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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구려영락태왕묘비문고(古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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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H.1905.0000-20140409.TOYO_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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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금석문 | 교육/문화-예술 | 사부-금석류
· 작성주체 영희(榮禧, ?-?) 찬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905
· 형태사항 1冊(18張) : 四周雙邊 半郭 18.1 x 12.3 cm, 靑絲欄, 11行字數不定 註雙行, 無魚尾 ; 23.3 X 15.7 cm
· 주기사항 書名: 表題임
序: 光緖二十九年(1903)....榮禧...識
印: 幣原圖書
受贈記: 昭和十六年(1941)九月一日幣原坦殿惠貺
筆寫記: 明治卅八年(1905)六月六日 是日恰當擊滅波軍艦隊祝日 本間九介謹寫訂攷
朱墨으로 斷句, 本文 및 天頭에 校正記
原稿紙의 假綴本
絲欄空卷: 大板黑川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2-232

안내정보

청(淸) 말의 소봉(筱峰)영희(榮禧) (1854년경-1908년 이후)가 1903년 12월에 광개토왕릉비와 관련한 주요 사항을 고찰하고 판독문과 관련 사료를 저록한 다음, 1904년에 미진한 부분을 추기하여 완성한 책을 일본인 혼마 키유스케(本間九介)가 1905년 6월 6일에 전사(轉寫)한 것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이 책의 원저자인 영희는 1854년경에 출생하여 1908년 이후에 사망하였다(정확한 생몰년은 미상). 청나라장백부(長白府)의 만주 정백기(正白旗) 출신이다. 자는 소봉 또는 여허(如 竹+虛), 별호(別號)는 남화도인(南華道人) 또는 기저재(寄樗齋)이며, 국자감[監生] 출신이다. 1891년승덕현(承德縣) 지현(知縣)에 취임한 이래 봉천성(奉天省)의 철령현(鐵嶺縣), 안동현(安東縣), 관전현(寬甸縣) 등의 지방장관을 역임하였다. 1907년에는 후보도대(候補道臺), 신민부 연세총국(新民府 捐稅總局) 총변(總弁)에 취임하였으며, 1908년에는 일본의 풍물시를 읊은 『동영백영시초(東瀛百詠詩草)』2권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영희는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관전현의 지현에 재임하였다. 이 가운데 1903년 8월부터 1904년 1월에는 회인현(懷仁縣) 통구(通溝) 순검(巡檢)을 역임한 바 있고 「봉천성집안현고적고구려왕비문(奉天省輯安縣古跡高句麗王碑文)」을 찬술한 왕언장(王彦莊)(생몰년 미상)이 그가 관할하던 관전현 관내의 이룡도분방(二龍渡分防)의 순검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영희는 왕언장과 접촉하며 광개토왕릉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1903년 12월 6일에 이 책을 저술한 것으로 파악된다.
영희는 러일전쟁 중이던 1904년에 일본군 장교들과도 교류하였다. 당시 관전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통역관 사노 나오키(佐野直喜)로부터 세키구찌 타카마사(關口隆正)의 『일본형승총담(日本形勝總談)』을 증정받았으며, 회인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감(兵站監)오하라 사토켄(大原里賢)소좌(少佐)에게 자신이 저술한 이 책을 주었다. 일본육군 참모본부의 편찬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오하라소좌는 일본으로 귀국한 다음 이 책을 복사하여 동호인들에게 널리 반포하였다. 일본의 동양문고에 소장된 이 필사본은 바로 혼마 키유스케(本間九介)가 이때 유포된 오하라본[大原本]을 1905년 6월 6일에 필사한 것이다. 그리고 영희는 1905년에 안동현을 방문하여 세키구찌 타까마사를 만났으며, 1908년에는 세키구찌에게 이 책과 함께 『동영백영시초』를 기증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1908-1909년) 일본에서는 광개토왕릉비 탁본 구입자를 모집하기 위한 팜플렛을 간행하면서 영희의 저술을 활자본으로 인쇄하여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영희의 저술이 일본에 널리 유포되었는데, 『日韓上古史ノ裏面』(1910, 偕行社)을 저술한 니시카와 켄(西川權), 1913년에 능비를 실견한 나카노 마사이찌(中野政一)육군 소좌, 1918년 현지를 방문하여 능비를 조사한 쿠로이 타카쯔미(黑板勝美) 등도 영희의 판독문을 참조하였다. 일본에 유포된 영희의 판독문은 한국으로도 입수되었는데, 「황성신문(皇城新聞)」1909년 1월 6일자,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1-9(1909년 2월 1일 간행) 등에 간략히 언급되고 있다. 반면 중국에서는 영희의 저술이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1925년김육불(金毓黻)의 『요동문헌징략(遼東文獻徵略)』에 수록된 담국환(談國桓)의 『수찰(手札)』에서 비로소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구성 및 내용
이 책의 구성은 크게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고찰과 판독문, 관련 사료의 집록, 여러 국명·지명 및 고구려 왕명에 대한 추가 고찰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광개토왕릉비에 관한 고찰은「고구려영락태왕묘지난언(高句麗永樂太王墓碑讕言)」(이하 「난언」으로 줄임), 판독문은 「고구려영락태왕묘비문(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이하 「비문」으로 줄임)이라는 제목 아래 각기 기술되어 있다. 「난언」에는 영희가 이 책을 저술한 동기와 내력이 기술되어 있는데, 말미에 1903년(광서 29년) 12월(嘉平) 6일에 저술한 사실을 밝혔다.
영희는 「난언」의 서두에서 금석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음, 청 건국 이후 요동 동부지역에 대한 봉금정책의 시행과 해제 과정을 기술하고, 광개토왕릉비의 위치와 현황을 개관하였다. 그리고는 통구(通溝) 순검(巡檢)을 역임하였던 왕언장이 비문을 비록(備錄)하였지만 고증없이 대강을 기술하는데 그친 것이 애석하다며, 본인이 1882년(광서 8년)에 산동(山東)의 포의(布衣) 기단산(亓丹山)에게 요청하여 완벽한 탁본을 획득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여러 서적을 널리 참고하여 이 책을 저술한다고 밝혔다.
그런 다음 영희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건국연대(漢 元帝 建昭2년, 기원전 37년), 광개토왕의 즉위년인 영락원년(東晋 孝武帝 太元16년, 391년), 광개토왕의 생몰년(374-411년), 능비의 건립연대(東晋 安帝 義熙10년, 414년) 등을 논증하였다. 이 가운데 광개토왕릉을 조성했다는 갑인년 9월 29일에 대해서는 월건법(月建法)을 적용하여 능비에 나오는 ‘을유일(乙酉日)’이 아니라 ‘을미일(乙未日)’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비문의 서체에 대해서는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지만, 전체적으로 전서·예서체가 60-70%, 해서는 20-30%로서 예서의 요소가 더 많다고 파악하였다.
다음으로 「비문」에는 판독문을 수록한 다음 글자 수가 총 1,799자라고 밝혔다.
영희의 판독문은 비문 전체를 판독했으며, 현재 확인되는 글자 수 1,775자보다 많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런데 영희의 판독문을 검토해보면 판독 불능자뿐 아니라, 비문을 새기지 않은 것이 명확한 부분(1면 6행의 40-41자, 2면 9-10행 상단, 4면 1행의 1-4자)에도 글자가 있다고 상정하고 임의로 비문을 보입(補入)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영희의 판독문은 위작(僞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관련 사료를 집록한 부분에는 『후한서(後漢書)』부여전, 『진서(晋書)』부여전, 『성경통지(盛京通志)』의 주몽(朱蒙) 항목, 『통고(通考)』고구려전 등을 전재(轉載)하였다. 중국정사의 고구려전이 아니라 주로 부여전을 전재한 점이 주목되는데, 능비 서두에 나오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鄒牟王)에 대한 관심과 연관된 것으로 파악된다. 추모왕, 주몽의 남하, 홀본(忽本) 등과 관련된 사료의 상단에 능비와의 연관성을 주기(注記)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국명과 지명, 고구려 왕명을 추가로 고찰한 부분은 「우록(又錄)」이라는 제목 아래 기술하였다. 국명과 지명을 고찰한 부분 말미에는 남화도인(南華道人), 고구려 왕명을 고찰한 부분의 서두에는 기저재(寄樗齋) 등의 별호(別號)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 왕명을 고찰한 본문에 “「난언」을 작성하던 광서29년(1903년) 동계(冬季)에는 한사(韓史) 곧 한국측 사서를 획득하지 못하여 중국의 24사만 참조하여 고증(攷訂)하였으며, 그 후에 비로소 한국측 사서를 얻어 17세손의 전승을 갖추게 되었다”고 기술한 부분이 나온다. 이로 보아 말미의 「우록(又錄)」은 1903년 12월「난언」을 집필한 이후에 추기한 부분으로서 일본군 오하라소좌에게 이 책을 증정한 1904년 이전에 서술한 것으로 파악된다. 영희가 추기를 포함하여 이 책을 완성한 시점은 1904년인 것이다.
「우록」가운데 국명 부분에서는 먼저 조선의 연혁을 별도의 단락으로 기술하였디. 그리고 능비의 고유명사 가운데 비려(碑麗), 신라, 백제, 왜, 부여 등은 국명, 대방(帶方), 남소성(南蘇城), 신성(新城), 나단(那旦), 평양(平穰) 등은 지명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영락6조의 58성은 한예(韓穢) 각지로서 대반(大半)은 한반도(朝鮮)로 비정되지만, 봉황(鳳凰)이나 수암(岫巖) 등 요동지역 일대도 해당한다고 파악하였다. 고구려 왕명에 대해서는 한국측 사서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다음, 능비에 나오는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 등의 실존과 이들의 계보관계를 논증하였다.
서지적 가치
이 책은 본문과 부록을 1903년 12월 6일에 저술하고, 말미의 「우록(又錄)」을 1904년에 추기하여 완성한 것이다. 저자가 1904년에 일본군 오하라소좌, 1908년에 세키구찌에게 각각 책을 증정한 것으로 보아 일찍이 중국에서 출간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초창기 판본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된 이 필사본은 오하라소좌가 일본으로 귀국한 다음 동호인들에게 복사하여 배포한 것을 혼마 키유스케(本間九介)가 1905년(明治 38년) 6월 6일에 필사한 것이다. 혼마는 오사카 쿠로카와사(大板黑川社)에서 생산한 양면 괘지(罫紙)에 필사하였는데, 괘지의 길이는 약 23.5cm, 너비는 15.5cm이며, 각 면마다 11칸의 괘선이 파란색으로 그어져 있다. 표지 왼쪽에 ‘古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攷’라는 서명을 1줄로 종서(縱書)한 다음 안쪽 면은 공백으로 남겨둔 채, 「난언」 8쪽, 「비문」 12쪽, 사료 집록 부분 10쪽, 「우록」부분 6쪽 등 총 36쪽으로 필사하였다.
가장 말미에는 “明治卅八年六月六日. 是日恰當擊滅波軍艦隊祝日. 本間九介 謹寫訂攷.”라고 하여 메이지 38년 6월 6일이라는 필사 일자, 이날이 폴란드군 함대를 격파한 경축일에 해당한다는 사실, ‘혼마 키유스케(本間九介)’라는 필사자의 이름 등을 명기하였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의 ‘정고(訂攷)’는 원전을 일부 수정하였다는 뜻인데, 본문 속에서 이를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표지 안쪽 면에는 이 필사본의 원소장자였던 데하라 타이라(幣原坦)가 1941년(昭和 16년) 9월 1일에 동양문고에 기증[惠貺]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 필사본은 현재까지 확인된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영희의 부주(附注)와 추기까지 충실하게 필사하였다는 점에서 서지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진희(李進熙)의 『廣開土王陵碑の硏究』(吉川弘文館, 1972) 자료편에 이 필사본의 「난언」부분이 게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는 이 필사본 이외에도 1908년과 1909년에 간행된 활자본이 큐슈대학(九州大學) 도서관과 토쿄대학(東京大學) 동양문화연구소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미즈타니 데이지로(水谷悌二郞)가 소장했던 판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유인본(油印本)인데, 간행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반면 영희의 저서가 거의 유포되지 않았던 중국에서의 소장 상황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내용적 가치
이 책은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가장 초창기 저술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의 본문에 해당하는 「난언」에는 능비 탁본 및 초창기 연구와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고, 「비문」에는 위작(僞作)이 포함되어 있지만 비문에 대한 초창기 판독 현황을 잘 전해 준다.
영희는 「난언」에서 회인현의 통구 순검을 지냈던 왕언장이 능비의 비문을 비록(備錄)한 사실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왕언장이 1902-1903년경에 저술한 『봉천성집안고적고구려왕비문(奉天省輯安古跡高句麗王碑文)』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영희는 왕언장의 비문이 대강만을 언급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1882년에 산동 포의 기단산에게 요청하여 획득한 완벽한 탁본을 바탕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밝혔다. 영희의 언급대로 1882년에 완벽한 탁본을 제작하였다면 능비의 발견 및 탁본 경위와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1881-1883년경에 제작된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인 반조음본(潘祖蔭本)이나 사카와본(酒匂本)에 이미 판독불능자로 보이는 공백이 많이 보인다는 점에서 영희가 비문의 전체 글자를 완벽하게 판독할 수 있는 탁본을 획득하였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영희는 왕언장이 비문의 대강만을 언급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하였지만, 왕언장도 영희처럼 비문의 총 글자 수를 1,799자로 파악하였으며, 양자의 판독문을 대비해보면 거의 동일하다. 영희의 판독문은 1882년에 획득한 완벽한 탁본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왕언장의 판독문을 전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1896년에 사망한 양동계(楊同桂)가 저술한 『심고(瀋故)』에는 「고려묘비(高麗墓碑)」라는 제하의 판독문이 실려 있는데, 왕언장이나 영희의 판독문과 거의 동일하다(다만 양동계는 위작 부분을 작은 글씨로 기술하여 다른 판독문과 구별하였음). 이로 보아 영희의 판독문과 동일한 능비 판독문은 1896년 이전부터 이미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동계, 왕언장, 영희로 이어지는 판독문은 위작을 포함하고 있지만, 3면의 행수를 14행으로 파악한 사실이 주목된다. 1881-1883년경의 묵수곽전본이나 1900년 이후에 제작된 석회탁본은 3면의 행수를 제1행을 제외한 13행으로 파악하고 있다. 3면 제1행의 존재는 1909년에 간행된 나진옥(羅振玉)이나 양수경(楊守敬)의 판독문에서부터 확인되고 있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그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희를 비롯한 양동계, 왕언장 등의 저술은 초창기 판독 현황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며, 이들이 어떻게 3면 제1행의 존재를 확인했는지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만 영희처럼 각 행마다 41자를 새긴 것으로 상정한다면 능비의 행수는 총 44행이므로 1,804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영희는 능비의 글자 수가 1,804자보다 5자 적은 1,799자로 파악했는데,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더욱이 영희가 제시한 판독문의 실제 글자 수는 1,799자보다 4자 적은 1,995자인데, 비문에 존재하는 글자를 판독하지 않고 누락한 것이 9자(7행에서 확인됨)에 이른다. 이러한 오류는 양동계나 왕언장의 판독문에서도 확인되는데, 영희가 양동계 이래의 판독문을 전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참고문헌
談國桓, 『手札』, 金毓黻, 1925.
朴時亨,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李進熙, 『廣開土王陵碑の硏究』, 吉川弘文館, 1972.
水谷悌二郞, 『好太王碑考』, 開明書院 (原載 1959 『書品』 100號), 1977.
王健群,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984.
徐建新, 『好太王碑拓本の硏究』, 東京堂出版, 2006.
武田幸男, 『廣開土王碑との對話』, 白帝社, 2007.
집필자 : 여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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