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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사법경비(五龍寺法鏡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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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H.0000.0000-20090720.AS_SA_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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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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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고서-금석문 | 교육/문화-예술 | 사부-금석류
· 작성주체 최언위(崔彦撝, 868-944)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선경(禪扃, ?-?) 서
· 판종 탁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張 : 205.5 X 112.3 cm
· 주기사항 識記: 天福九年龍集甲辰(944)五月壬申朔二十九日戊子立
備考: 33a와 同拓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3

안내정보

이 자료는 찬자는 최언위(崔彦撝), 서자는 승(僧) 선경(禪扃), 각자는 미상으로 해서(楷書)로 쓰여진 탁본(拓本) 1장의 금석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법경대사가 탄생하여 출가하여 당에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전하여 가지산문의 형미(逈微) , 성주산문의 여엄(麗嚴), 수미산문의 이엄(利嚴)과 함께 해동사무외대사로 불리며 활동하다 귀국하여 궁예도 만나고 태조를 만나 왕사의 예우를 받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상세정보

저자사항
저자 최언위(崔彦撝, 868-944)는 초명이 신지(愼之) 또는 인연(仁渷)이며,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신 및 정치가로 서예와 문장이 뛰어났다. 885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한 후, 909년에 귀국하여 집사성(執事省) 시랑(侍郞)을 지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 왕조가 서자 고려에서 935년에 원봉성대학사, 한림원령(翰林院令),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77세로 사망하자 시호와 함께 정광대부에 추증되었다. 글씨에는 「낭원대사 오진탑비」와 「법경대사자등지탑」등이 있다. 성주사의 「낭혜화상 백월 보광탑비」의 비문은 최치원이 짓고 글씨를 최언위가 썼다.
서자인 승(僧) 선경(禪扃)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항을 알 수가 없다.
자료개관
이 비문은 대개 「오룡사법경대사비(五龍寺法鏡大師碑)」라고 한다.
법경대사(法鏡大師)는 신라·고려시대의 고승(高僧)이다. 법명은 경유(慶猷, 871-921)이다. 신라시대에는 충청북도 충주시 개천산(開天山)에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였고,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7년(924)에 국사(國師)의 대우를 받았으며, 태조 24년(941)에 63세로 입적(入寂)했다. 시호(諡號)를 법경(法鏡), 탑명(塔名)을 자등(慈燈)이라 하였다.
오룡사(五龍寺)는 개성에 있는 절이다. 일제 말 개성을 답사하고 『송도의 고적』을 썼던 고유섭 박사에 따르면, 황성과 궁성 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찰만도 법왕사지, 광명사지, 일월사지, 흥국사지, 귀산사지, 안화사지, 왕륜사지 등이 있으며, 개성성 일대를 정밀하게 조사를 할 경우 더 많은 수의 사찰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오룡사는 일제 말에는 터만 남아 있었던 듯하다. 그 사찰에 있는 법경대사비는 944년에 건립된 것이다.
이 비는 고려 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것을 승려 선경(禪扃)이 해서로 써서 대사가 입적한 23년 후인 944년(혜종 원년)에 세웠다.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춘 전형적인 비 양식으로서 귀부와 이수는 새김이 뛰어난데 비신 하단부가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다. 행서로 쓴 음기 부분은 도속의 문도는 알아볼 수 있으나 추기 부분은 마모가 훨씬 심하여 판독할 수 있는 글자가 많지 않다.
비문의 내용은 법경대사가 탄생하여 출가하여 당에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전하여 가지산문의 형미(逈微), 성주산문의 여엄(麗嚴), 수미산문의 이엄(利嚴)과 함께 해동사무외대사로 불리며 활동하다 귀국하여 궁예도 만나고 태조를 만나 왕사의 예우를 받다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음기에 상좌(上座), 원주(院主), 전좌(典座), 도유(都維), 직세(直歲) 등 확대된 삼강직과 비사(碑事), 지리사(地理師) 등 비 제작을 담당한 승려가 명기되어 있고 태조와 여러 호족 그리고 최언위 등 중앙관료로 이루어진 재학제자(在學弟子)의 관위와 성명이 열거되어 있다.
탁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五龍之寺(題額)」
有晉高麗國踊巖山五龍寺故王師 敎諡法鏡大師普照慧光之塔碑銘幷序」
盖聞鷲嶺開宗標立敎無爲之化雞山入定止專心有待之風或先▨微言或始▨善▨所以別行法眼深問全軀無非解脫」
仰呈雪立之誠唯知道存方駐雲遊之志所以英靈間出法孫相承其道日新遍公天下今猶古也代有人焉」
大師法諱慶猷俗姓張氏其先南陽冠族大漢宗枝遠祖偶涉鯨波來棲兎郡以▨未生師知禮樂  聰明侍▨孔聞許▨老▨學道」
守道奉公終身從事母孟氏甞於假寐忽得禎祥驚覺之時自知有娠常修淨念便斷葷辛以咸通十二年四月十一日誕生大師生有法相夙懷菩提」
之年五行俱下子晉昇仙之歲三尅便成其後志切離塵心求坐西諮於父母▨託宗師貳親囑曰莫以因循弥招苦果師以此先是▨峯▨徹禪師」
歸寂滅冡子訓宗長老部署門徒不出松門頻經槐律此際 大師年纔十五志冠期▨所願超門閥▨▨禪扃終修▨道所以玄關開▨▨所叅遂」
令削染許於入室猶剩迎門光啓四年受於通度寺靈宗律師旣瑩戒珠言歸慧室聞一知十德成敎尊然則空谷釣魚易緣木求魚之▨▨山▨▨守株待」
兎之時所以挈甁出門飛錫遵路所冀因待朝天之使偶逢汎之時西南得朋邂 逅▨過 大師虔陳素思涉泗交流專介疑聽深信厥功奉▨▨▨▨▨▨」
遄達西津此時華亭繫舟桂苑尋徑望東林之佳境瞻北渚之樂郊仄企聞雲居道膺和尙道冠楞伽功高善逝爲寳樹之王者作禪株之主人▨▨▨▨慶猷」
逈微麗嚴利嚴共海東謂之四無畏大士也和尙曰聞言識士見面知心萬里同居千年一遇所以四賢情深避席感切開堂以後蘊素筌蹄勞口舌之契▨答」
之契暗諧目擊之符於是潛付慈燈密傳法要遂曰吾道東矣 慶猷一人起予者商於是乎在所謂廣弘佛道何論貴賤之家遐演禪宗豈▨▨▨之▨▨▨」
力何假他心閑覩此門本離文字每思心境終拂客塵愍彼偏方迷於得理好佩雲居之印期蘇日域之流是則眞宰勉旃道人勞止忘其▨▨▨▨▨▨▨▨▨」
周應忙返魯迺於天祐五年七月達于武州之會津此時兵戎滿地賊寇滔天三佛所居四郊多壘 大師來藏巖穴遠避烟塵與麋鹿同▨逢▨▨▨▨▨珠」
啣水媚當大溟映月之時玉透山輝是深洞聞風之處 先王直從北發專事南征徇地之行逃天者少特差華介先詣禪扃奉傳詔書赴軍壁也令」
大師欻聆 帝命寧滯王程及其方到柳營便邀蘭殿留連再三付囑重疊 寡人遽迴龍斾祗俯 鳳儀 大師難趂乘輿續起▨▨▨▨▨▨▨▨▨▨▨」
則曾覿藏經仍窺僧史宋武平敵覺賢遂附鳳之誠隋文省方法瓚膺從龍之愿一心重法千載同符豈期神器將傾國綱始墜君臣▨▨父子▨▨▨▨▨▨之」
兇翻剗忠貞之佐凌夷之漸實冠夏殷此時共恨獨夫潜思明主無何群兇競起是秦朝鹿死之年大憝皆銷唯漢室龍興之歲」
今上西鍾定議北極居尊懸聖日於桑津掃妖氛於棗海忽聞 大師久窺慧日曾聽玄風巨浪乘盃 中華聞道 上乃略驅車驚▨詔▨▨▨▨▨仰」
尤深量海而欽承愈地每廻稽首恭申捨瑟之儀常以鞠躬猥罄摳衣之禮所以屢祈警誡更切歸依待以 王師助君臨之吉▨其子▨▨▨▨▨▨▨▨▨▨▨▨」
太弟太匡王信便取摩納袈裟弌領鍮石鉢盂一口 上乃登時遞捧跪獻 大師然則敬佛之心尊師之道元魏奉僧祠之日人間▨▨▨之時▨▨▨▨▨▨」
如斯之盛者也然則栖遲奈苑宴坐蓮扉來者如雲納之似海稻麻有列猶如長者之園桃李成蹊亦若仙人之市貞明七年三月廿三日子▨▨▨▨▨▨▨▨▨」
仍聞刀戰之聲則是奉迎之騎示滅于日月寺法堂俗年五十有一僧臘三十有三于時天昏地裂霧黯雲愁山禽悲啼野▨▨▨▨▨▨▨▨▨▨▨▨▨▨」
懷至明年正月十九日遷▨神座於踊巖山之東峰去寺三百來步惟 大師天資志氣嶽降英靈探幽而衆妙會▨▨▨而▨▨▨▨▨▨▨▨▨▨▨▨」
四魔冠薫修於三覺起應化於眞如況又曾聽 玉音夙傳金口可謂禪山蘊美▨資▨輔之風慧水▨慈▨助 ▨王之化▨▨▨▨▨▨▨▨▨▨▨▨」
奉聖心恭承汲引之暮正受流傳之旨 上迺仍飛丹詔以慰門人曰懿彼雙峯法▨▨爲一國慈父今則▨難▨矣▨▨▨▨▨▨▨▨▨▨▨▨▨▨▨▨▨」
 
訓用報法恩正當追福之辰宜擧易名之典乃賜諡曰 法鏡塔名普照慧光申 命下臣式揚洪烈辭而不克率个成章▨▨東▨▨▨▨▨▨▨難▨▨▨」
夐莫尋荊岫之高所以聊著期文雖集慶稱之美直書其傳快非雅麗之工其詞曰」
偉矣吾龜氏堂堂到處春可畏囊中寳唯知席上珍倬哉玄敎立生我海東濱曹溪缺祖塔▨▨▨▨▨日▨▨▨▨▨▨▨▨▨▨▨▨▨▨▨▨▨▨▨」
君王重捨瑟宰輔屢書紳學徒探法要來者結良因宴坐方江目泥汗忽傷神寳月沉▨▨ ▨▨▨▨▨▨▨▨▨▨▨▨▨▨▨▨ ▨▨▨▨▨▨▨▨」
 
天福九年龍集甲辰五月壬申朔二十九日庚戌立」
  
石匠▨ ▨▨」
  
(陰記)」
 
檢校都▨▨事僧釋定▨」
 
第一座僧釋奘玄」
 
院主僧釋▨希」
 
典座僧釋神榮」
 
都維那僧釋繼希」
 
直歲僧釋虛允」
 
專知碑事僧釋湛洪」
 
專知地理事大德聦訓」
 
修道使者」
 
佐尹康守英」
 
廣評省吏王翼」
 
在學弟子官位姓名皆於後左」
神聖大王」
 
康公▨太匡 兼夫人朴氏」
 
黔弼太匡」
 
王▨太匡」
 
劉權說佐丞 兼夫人金氏」
 
王濡佐丞」
 
崔彦撝」
 
韓桂逢元甫 兼夫人黔氏」
 
鄭▨元甫」
 
韓憲閏元尹」
   
韓平侍郎」
▨▨▨▨▨▨▨▨▨▨▨▨▨▨▨▨▨▨▨▨▨▨▨▨▨▨▨▨▨▨▨▨」
▨▨」
▨▨▨▨▨▨▨▨▨▨▨▨▨▨▨▨▨▨▨▨▨▨▨▨▨▨▨▨▨▨▨▨▨▨▨▨▨▨▨ ▨▨▨▨▨▨▨▨▨▨▨▨▨▨▨▨▨伏惟」
神聖大王太▨▨▨▨▨▨▨氏別演禪宗因▨▨子曰」
故法鏡大師▨▨初祖▨▨▨▨▨▨▨▨▨▨▨▨▨之▨▨▨雨▨之▨▨▨▨護祐」
▨▨無孫▨▨佛▨▨▨▨▨▨▨七月十三日忽 詔▨▨▨▨▨▨▨▨▨▨▨▨▨」
僧當▨會▨▨▨▨▨▨僧選▨▨滿禪▨▨▨▨▨▨▨▨▨▨▨▨▨▨▨▨▨▨▨」
▨於▨山▨▨▨▨▨▨▨▨峯▨▨爲▨▨▨▨▨▨▨▨▨▨▨▨▨峯▨▨▨▨▨▨」
以▨周俻▨殘▨▨▨▨▨▨▨▨▨▨旣通▨▨▨▨▨▨▨▨▨▨▨▨▨▨▨▨▨▨▨▨▨▨▨」
東方▨▨▨▨▨▨▨▨▨▨▨ 王▨▨▨▨▨▨▨▨▨▨▨▨▨▨▨▨▨▨▨」
大王謂曰如▨▨▨▨▨嶺境▨▨居▨▨▨太▨▨入▨山晚爲如葷▨▨▨▨▨▨躬尋萬」
壑面對千巖▨石上名此山曰踊 巖号此寺以五龍禮也▨▨門▨▨名▨承 敎▨▨」
願前之▨ 聖上因思 禪化感恩▨▨▨▨▨▨▨▨之禪師▨▨▨僧大統禪大德」
允然華▨業大德▨▨▨所化▨ 鳳詔▨頒而龜文未備此▨▨▨▨▨▨▨▨▨▨▨▨▨」
大王欽仰眞宗早承玄旨▨▨▨▨▨▨豈▨▨北山於宜▨▨▨▨▨▨爾▨▨▨無窮而又僧▨▨ 詔曰▨▨▨▨▨刻之▨下▨▨▨銘▨▨▨▨▨▨▨▨地難▨」
▨▨▨▨▨▨▨▨▨▨上人與▨引▨良▨▨責▨▨▨▨▨▨▨▨▨▨▨▨▨▨▨▨▨▨▨」
▨何携州使▨▨▨▨集▨郡縣人去▨▨▨▨▨▨▨敬▨山林▨▨▨▨▨  ▨▨▨▨▨▨▨」
筒來月創得碑板龍▨▨▨▨此仍出其縣▨▨▨致▨▨▨▨▨▨▨▨▨▨▨▨▨▨▨▨▨▨▨▨▨▨」
事宜兼按▨▨ 大王稍深▨無▨▨勞▨▨▨▨▨▨▨爲▨有▨▨▨▨▨▨▨▨▨▨▨▨▨」
請長老▨▨都船司郎中▨直▨押大▨▨▨▨▨▨▨▨▨▨▨▨▨▨之法經▨▨▨▨▨其月」
十三日平早得達于▨▨大王▨▨▨▨▨▨▨▨▨▨▨▨▨▨▨▨▨▨▨▨▨▨▨▨▨▨」
▨入當▨▨卽日到碑賞▨訖此▨▨▨▨大▨▨▨▨▨可謂▨▨▨▨▨▨▨▨▨▨▨▨水之」
▨▨▨▨▨之▨▨▨然則▨▨▨▨▨▨▨▨▨▨▨▨▨▨▨▨▨名之大▨▨▨▨▨▨▨▨▨▨▨▨▨▨▨」
▨▨▨▨▨▨▨至院▨▨▨上人▨▨ 聞▨▨▨▨▨▨▨▨▨▨▨▨▨▨▨▨文▨▨▨▨▨▨▨▨▨」
▨上▨▨▨▨▨▨▨▨ ▨▨▨▨▨▨▨▨▨▨▨▨▨▨▨▨▨鳳遂▨▨▨▨▨▨▨此洪」
▨▨▨▨▨▨▨▨▨▨ ▨▨▨▨▨▨然則▨表裏▨▨▨▨▨▨▨臘▨▨▨▨▨▨▨▨▨▨▨▨▨」
▨希▨▨▨▨▨▨▨▨▨▨▨▨▨▨▨▨▨▨▨▨▨▨▨▨共作忘年之▨論▨末▨爲永代之」
▨▨▨▨有▨▨▨▨▨▨」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원문 판독은 허흥식의 고증에 의함.
비문의 원문에 대해 해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찬자(撰者)는 최언위(崔彦撝)이며, 서자(書者)는 석선경(釋禪扃)임.
오룡지사(五龍之寺)
유진(有晋) 고려국(高麗國) 용암산(踊巖山) 오룡사(五龍寺) 고(故)▨▨왕사(王師) 교시법경대사(敎謚法鏡大師) 보조혜광지탑비명(普照慧光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대개 듣건대 영취산에서 종지(宗旨)를 개창하여 무위(無爲)의 교화를 가르쳤고,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에 들어 미륵 부처님의 출세(出世)를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먼저 미묘(微妙)한 법언(法言)을 설하며, 때로는 처음부터 선행(善行)을 권장하였다. 그러므로 교외(敎外)에 따로 전한 정법안장(正法眼藏)으로 깊이 물어 본다면 모두가 해탈(解脫)아닌 것이 없다. (결락) 달마는 혜가대사(慧可大師)가 눈 속에 서서 신표(信表)로 팔을 끊어 바친 신심(信心)을 보고 오직 도(道)를 위하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확인하고서야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그로부터 뛰어난 영납(英衲)이 계속 출세(出世)하여 법손(法孫)이 상승(相承)하므로써 그 도(道)가 날로 새로워지고 천하(天下)에 두루 전파되었으니,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대대로 혜명(慧命)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대사의 법휘는 경유(慶猷)요, 속성은 장씨(張氏)이다. 그의 선조(先祖)는 남양(南陽)의 관족(冠族)이며 대한(大漢)의 종지(宗枝)였는데, 먼 조상이 우연히 경파(鯨波)를 건너 토군(兎郡)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 스님의 아버지는 슬기롭고 예악(禮樂)을 좋아하였으며, 공자(孔子)와 노자(老子)의 도를 배우고 따라 지키며 (결락) 공사(公事)를 받들어 죽을 때까지 종사하였다. 어머니는 맹씨(孟氏)니,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홀연히 상서로운 꿈을 꾸고 깨어난 후부터 스스로 임신한 것을 알고는 항상 정념(淨念)을 닦되, 악취가 나는 오신채(五辛菜)와 비린내 나는 고기 등을 일체(一切) 먹지 않았다. 함통(咸通) 12년 4월 11일에 탄생하였으니, 대사는 날 때부터 법상(法相)을 지녔고, 일찍부터 보리심(菩提心)을 품고 있었다. 之年(결락)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글을 읽음에 있어 다섯 줄씩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는 재주가 있었으며, 자진(子晉)이 신선의 도리를 찾아 떠나려는 나이에 극기(克己)하는 자제력이 강하여 삼극(三尅)을 성숙하였다. 그 후로 진세(塵世)를 여의고 출가 입산(入山)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여 부모님 앞에 꿇어 앉아 허락을 구하였다. 이친(二親)은 마지못하여 눈물을 머금고 허락하면서 "부지런히 수도(修道)하여 초지(初志)를 관철하고 인순도일(因循度日)하여 고과(苦果)를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결락) 峯 (결락) 철선사(徹禪師)가 입적하고, 그의 몽자(冡子)인 훈종장노(訓宗長老)의 문도들이 송문(松門) 밖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여러 해 동안 정진하고 있었다. 그 때 대사(大師)의 나이 겨우 15살이었다. 집을 나와 선경(禪扃)으로 찾아가 (결락) 선사를 친견하고 품은 뜻을 아뢰었다. (결락) 드디어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입실(入室)을 허락받았으니, 오히려 문 밖에서 맞아들일 뿐만 아니었다. 광계(光啓) 4년에 근도사(近度寺) 영종율사(靈宗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계율을 굳게 지켜 계주(戒珠)가 빛나고, 말은 혜실(慧室)로 돌아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듣는 재주였으며, 덕(德) 또한 교존(敎尊)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대사(大師)는 이것으로써 도(道)를 깨치려 함은 마치 공곡(空谷)에서 고기를 낚는 것이며 또한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행장(行裝)을 정돈하여 석장(錫杖)을 짚고 산문(山門)을 나와 중국으로 가는 선편(船便)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당(唐)으로 가는 조천사(朝天使)의 배에 편승(便乘)하게 되어 뜻하는 바 유학(遊學)의 목적을 이야기하였더니 (결락) 중국 땅을 딛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여 콧물과 눈물이 함께 흘렀다. 이때 화정(華亭)에 배가 정박하자 선지식이 있는 길을 찾아 동림(東林)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또한 북저(北渚)의 승지(勝地)를 지났다. 당시의 소문에 운거도응화상(雲居道膺和尙)의 도덕(道德)이 선종에서 으뜸이며, 공덕은 선서(善逝)에 못지않을 뿐만 아니라 보수(寶樹)에는 왕자(王者)가 되고, 선주(禪株)에서는 제1인자(第一人者)였다고 하였다. (결락) 경유(慶猷), 형미(逈微), 여엄(麗嚴), 이엄(利嚴) 등은 모두 도응(道膺)으로부터 법(法)을 전해 받고 귀국(歸國)하여 해동에서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라고 일컬어졌다. 운거화상이 대사를 보고 이르되, "말을 들으면 선비임을 알고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이러한 사람은 만리(萬里)가 곧 동풍(同風)이고 천년(千年)에 한 번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네 사람이 항상 그를 흠모하면서 개당(開堂)하여 경·율·론 삼장(三藏)을 가르치기도 하고, 또는 선(禪)을 지도하여 목격도존(目擊道存)의 이치를 깨닫게 하였다. 이때 운거화상이 자등(慈燈)을 부촉하고, 비밀리 법요(法要)를 전해준 다음 드디어 "나의 도(道)가 동쪽으로 흘러갔으나 경유(慶猷) 한 사람이 능히 나의 마음을 발명(發明)하였다"고 하였다. 이른바 불도를 홍포(弘布)함에 있어 어찌 가문(家門)의 귀천(貴賤)을 논할 것이며, 선종(禪宗)을 연창(演暢)함에 어찌 (결락)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빌어 한가로운 마음으로 선문(禪門)을 대할 수 있으랴. 문자(文字)를 떠나 항상 심경(心鏡)을 생각하여 객진(客塵) 번뇌를 말끔히 떨어버리고 이치를 얻은 데서 저 편방(偏方)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미매(迷昧)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운거(雲居)의 법인(法印)을 전해 받아 일역(日域)에 중흥(中興)시키려고 다짐하였으니, 이는 곧 부처님의 뜻을 따르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라 하겠다. 도인(道人)은 망상을 그치고, 그 (결락) 번다함을 잊는다. 마치 공자(孔子)가 급한 마음으로 본국인 노(魯)나라로 돌아간 것과 같이, 천우(天祐) 5년 7월 무주(武州)의 회진(會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군대가 지상에 가득하고 도적은 곳곳에 횡행하며, 삼종(三鍾)이 있는 곳에는 사방(四方)에 군벽이 많았다.
대사는 암혈(岩穴)에 은둔하여 난리를 피하되 사슴과 더불어 벗을 삼았으며, (결락) 를 만났으나, 대사가 그 산에 머무는 것이 마치 구슬을 품고 있는 물이 더욱 아름다운 것과 같았으며, 바다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았다. 옥이 있으면 산이 빛나듯 스님의 명성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선왕(先王)이 북쪽에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남정(南征) 길에 올라 스님이 계신 근처에 이르러 특별히 사신을 보내 조서(詔書)를 전달하여 자신이 있는 군벽(軍壁)으로 초빙하였다. 대사는 "청하는 조서를 받고 어찌 지체할 수 있겠는가"하고 곧 유영(柳營)에 당도하였다.
정중히 난전(蘭殿)으로 맞아 들여 계속 이곳에 머물러 줄 것을 재삼(再三) 부탁하면서, "과인(寡人)이 급히 용패(龍旆)를 돌이켜 스님을 모시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니, 대사(大師)는 수레를 타고 왕과 함께 가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였다. 속기(續起) (결락) 則. 일찍이 장경을 보고 또 고승전을 살펴보니, 송(宋)의 무제(武帝)가 적을 평정할 때 각현 삼장이 부봉(附鳳)하는 정성을 이루었고, 수(隋)의 문제(文帝)가 성방(省方)함에 법찬대사(法瓚大師)가 종용(從龍)의 성의를 다하여, 일심(一心)으로 법을 소중히 받든 것은 천재(千載)에 똑같은 이치이니, 어찌 신기(神器)만을 기약하리요. 장차 나라의 기강은 기울어지고, 비로소 군신의 의리는 무너지며, 부자(父子)의 (결락) 흉(兇) 도리어 충정(忠貞)의 보좌(補佐)는 사라지고, 국운은 점점 쇠퇴하여 실로 하은(夏殷) 때 보다 심하였다. 이러한 때에 국민들은 다 함께 독부(獨夫)임을 한탄하며, 그윽이 밝은 임금을 그리워하였건만, 사방(四方)에서 군흉(群兇)이 다투어 일어나서 천하(天下)를 다투고 있었으며, 아직은 진조(秦朝)의 녹사지년(鹿死之年)과 같았으나, 대대(大憝)한 원흉(元兇)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마치 한실(漢室)이 용흥(龍興)하던 해와 흡사했다. (결락) 지금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궁예(弓裔)를 항복받고 민심을 안정시킨 다음,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하여 왕좌(王座)에 군림하였으니, 성일(聖日)을 상진(桑津)에 높이 매어 달고, 요망한 분위기를 동해(東海)로부터 말끔히 쓸어버렸다. 대사께서는 오래도록 혜일(慧日)을 엿보았으며, 일찍이 현풍(玄風)을 듣고 작은 배를 타고 험난한 파도를 헤치면서 중화에 가서 도(道)를 배우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상(上)께서는 곧 수레를 타고 스님을 찾아뵈었으니, 앙모하는 마음은 바다보다 깊고, 흠승(欽承)하는 생각은 땅보다 넓었다. 왕이 스님을 만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사슬(捨瑟)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항상 몸을 구부려 구의(摳衣)하는 예를 다하였다. 언제나 백성을 다스리는 경훈(警訓)을 물었으며, 귀의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왕사(王師)로 대우하였으니, 이는 군림(君臨)의 길상을 도와달라는 소원 때문이다. (결락) 태제태광(太弟太匡) 왕신편(王信便)에 마납가사(摩衲袈裟) 1령(一領)과 유석발우(鍮石鉢盂) 1좌(一座)를 선사받았다.
그로부터 임금은 스님을 수시로 찾아뵙고 법문을 들었다. 그러한 즉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과 스님을 존중하는 신심(信心)이 원위(元魏) 때 임금이 불교를 신봉하는 것과 같았고 왕신(王臣)과 국민 모두가 (결락) 불자(佛子)이었던 것과 같았으니, 불교의 교세가 왕성함이 이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고 할만 하였다. 그러므로 내원(奈菀)에서 정진하며 연비(蓮扉)에서 연좌하니, 찾아오는 자가 구름과 같고, 모인 대중은 바다와 같이 많아서 도량에 도마(稻麻)처럼 열을 지었다. 마치 장자(長者)의 공원이나 도리성혜(桃李成蹊)와도 같았으며, 또한 선인(仙人)이 모인 시장 터와도 같았다. 정명(貞明) 7년 3월 23일 자시(子時)에 (결락) 그 날 문밖에서 칼싸움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으니, 이것이 바로 스님을 모시러온 사자(使者)의 말발굽 소리였다.일월사(日月寺) 법당에서 입적하시니 세속 나이는 51세요, 승랍은 33이었다. 이 때 하늘은 캄캄하고 땅은 찢어지는 듯 안개 빛은 어두웠고 구름은 수심에 잠겼으며, 산새는 슬피 울고 들짐승은 오열하였다. (결락) 懷. 다음해 1월 19일에 이르러 신좌(神座)를 용암산(踊巖山) 동쪽 봉우리로 옮겼으니, 큰 절과의 거리는 약 300보 쯤 되었다. 오직 대사의 선천적인 자질과 지기(志氣)는 산악(山岳)의 정기를 받은 영령(英靈)이었으며, 중묘(衆妙)하고 깊은 진리를 탐구하니 중묘(衆妙) 회통(會通)하고 (결락) 사마(四魔)를 조복받았다. 정각(正覺)을 훈수하여 진여(眞如)의 세계로부터 응화(應化)한 분이거든, 하물며 일찍이 옥음(玉音)을 듣고 금구(金口)의 말씀을 전하였으니, 가히 선산(禪山)에 미옥(美玉)을 쌓은 공덕으로 광보(匡輔)의 풍(風)을 도우며, 법왕(法王)의 교화를 도왔다고 할 만하였다. (결락) 삼가 성심(聖心)을 받들어 급인(汲引)의 늦음을 이어 받고 스님의 위적을 영원히 유전(流傳)하라는 교지를 받게 되었다. 왕이 단조(丹詔)를 보내 문인들을 위로하되, "위대하신 쌍봉(雙峯)스님의 법덕(法德)은 한 나라의 자부(慈父)가 되었으나, 이젠 다시 보기 어렵게 되었다. (결락) 스님의 생전에 많은 교훈을 받았으므로, 그 법은(法恩)에 보답하려 하여 명복을 빌고 추모제를 지내는 때를 당하니 마땅히 역명(易名)의 의전(儀典)을 거행하리라"하시고, 시호를 법경(法鏡), 탑명은 보조혜광(普照慧光)이라 추증하셨으며,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스님의 홍렬(洪烈)을 법답게 천양토록 하라 하시니, 아무리 사양하여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솔이(率爾)하게 비문을 지었으나, (결락) 東 (결락) 難 (결락) 와 같이 깊은 지혜를 헤아릴 수 없으며, 형수(荊岫)처럼 높은 덕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음에는 부족하지만 이 글을 지으니, 비록 포칭(褒稱)할 만한 미덕(美德)을 모아 직필로 그 전적을 썼으나, 아려(雅麗)한 문장이 못됨을 못내 아쉬워하노라.
그 덕을 찬사(讚詞)해 가로되,
위대하신 제1조 마하가섭이여!
가는 곳마다 당당하고 높았지만
낭중(囊中)에서 영출(穎出)하는 후배가 있어
만인(萬人)이 둘러앉은 석상(席上)의 보배였네.
탁월하신지라 현교(玄敎)의 주인이여!
좁고도 변방(邊方)인 해동(海東)에 태어나서
조계(曹溪)의 혜능탑을 참배하고서
(결락)
日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군왕(君王)이 정중하게 사슬례(사슬례)를 표했고,
재보(宰輔)들도 여러 차례 서신(書紳)하였다.
학도들은 모여서 법요(法要)를 탐구하고
찾아온 불자(佛子)는 모두 양인(良因)을 맺어
연좌(宴坐)하는 그 모습 아름답도다.
열반을 슬퍼하여 정신을 잃었고
밝고 밝던 보월(寶月)이 법해(法海)에 빠졌네.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천복(天福) 9년 용집 갑진 5월 임신삭(壬申朔) 29일 무자(戊子)에 세우다
석장(石匠) (결락)
【陰記】
檢校都▨▨事僧:釋定▨
第一座僧:釋獎玄
院 主 僧:釋▨希
典 座 僧:釋神榮
都維那僧:釋繼希
直歲僧:釋虛允
專知碑事僧: 釋湛洪
專知地理事:大德 聦訓
修道使者:佐尹 康守英
廣評省吏 王翼
재학제자(在學弟子)의 관위(官位)와 성명(姓名)은 다음과 같음.
神聖大王
康公▨太匡 兼夫人朴氏
黔弼太匡
王▨太匡
劉權說佐丞 兼夫人金氏
王濡佐丞
崔彦撝
韓桂逢元甫 兼夫人黔氏
鄭▨元甫
韓憲閏元尹
韓平侍郞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高麗篇1(1994)]
번역문은 이지관의 번역을 참조.
한편, 법경대사 관련 유적은 여러 곳에서 산견된다.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개천산(開天山)에 있는 정토사(淨土寺)는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로부터 국사의 예우를 받았던 법경(法鏡) 현휘(玄暉)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941년(태조 24) 여기서 입적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홍법(弘法)이 후학들을 지도했다. 그 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초에 이숭인(李崇仁)이 이 절의 풍경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문화재로는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 보물 제17호)와 법경대사자등탑, 홍법대사실상탑(弘法大師實相塔; 국보 제102호), 홍법대사실상탑비(보물 제359호)가 있다. 이 중 실상탑과 탑비는 1915년 경복궁으로 옮겨 보관했고, 자등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자등탑비는 고려태조 26년(943)에 법경대사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글은 최언위(崔彦僞)가 짓고 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구족달(仇足達)이 썼다. 비의 규모는 비신 높이 3.15m, 폭 1.42m로,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에 있던 것을 1983년에 충북충주시동량면하천리 177-1로 옮겼다.
관련 금석문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개천산(開天山) 정토사(淨土寺) 출토,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릉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참고문헌
박윤진, 「高麗初 高僧의 大師 追封」, 『韓國史學報』 14, 2003.
崔柄憲, 「羅末麗初 禪宗의 社會的 性格」, 『史學硏究』 25, 1975.
집필자 : 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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