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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일기(湖西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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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일기 | 개인-생활-일기 | 사부-잡사류
· 작성주체 윤동섬(尹東暹, 1710-1795)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4冊 : 無匡郭, 無界, 11行20字, 無魚尾 ; 29.6 X 20.2 cm
· 주기사항 內容: 1754年-1772年의 日記
存本: 1·3·8·10冊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15.12

안내정보

18세기의 문신 학자인 윤동섬이 관직에 있으면서 쓴 일기로 연행 기록이 주목되는데, 애초 10책으로 편집되었지만 지금 4책만 남아 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호서일기』의 저자인 윤동섬(尹東暹)(1710-1795)은 18세기의 대표적 경화세족인 파평윤씨 출신의 문신이다. 또한 학자이고 문인이며, 서예가이자 화가이기도 하다. 자는 덕승(德升), 호는 팔무당(八無堂)이다. 윤해거(尹海擧)의 증손, 윤부(尹扶)의 손자, 윤언교(尹彦敎)의 아들로 좌의정을 역임한 이경억(李慶億)의 아들인 노포(老圃)이인소(李寅熽)(1637-1698)의 외손자이다. 윤현교(尹顯敎)에게 출계하였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에 급제하여 현감 등 지방관을 지내다가, 45세이던 1754년(영조 30)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도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와 대사헌·한성판윤·이조판서, 의정부 참찬을 역임하고 판중추부사로 치사하였다. 1771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서예와 그림에 뛰어났고, 금석문을 비롯한 서화의 수장가로 저명하였다. 그의 금석문 작품은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윤동섬의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과 리움박물관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윤동섬과 동방(同榜) 급제자는 홍낙명(洪樂命), 서명응, 이복원, 김시구(金蓍耈), 윤시동, 신경준(申景濬) 등이다. 일기의 처음을 문과 급제 소식으로 시작하는 만큼 윤동섬에게는 중대한 일이었음이 물론이지만, 동방 급제자들 면면 역시 당대에 손꼽히는 인재들이었다. 특히 서명응과는 당색도 소론으로 같았지만,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구성 및 내용
윤동섬이 남긴 일기의 이름을 『호서일기』로 한 것은 잘못이다. 지금 남아 있는 책의 표제를 그대로 따라서, 『일기』라고만 하는 쪽이 옳을 듯하다.
조선조의 문인 학자들은 관직에 재직하는 동안 일기를 남겼다. 『호서일기』라는 제목은 호서 곧 충청도에 지방관으로 재직한 사람이 그 재직 기간에 쓴 일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실제로 윤동섬은 1761년 10월 7일부터 1762년 8월 23일까지 충청감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동섬의 일기는 저자가 문과에 급제한 1754년 4월 27일부터 평안감사로 재직 중이던 1772년 12월 17일까지 18년여의 기록이다. 45세부터 63세까지다. 현재 남아 있는 윤동섬의 일기는 제1, 3, 8, 10의 4책인데, 그 가운데 제3책만 표제가 『호서일기』이고, 나머지 제1, 8, 10책의 표제는 『일기』로 되어 있다. 제3책은 대부분 충청감사로 재직 중일 때의 기록이다. 윤동섬의 『일기』는 제1책의 하단에 “공십(共十)”(모두 10책 한 질)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애초의 일기가 10책에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조 즉위 이후에 더 중요한 관직을 수행한 바, 1791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윤동섬의 『일기』 4책의 기록 시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책은 『일기 일(一)』이라는 표제의 오른편 상단에 “갑술, 을해, 병자, 정축, 무인”이라고 쓰여 있는 바, 1754년 4월부터 1758년 연말까지 5년간의 기록이다. 제3책은 『호서일기 삼(三)』이라는 표제의 오른편 상단에 “신사 하, 임오, 계미”라고 쓰여 있는 바, 1761년 10월 7일 충청감사에 임명되는 것으로 시작돼서 1763년 연말에 끝난다. 지금 행방을 알 수 없는 제2책은 1759년 정월부터 1761년 10월 6일까지 약 3년 가까운 기록이 담겼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1764년부터 1771년 5월까지 7년여의 일기가 담긴 4, 5, 6, 7책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제8책은 『일기 팔(八)』이라는 표제 오른편 상단에 “신묘 이(二) 연행 상(上)”이라고 쓰여 있다. 1771년 5월 20일에 시작해서 연경에 도착하기 직전인 8월 2일까지의 기록이다. 아마도 8월 3일 연경에 도착하고부터 돌아올 때까지 3개월의 기록은 따로 ‘연행 하(下)’로 썼을 듯한데, 행방을 알 수 없는 제9책이 바로 그것이다. 제10책은 연행에서 돌아온 뒤인 같은 해 1771년 11월 초하루부터 그 다음해인 임진년 12월 17일까지다. 윤동섬은 귀국 후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1772년 3월 28일 평안감사로 임명되어서 재직 중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도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책수

표제

기록시기

비고

제1책

『일기 일(一)』 갑술, 을해, 병자, 정축, 무인

1754년 4월 27일-1758년 12월 30일

·

제2책

·

1759년 1월 1일-1761년 10월 6일

不傳

제3책

『호서일기 삼(三)』 신사 하, 임오, 계미

1761년 10월 7일-1763년12월 20일

·

제4~7책

·

1764년 1월 1일-1771년 5월 19일

不傳

제8책

『일기 팔(八)』 신묘 이(二) 연행 상(上)

1771년 5월 20일-8월 2일

·

제9책

·

1771년 8월 3일-10월 30일

不傳

제10책

『일기 십(十)』 신묘 사(四), 임진

1771년 11월 1일-1772년 12월 17일

·

현재 남아 있는 『일기』 4책은 그 분량이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제1책은 5년의 기록인데 반해서 제8책은 두 달 보름의 기록이다. 곧, 평범한 일상의 나열이 아니라, 특정 주제를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기』는 행초와 해서가 섞여 있는 필사본이다.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해서로 쓴 것으로 보인다.
서지적 가치
① 서지적 가치
윤동섬의 조부인 윤부(尹扶)의 묘갈명은 이덕수(李德壽)가, 부친인 언교(彦敎)의 묘갈명은 송명흠이 썼다. 윤동섬은 녹문임성주와 인척간이고, 서명응이나 홍양호 등과 긴밀한 교분을 가졌다. 그래서 경화세족 중에서도 주요 인물로 꼽히지만, 윤동섬의 저술 가운데 알려진 것은 없었다. 인물의 중요도에 비추어 연구가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는데, 불완전하나마 『일기』 4책은 윤동섬 연구에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내용적 가치
② 내용적 가치
윤동섬의 『일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연행(燕行)’이다. 윤동섬이 진주사(陳奏使) 사절의 부사로서 연행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예사롭지 않은 정치, 문화적 사건 때문이었다. 『일기 팔』은 1771년 5월 20일의 기록을 박필순(朴弼淳)의 저 유명한 상소를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주린(朱璘)이 편찬한 『강감회찬(綱鑑會纂)』에 태조이성계의 계보를 잘못 기술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영조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서 바로잡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 서적을 불법으로 수입하는 역관이나 상인들을 국경인 의주에서 ‘먼저 효시를 하고 뒤에 보고’하도록 명령한다. 이 사건은 사상 탄압으로 발전해서 당시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윤동섬은 연경에서 서적 수입이 전면 금지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한편, 이 사건으로 “선비와 책쾌(冊儈) 가운데 죽임을 당한 자, 형벌을 받고 찬배되어 충군된 자가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는 사신을 각별히 잘 선발해서, 김상철(金尙喆), 윤동섬, 심이지(沈頤之)를 삼사로 정한다.
윤동섬의 연행 기록은 연행록의 일반적인 예를 따라 날짜순으로 쓰였다.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복통으로 오래 고생하면서도 중국 사람들의 삶과 이국의 경물들을 자세히 기록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바, 사람들의 차림새와 음식, 마을과 도로의 모습에서 꽃까지, 세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곳이 많다. 현재까지 이때 사행에서 생산된 연행록은 알려진 것이 없으므로, 윤동섬의 연행 기록은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연경 도착 이후의 기록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예순이 넘은 나이에 연경에 가는 그의 기대는 컸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비록 명나라 서적 수입이 엄금되었지만, 그가 평생 관심을 갖고 있었던 금석과 서화에 대한 열망을 해소할 기회였을 것이다.
윤동섬의 『일기』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내용은 당시의 정치, 사회상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일기를 읽는 독자라면 으레 가지는 기대일 것이다. 윤동섬은 오랜 기간 고위 관직에 있었으므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섣부른 결론일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그런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윤동섬 개인에게 의미 있는 기술, 예컨대 사직 상소 같은 글은 있지만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이면의 기록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1762년 윤5월의 임오화변 같은 경우, 충청감사로 있었던 윤동섬은 그저 딱 한 줄로 영조의 처분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윤동섬의 교유 관계나 집안의 상황 등 그 개인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들이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시나 산문 등 문학 작품이라고 할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기록자가 그런 원칙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앞으로도 그의 문집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아쉬운 일이 되겠다.
참고문헌
윤동섬, 『수록(隨錄)』8책, 천리대학도서관 .
『윤동섬연보세계(年譜世系)』2책, 천리대학도서관 소장.
황정연, 「18세기 경화사족의 금석첩 수장과 예술 향유 양상」, 『문헌과해석』35, 2006.
집필자 : 김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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