 죽어 그 원혼이 변했다고 하는 정위처럼, 자신도 원혼으로 남으리라고 했다. 정위는 바다에 빠진 억울함을 씻으려고, 서산의 나무와 돌을 물어다가 바다에 넣어 동해를 몽땅 메우려고 했다. 이정암도 동해 바다가 능곡으로 변하여 왜구의 소굴인 저 일본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뒷날 정약용은 〈연안성을 지나며[過延安城]〉시에서 이정암을 추모했다.
연안성 고작 두 장(丈)의 높이 延安城纔二丈高
위에 망루도 없고 아래에 참호도 없었으니, 上無懸眼下無壕
바퀘에 기름칠한 수레들을 판자문으로 어찌 막나 板扉何能抵膏葦
보루에는 예전처럼 다북쑥이 나 있었었지. 土壘如今生野蒿
더구나 북산이 성을 누르고 솟아나 況復北山壓城起
마구와 외양간까지 다 셀 수 있을 정도. 細數牛囤與馬槽
그때 장수 이정암은 當時將帥李廷馣
학사라서 활과 칼에 익숙지 못했으니, 學士不閑持弓刀
화살 껴안고 문 두드린 신녀도 아니었고 抱箭叩門非神女
쌀 붓기를 물처럼 한 것은 애들 짓이었다만, 注米像水眞兒曹
왜놈 삼천이 한 날에 죽어 漆齒三千同日死
지금도 희생 잡아 혈식을 올린다네. 至今血食陳牲牢
아, 신각(申恪)의 공은 누가 알 것인가 嗚呼申恪竟誰識
성 쌓아 남에게 주어 큰 공 세우게 하고, 築城與人成勳勞
승첩보 올리고 몸은 죽어 보속받지 못했으니 捷奏身殲人莫贖
양주 들 바람이 성나 운다네. 楊州野曠風怒號
이정암의 일은 신각의 일과 비교된다. 신각은 왜란 때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휘하의 부원수로서 한강을 지키다가 패하자,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양주로 가서 병력을 규합해서 양주해유령에서 왜군을 대파했다. 그러나 한강에서 패전하고 임진에 피해 있던 김명원이 그를 무고하는 장계를 올렸으므로 참형을 당했다. 형이 집행되던 날 오후에 양주의 첩보가 도착했는데, 그 첩보를 받은 선조는 급히 선전관을 양주로 보내 형 집행을 정지하도록 했으나 선전관이 이르렀을 때는 형이 집행된 뒤였다.
이정암은 연안 대첩이 있은 뒤 장계를 올릴 때, 어느 날에 성이 포위당하고 어느 날에 적이 포위를 풀고 떠났다고만 적었다. 공적을 자랑하지 않은 것이다. 조정 신하들은 “전쟁에 이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공적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만시에서도 일생을 자랑하지 않았다. 집에는 쌀 항아리가 비어 있었고, 옷은 고작 한 벌뿐이었다.
관련 금석문
송시열(宋時烈), 「월천부원군이공신도비명 병서(月川府院君李公神道碑銘 幷序)』,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6.
참고문헌
조선총독부, 『조선금석총람』 하, 일한인쇄소인쇄, 1919.
심경호, 『내면기행』, 이가서, 2009.
집필자 : 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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