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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철당명(龍頭寺鐵幢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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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H.0000.0000-20090720.AS_SA_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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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금석문 | 교육/문화-예술 | 사부-금석류
· 작성주체 김원(金遠, ?-?) 찬
김석(金錫, ?-?) 서
· 판종 탁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張(全紙) : 23行18字 ; 70.8 X 122.8 cm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16

안내정보

이 자료는 찬자는 김원(金遠, ?-944), 각자는 손석(孫錫)으로 해서(楷書)로 쓰여진 탁본(拓本) 1장의 금석문이다. 스스로 해서를 썼다. 「용두사지철당간명(龍頭寺址鐵幢竿銘)」이라 불러야 할 듯하다. 내용은 지역 유지인 김예종(金芮宗)이 병이 들어 당간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죽고 그 종형인 김희일(金希一)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적었다. 그리고 사(詞)에 이어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시주 명단을 열거하고 건립일을 명기하였다.

상세정보

저자사항
찬자이자 서자인 김원은 고려때 한림학생(前翰林學生)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이력이 자세하지 않다.
각자인 손석(孫錫)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항을 알 수가 없다.
한편, 본래의 당간은 김예종의 병을 구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김예종에 대해서는 죽기 전에 당대등(堂大等)으로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잘 알 수가 없다. 당대등은 고려향리 중의 최고위 직함으로, 983년에 호장(戶長)으로 바뀌었다. 한편 그리고 그가 죽은 후 당간을 실제로 완성한 그의 종형 김희일에 대해서도, 그가 역시 당대등으로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상세한 이력을 알 수가 없다. 김예종과 김희일은 청주일대의 호족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자료개관
이 명문은 대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이라고 부르지만, 「용두사지철당간명(龍頭寺址鐵幢竿銘)」이라 불러야 할 듯하다.
충청북도 청주시 남문로 2가 용두사 터에 세운 철제 당간에 새겨진 명문이다.
이 당간은 962년(고려 광종 13)에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 현재 30단 중 20단이 남아 있으며, 남은 당간 전체의 높이는 12.7m이다.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명문은 아래 셋째 단에 양각으로 새겼다. 당간의 둘레에 24줄로 새긴 글자의 크기는 2cm 정도이다.
명문의 내용은 지역 유지인 김예종이 병이 들어 당간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죽고 그 종형인 김희일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적었다. 그리고 사(詞)에 이어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시주 명단을 열거하고 건립일을 명기하였다. 시주들이 지방 유력자들로 구성되어 향리직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광종의 연호인 준풍(峻豊)을 명기하였다.
탁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龍頭寺幢竿記
      前翰林學生金遠撰兼書 鐫者孫錫」
早聆幢竿所製餝佛門之玉樓播盖由來」
粧寶殿之神旆其猶也鶴翔碧空龍躍」
下霄立之者旁發信心望之者心傾丹」
愿固知伏魔鐵杖挫賊霓旌頃有堂大」
等金芮宗者也州里豪族鄕閭冠族偶因染」
疾忽約」
佛天仰祈則敬造鐵幢俯擔則莊嚴玉刹然而」
難停逝水易沒黃泉已間數歲遲延隔時」
容易於時從兄堂大等正朝賜丹銀魚袋」
金介一等彼爲還願此繼頹繹令鑄」
成三十段之鐵筒連立六十尺之幢柱穿雲」
捧日貫霧倚空魯氏雲梯難攀龍盖甘」
寧錦纜永敞璅繩可謂奉仁心深典亡情切」
植金剛之不朽營玉刹之無窮僕者膠柱頑」
流剋舟膚物忽蒙勸我聊表短章其詞曰」
幢竿始立天半可壓巧成物像莊嚴佛法兄」
弟兩家令脩善業鑄之植之无窮永劫」
當寺令釋紬大德 檀越兼令金希一正朝金守▨」
金釋同釋希▨ 金寬謙大等監司上和尙信學▨▨」
前侍郎孫熙 前兵部卿慶柱洪大學院卿韓明」
寔柰前司倉慶 奇俊大舍學院郎中孫仁謙鑄▨▨大」
維峻豊三年太歲壬戌二月二十九日鑄成」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판독은 허흥식, 정병삼의 고증에 의함.
비문의 원문에 대해 해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두사(龍頭寺) 철당간기(鐵幢竿記)
전 한림학생(翰林學生) 김원(金遠)이 짓고 아울러 썼으며 새긴 이는 손석(孫錫)이다.
일찍이 듣건대 당간(幢竿 : 장대를 높이 세워 깃발을 매다는 것으로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기 위해 사찰이나 법당 앞에 세움)이 만들어진 바는 불문(佛門)을 꾸미는 옥같은 표지이며 번개(幡盖 : 깃발로서 불보살의 위덕을 나타내는 장엄 도구)의 유래는 법당을 장엄하는 신령스런 깃발이라 하였다. 그 모양은 학이 푸른 창공을 날아 오르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쳐 오르는 것과 같다. 세운 사람은 크게 신심(信心)을 일으키고 바라보는 사람은 반드시 충정의 정성을 기울일 것이니 진실로 마귀를 항복받는 쇠지팡이요 도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임을 알겠다.
근래에 당대등(堂大等 : 고려 향리 중의 최고위 직함. 983년에 戶長으로 바뀜) 김예종(金芮宗)이라는 이가 있으니 고을의 큰 가문이요 지방의 손꼽히는 집안이다. 우연히 병에 걸려 문득 부처와 하늘에 약속하기를, 우러러 철당간을 삼가 만들기를 빌고, 엎드려 훌륭한 사찰을 장엄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기 어렵고 죽음에 빠지기는 쉬워 그 사이에 몇 년이 늦어지고 때는 쉽게 멀어졌다. 이때에 종형인 당대등 김희일(金希一) 등이 저쪽에서 돌이킨 서원이 되게 하고 이쪽에서 끊어진 인연을 이어 마침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이어 60척의 당주(幢柱)를 세웠다.
구름을 뚫고 해를 받들고 안개를 관통하여 공중에 기대어, 노반(盧班 : 수레에 사다리를 달아 성을 공격하는 도구를 만든 사람)의 사다리로도 용개(龍盖)에 오르기 어렵고 감녕(甘寧 : 오나라 사람으로 호사를 즐겨 비단으로 배를 묶음)의 비단 밧줄로도 옥돌줄을 당하기 어렵겠다. 죽은 이를 받드는 마음이 깊고 망한 이를 일으키는 정이 간절하여, 금강의 썩지 않음을 심고 옥찰(玉刹)의 무궁함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로 말하면 교주고슬(膠柱鼓瑟)이나 하는 완고한 부류요, 각주구검(刻舟求劍)이나 하는 헛껍데기 무리이거늘, 홀연 나에게 권유하니, 짐짓 짧은 글로 표현할 따름이다.
사(詞)에 이러하다.
당간이 처음 서서 하늘 가운데를 압도하니
교묘하게 이루어진 물건의 형상이요, 장엄한 불법이로다.
형제간 두 집이, 선업을 잘 닦아서
주조하고 세우니, 영겁토록 무궁하리라.
이 절(용두사)의 영(令)은 석주(釋紬) 대덕(大德)
단월(檀越) 겸 영(令)은 김희일(金希一) 정조(正朝), 김수▨(金守▨), 김석희(金釋希) 대등(大等 : 고려 향리의 유력자 직임으로 당대등에 이은 둘째 직책. 성종 때 副戶長으로 이름이 바뀜), 김관겸(金寬謙)
감사(監司)는 상화상(上和尙) 신학(信學), ▨▨, 전시랑(前侍郎) 손희(孫熙) 대등, 전병부경(前兵部卿) 경주흥(慶柱洪) 대등, 학원경(學院卿) 한명식(韓明寔) 나말(柰末 : 나마(奈麻), 신라의 17관등의 11관등), 전사창(前司倉) 경기준(慶奇俊) 대사(大舍 : 신라 17관등의 12관등), 학원낭중(學院郎中) 손인겸(孫仁謙)
주대▨▨(鑄大▨▨)
준풍(峻豊 : 고려 광종의 연호, 960-963) 3년(962, 광종 13) 임술년 2월 29일에 주조하여 완성함.
번역문은 정병삼의 번역을 참조하되 부분적으로 수정함.
운문인 사(詞)를 보면,
幢竿始立, 天半可壓,
巧成物像, 莊嚴佛法.
兄弟兩家, 令脩善業,
鑄之植之, 无窮永劫.
이라고 하여, 4언체로 되어 있다. 또한 壓, 法, 業, 劫의 네 글자를 가지고 압운하려고 했음을 알 수가 있다. 壓은 평수운으로 보면 입성 洽운, 法도 입성 洽운이지만, 業은 입성 業 본운, 劫은 입성 葉운이다. 우리말의 [-ㅂ] 말음을 지닌 한자어를 짝수 구의 마지막에 놓았으나, 『예부운략』 이후의 평수운에 따라 압운하지는 않았다. 비록 4언체의 고시이므로 압운이 비교적 자유로웠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보아 당시 압운법이 느슨했기 때문에 유사 말음을 이용해서 압운을 모의(模擬)했으리라 짐작된다.
관련 금석문
중초사지당간지주명(中初寺址幢竿支柱銘)
참고문헌
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4.
李惠善, 「「龍頭寺鐵幢記」에 보이는 高麗初 淸州豪族」, 『湖西文化硏究』 14, 忠北大學校, 1996.
崔珍源 , 「龍頭寺幢竿說話考」, 『人文科學』 12, 성균관대학교, 1983.
집필자 : 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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