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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현왕후옥책문(孝顯王后玉冊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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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H.0000.0000-20160331.NS_0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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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금석문 | 국왕/왕실-의례 | 사부-정법류
· 작성주체 정원용(鄭元容, 1783-1873)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탁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帖(18折) : 半郭 21.1 × 14.9 cm ; 31.4 X 20.8 cm
· 주기사항 제목은 表題(題簽)에 의함
內容: 維歲次辛亥七月乙酉(1851)朔二十七日辛亥國王昇臣[?]謹再拜稽首
裝訂: 帖裝
諱紙(朱色) 附添
· 현소장처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 청구기호 韓13-43

안내정보

1851년(철종 2) 8월 헌종(憲宗)과 효현왕후(孝顯王后)를 종묘에 부묘(祔廟)하기 위해, 헌종비 효현왕후에게 '경혜정순(敬惠靖順)'이라는 휘호를 추존할 때에 올린 옥책문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옥책문은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지었다. 정원용의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이다. 정원용은 병조, 예조, 이조 판서를 거쳐 좌의정, 영의정까지 올랐다. 헌종이 승하했을 때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철종(哲宗)을 강화(江華)에서 모셔왔다.
1851년(철종 2) 헌종의 대상(大祥)이 끝난 후 헌종과 효현왕후를 함께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키로 결정했는데, 이를 위해 효현왕후에게 존호를 추숭하고 옥책문을 올렸다. 이때 추상한 존호는 '경혜정순(敬惠靖順)'이었다. 당시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에게도 함께 존호를 올렸다. 존호와 함께 받친 옥책문의 글은 경산 정원용이 지었다. 그는 많은 옥책문을 지었는데, 효현왕후의 것은 '효현왕후시호옥책문(孝顯王后諡號玉冊文)', '효현왕후추상휘호옥책문(孝顯王后追上徽號玉冊文)' 둘을 지었다. 이 옥책문들은 철종실ᄅᆂᆨ에는 실리지 않았고, 그의 문집 『경산집(經山集)』권11에 실려 있다.
구성 및 내용
이 옥책문은 총 18절(折)로 된 1첩(帖) 짜리 탁본이다. 표제는 '효현왕후옥책문(孝顯王后玉冊文)'이다. 4면부터 15면까지가 탁본이다. 탁본은 푸른 비단 배접으로 되어 있다. 첩 전체는 곳곳에 조금씩 좀이 슬었다.
세 곳에 도장이 있다. 2면의 타원형의 도장에는 '대정4년4월19일(大正四年四月十九日) 대판부립도서관(大阪府立圖書館)'이라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이 옥책문은 1915년(대정4년)에 오사카로 흘러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4면과 6면의 상단 오른쪽에도 정사각형의 큰 도장이 있으나 해독되지 않는다.
옥책문의 구성은 첫째 옥책문, 둘째 옥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매우 일반적인 구성이다. 존호를 올릴 때에는 옥간(玉簡)에 송덕문을 새겨 철한 옥책과 존호를 새긴 옥보(玉寶)를 올리는 의식을 행한다. 옥책을 만든 후에는 탁본을 해서 작첩(作帖)을 하고 맨 뒤에 옥보를 찍는다. 이 옥책문도 이런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옥책문의 내용은 경산 정원용이 지은 것이다. 1851년 6월12일에 효현왕후 옥책문제술관으로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옥보전문서사관으로 서희순(徐憙淳)이 정해졌고, 종묘(宗廟) 부향대제(祔享大祭)는 1851년 8월 6일에 행해졌다. 이 옥책문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辛亥七月乙酉朔二十七日辛亥 國王臣□(昪)謹再拜稽首 上言 伏以殷祔升侑。愴翟褕之如臨。姒徽追揚。賁鴻牒而彌顯。敢云崇報。祗切永懷。恭惟孝顯王后。京室于嬪。聖人之配。善慶毓忠貞之閥。克禀淑姿。篤仁根冲幼之齡。不資姆訓。自入宮之始而令聞令儀。居儷極之尊而能勤能儉。深愛常存於兩殿。晨昏婉愉。私恩不到於外家。夙夜儆戒。方頌琴鍾之覃化。遽驚璜瑀之閟輝。雖黃裳含章。聲言不出於中壼。而彤管紀美。歌詠尙傳於六宮。忍言已夏之巨創。奈此昊天之不吊。簾帷定策。踐先位而祗承。弓劒纏恫。紹前休而思述。縞纖之常制甫闋。俯仰曷追。璋瓚之宗禋配躋。陟降亦豫。七年懿行。式揭幽光。四字丕稱。載循彝典。敬爲端本。靖嘉贊御邦之治。惠以資生。順厚體承健之象。謹奉冊寶。追上徽號。曰敬惠靖順。伏惟冀垂昭格。尙鑑精衷。珠壠同藏。神理庶安於窮宇。金泥申闡。遺徽永耀於千秋 臣昪稽首再拜 上言
휘호를 올리게 된 효현왕후의 송덕으로는 근검하고, 대왕대비와 대비 두 어른에게 깊은 애정을 보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한 부덕을 찬양하고 있다.
이 옥책문에서 왕의 이름은 붉은색 종이로 덮어 휘하고 있다. 옥책문의 서두 부분의 □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철종의 이름 '昪 '이 쓰여 있다. 그런데 옥책문의 맨 하단에도 또 한 번 철종의 이름 '昪'이 나오는데, 여기는 붉은색 종이가 덮여 있지 않다. 본디 안한 것인지, 떨어져 나간 것인지 알 수 없다.
옥책문이 끝난 다음 페이지는 한 면이 비워져 있고, 그 다음 면 한가운데에 효현왕후께 추상한 옥보가 찍혀 있다. 이 옥보 역시 흰 종이로 덮어 놓았다.
효현왕후(1828-1843)는 24대 헌종의 비(妃)이다. 아버지는 영돈녕을 지낸 영흥부원군 김조근(金祖根, 1793-1844)이고, 어머니는 영의정에 추증된 이희선(李羲先)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10세 헌종과 혼인하여 왕비가 되고, 슬하에 자녀가 없이 16세에 승하했다. 시호는 효현(孝顯)이다. 다시 1851년(철종 2)에 경혜정순(敬惠靖順) 추상휘호를 받았는데, 그 기록이 오구라문고의 『효현왕후옥책문』이다. 다시 1853년(철종 4)에 단성(端聖), 1866년(고종 3)에 수원(粹元)의 추상존호를 받았다.
서지적 가치
이 옥책문은 현재 성암고서박물관에 한 부가 있다. 그 외 국립중앙도서관에도 한 부 있는데, 이는 1987년 일본 대판부립중지도도서관(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所藏)의 것을 복사한 것이다. 오구라문고본의 옥책문 역시 오사카 부립도서관에 있었던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조사 연도로 보아, 현재 오사카부립도서관의 것은 1853년(철종 4)의 추상존호 받을 때의 옥책문으로 보인다.
이 탁본 옥책문의 원본 옥책(玉冊)은 현재 어디 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옥책문 말미에 찍힌 옥보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이는 거북 모양의 옥보이다. 오구라문고의 옥책문과 고궁박물관의 옥보는 1851년 헌종과 함께 종묘에 부묘된 것을 기념하는 하나의 짝을 이루는 추상휘호 옥책문과 옥보라 하겠다.
내용적 가치
옥책문은 탁본이기에 오구라문고본과 성암고서박물관의 것은 같은 내용이다. 현재 2부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1부가 아닌 그 이상을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책문 제술에 대한 것은 철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이제 이 옥책문이 발굴되었고, 또 이를 제술한 정원용의 『경산집(經山集)』에 실린 옥책문도 알려졌으므로, 이것들을 토대로 원문에 대한 번역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요절한 효현왕후의 삶과 당대의 평가를 종합적으로 살펴 왕비의 삶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효현왕후가 충분히 아이를 생산할 만큼 나이가 어림에도 혼인한지 불과 2년 만에 후사를 얻기 위해 경빈(慶嬪) 김씨(金氏)를 들인 것과 관련하여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최근 연구에 의하면 1848년(헌종 14)에 통명전 내연(內宴)에서는 후궁인 경빈이 왕비와 함께 내전의 대청 동서에 각각 자리했었음이 확인되었다. 본디 후궁은 내당의 아래 내외명부가 앉는 자리에 있어야 하나 경빈은 후궁으로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왕비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를 부여받는 매우 특이한 내연의식이 되었다. 이는 당시 왕비였던 효현왕후의 삶에 대해 다시 접근할 필요성을 제기된다. 효현왕후는 사후 추상존호를 여러 번 받았다. 이에 현재 남겨진 옥책문들을 통해 왕비의 삶에 대한 재조명이 요청된다.
참고문헌
김지혜, 「세도 정치기 헌종의 궁중연향 운용-헌종의 어제 악장을 중심으로」, 『한민족문화연구』 53, 한민족문화학회, 2016.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왕실자료 해제·해설집』 1,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집필자 :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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