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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국고양조국사교시낭공대사백월서운지탑비명병서(新羅國故兩朝國師教諡朗空大師白月栖雲之塔碑銘幷序)

장서인영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H.0000.4717-20140423.TOYO_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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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금석문 | 교육/문화-예술 | 사부-금석류
· 작성주체 최인연(崔仁渷) 봉교찬자
김생(金生, 711-) 서 역대인물바로가기
단목(端目) 편
· 판종 탑본
· 발행사항 안동(安東)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折帖裝(20張) : 31.0 X 20.4 cm
· 주기사항 表題: 白月碑銘
跋: 癸酉(1813)...書...嚴啓膺
本文에 朱墨으로 점
卷首: 新羅國石南山故國師碑銘後記
印: 嚴啓膺印
吉田東伍 舊藏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Ⅺ-4-B-24

안내정보

신라 최인연(崔仁渷)(868~944)이 짓고, 고려광종 5년(954)에 승려 단목이(端目)이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신라낭공대사(朗空大師)(832~916)의 탑비명(塔碑銘) 탁본첩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낭공대사(朗空大師)(832~916)는 신라효공왕, 신덕왕 때의 국사(國師)로서 속성은 김(金), 이름은 행적(行寂)이다. 가야산(伽耶山) 해인사(海印寺)에서 불도를 닦고 871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15년 동안 수도하였고, 귀국한 뒤에는 석남산사(石南山寺) 주지로 있다가 사망했다. 최인연(崔仁渷)(868~944)은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신 최언위(崔彦撝)의 초명(初名)이다. 최치원의 종제(從弟)로서 885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하였고, 909년에 귀국하여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郎瑞書院學士)에 제수되었다. 신라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고려로 가서 관직에 나갔다. 77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광(正匡)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영(文英)이라 하였으며, 글씨에 뛰어났다. 김생(金生)(711~?)은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추중(推重)받아왔다.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품격이 담긴 글씨를 썼다. 그의 친필로 전하는 작품들이 있지만, 친필로 확정할 수 있는 글씨는 없고, 안평대군의 『비해당집고첩』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전하고 있다. 특히 승려 단목이 집자한 '백월비명'은 김생의 대표작으로 조선시대부터 수많은 서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구성 및 내용
‘백월비명(白月碑銘)’의 본래 이름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지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棲雲之塔碑)’이다.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인 낭공대사(朗空大師)의 행적을 최인연(崔仁渷)이 짓고, 김생(金生)의 글씨를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하여 954년에 세운 탑비(塔碑)이다. 비문은 31행, 매행 83자로 구성된 큰 비석이다. 비문은 입적한 다음 해에 지었으나 세운 것은 38년이 지난 954년이었다. 음기(陰記)는 954년에 비를 세울 때 승려 순백(純白)이 선사의 제자 양경(讓景)과 윤정(允正)에 대해 길게 서술하고 비문 찬자인 최인연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끝에는 탑비를 세울 때 관여한 사람들을 새겼다. 그러나 태자사가 없어지면서 이 탑비의 존재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1509년영천 군수였던 이항(李沆)이 발견하여 자민루(字民樓)로 옮겨왔다. 그리고는 그 경위를 탑비 옆면에 당시 명필 박눌(朴訥)의 글씨로 기록해 놓았다. 이렇게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백월비’는 중국과 조선의 서가(書家)들이 탁본을 뜨기 위해 찾으면서 많은 수난을 겪었고,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18년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도 국내외에 수십 종의 ‘백월비’ 탁본이 전하고 있다. 본 탁본첩 역시 그 중의 하나이다. 표제는 ‘백월비명(白月碑銘)’이라 묵서되어 있고, 절첩본 형태로 장황되어 있다. 이 ‘백월비명’은 다음과 같이 몇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첫 면 앞에는 ‘新羅國石南山故國師碑銘後記’라 묵서(墨書)되어 있고 4면에 걸쳐 ‘백월비명’ 음기(陰記)의 탁본이 실려 있다. 다만 실제 비석의 탁본을 뜬 것이 아니라, 쌍구전묵(雙鉤塡墨)의 방법으로 글자를 베낀 것이다. 더욱이 음기 전체를 문장 순서대로 베낀 게 아니라, 김생의 글씨 특징이 잘 드러난 글자만 집자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문장이 이어지지 않는다. 1면당 5행, 매행당 9~10자씩 실려 있다.
② 다음 장에는 중국양(梁)나라도홍경(陶弘景)(456~536)의 「詔問山中何所有賦詩以答」이 1면에 걸쳐 실려 있다. ‘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能持贈君’의 20자이다. 이 글씨는 17세기에 목판으로 간행된 『대동서법(大東書法)』에 실려 있는데, 일부 획에서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대동서법』에 실린 것을 쌍구가묵(雙鉤加墨)의 방법으로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③ 다음에는 ‘백월비명’의 탁본을 전재하여 장첩한 32면이 실려 있다. ‘백월비명’의 끝까지 모두 실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若忘天屬至十七日’까지 순서대로 실려 있다. 하지만 이 뒤로 3행 가량은 쌍구가묵(雙鉤加墨)으로 모사한 글자들을 집자해 놓은 것이다.
④ 끝에는 조선후기 여항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엄계응(嚴啓膺)(1737∼1816)의 발문이 붙어 있다. 끝에는 그의 인장 ‘嚴啓膺印’이 찍혀 있다. 엄계응은 본관이 영월(寧越), 자는 치수(稚受), 호는 약오(藥塢)로 서화는 물론 시에도 뛰어난 송석원시가(松石園詩社)의 일원이었다. 특히 그의 부친은 여항 서예가인 만향재(晩香齋) 엄한붕(嚴漢朋)(1685~1759)이다. 1813년 77세의 나이에 쓴 발문에는 임란 이전의 ‘백월비명’은 구할 수 없고, 임란 이후의 탁본도 선본을 구하기 어려운데, 본인이 구한 이 ‘백월비명’은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귀중한 선본(善本)이라 후손들에게 전한다고 기록하였다. 다음 면에는 발문의 초고(草稿)가 그대로 남아 있다. 초고를 쓴 다음에 깨끗한 종이에 정사해서 초고 위에 붙여둔 것이다.
서지적 가치
현전하는 '백월비명'의 탁본은 수 십 종에 이른다. 그러나 임란 이전의 탁본으로 확인 된 것은 하나도 없고, 빨라도 17세기의 것이다. 조속(趙涑)(1596~1668)의 『금석청완(金石淸玩)』이나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1693)의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에 실린 것들이 비교적 빠른 시기의 것이다. 남학명(南鶴鳴)(1654∼1722)의 것도 전하고 있는데, 이들과 비교해볼 때 엄계응이 가지고 있던 '백월비명'은 선본이라 할만하다. 특히 상당수의 탁본들이 문장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글자 상태가 좋은 곳만 탁본을 떠서 장첩하고 있는데, 엄계응의 '백월비명'은 온전하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이 이어지게 탁본을 떠서 장첩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하겠다. 더욱이 조선후기 여항시인의 한 사람인 엄계응의 발문이 남아 있어 그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내용적 가치
알려진 내용이기 때문에 별도의 내용적 가치를 논하긴 어렵다. 다만, 문장이 이어지는 비교적 초기의 탁본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점획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참고문헌
李完雨, 「統一新羅 金生의 筆蹟」,『先史와 古代』11, 韓國古代學會, 1998.12.
집필자 : 박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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