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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과지(枕戈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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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M.0000.0000-20090721.RICH_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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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일기 | 사회-역사 | 사부-잡사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2卷2冊(94張) : 無界, 行字數不定, 無魚尾 ; 34.0 X 22.0 cm
· 주기사항 內容: 丙子錄 / 羅萬甲. -- 江都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487.4150

안내정보

『침과지(枕戈誌)』 필사본 2권 2책은 나만갑(羅萬甲)(1592-1642)이 지은 『병자록(丙子錄)』과 찬자 미상의 『강도록(江都錄)』을 별책으로 묶은 것이다. 『병자록』은 병자호란 때 나만갑 자신이 겪은 전쟁 경험과 병자호란 전후의 정치 실정을 정리한 것이며, 『강도록』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江華島)에서 일어난 사건의 시말을 기록한 것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침과지(枕戈誌)』는 나만갑(羅萬甲, 1592-1642)이 지은 『병자록(丙子錄)』과 찬자 미상의 『강도록(江都錄)』을 묶어서 별책으로 편찬한 것이다. 편찬자는 미상이다. 『병자록』의 저자인 나만갑은 본관이 안정(安定), 자가 몽뢰(夢賚), 호는 구포(鷗浦)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진사가 되었고, 1623년(인조 1)에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었으며,알성문과(謁聖文料)에 병과로 합격하여 수찬(修撰)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 심기원(沈器遠)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종사관이 되어 강화도에 호종(扈從)하였으며,다음 해 환도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 수찬(修撰),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단신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모시고 공조참의(工曹參議)로서 관향사(管餉使)가 되어 군량 공급에 큰 공을 세웠다. 강화 직후 무고를 당하여 영해에 유배 되었다가,1639년(인조 17) 풀려나와 영천에서 여생을 보냈다. 저서에는『병자록』과 함께 문집인 『구포집(鷗浦集)』이 있다.
구성 및 내용
『침과지』는 상하(上下)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편과 하편의 상(上)은 나만갑의 『병자록』을 초록한 것이며, 하편의 말미에 『강도록』을 부기(附記)하였다. 그리고 말미에는 나만갑이 쓴 『병자록』 발문(跋文)이 들어 있다. 권수제(卷首題)가 ‘枕戈誌上編初’, ‘枕戈誌下編上’으로만 되어 있으나, 내용과 하편 말미의 발문을 통해 나만갑이 지은 『병자록』임을 알 수 있다. 『침과지』에 초록된 『병자록』은 국내에 소장된 여타 『병자록』의 이본 중에 하나인데, 내용상으로 볼 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1책의 『병자록(丙子錄)』(청구기호: 古2154-4. 이하 국중본)과 흡사하다. 다만 국중본의 경우 ①「기초두위절(記初頭委折)」, ②「급보이후일록(急報以後日錄)」, ③「기각처근왕사(記各處勤王事)」, ④「기강도사(記江都事)」, ⑤「기척화사의제공사(記斥和死義諸公事)」, ⑥「잡기난후사(雜記亂後事)」, ⑦「기청음피무사(記淸陰被誣事)」로 소제목이 적혀 있는데 반해, 버클리대본은 소제목 없이 초록되어 있다. 그리고 버클리대본은 순서가 ⑦의 「기청음피무사」가 ⑤의 기척화사의제공사」의 앞에 있는 점이 다르다.
①은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운 경위, 심하전역,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발발 등이다. ②는 『병자록』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으로, 1636년(인조 14) 12월 12일 청나라 군대가 침입한 날로부터 이듬해 2월 8일 항복을 하고 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심양(瀋陽)으로 떠나는 날까지를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③은 남한산성에서 남병사 서우신(徐佑申)을 비롯하여 왕을 호종한 신하들의 행적을 서술한 부분이다. 이상이 『침과지』 상편이다. 하편은 강화도 함락의 전말을 기록한 ④로 시작하는데, 절개를 지켜 순절한 사대부들과 여인들의 행적을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국중본과는 달리 청음 김상헌(金尙憲)과 관련된 사건들을 나열한 ⑦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소위 3학사라 불리는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등 척화론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⑤와 전란 후 국사를 망친 자들에게 대한 징벌 문제를 다룬 ⑦이 기술되어 있다.
『강도록』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벌어진 사건의 시말을 적은 것인데, 국내에 전하는 여타 이본과 내용은 대동소이하며 다소 글자 출입이 있다. 『침과지』의 편자는 원주에 『강도록』이 『병자록』의 참고가 되고 또한 보유(補遺)의 의미가 있다며 부기한 이유를 밝혀놓았다.(此書人多傳看, 而右本畧有相左. 又或補遺, 故因尾之, 以爲賢者參詳焉.)
마지막으로 『침과지』의 말미에는 나만갑이 쓴 『병자록』 발문이 실려 있는데, 국중본과 비교해 볼 때 약간의 글자 출입이 있다. 특히 말미 부분에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국중본에는 “忘其僭越, 備載于此” 뒤에 “鷗浦老人書”라고 되어 있는데 반해, 버클리대본에는 “後之賢者, 幾若眼擊, 則未必無少補云爾.”라고 되어 있다.
서지적 가치
『침과지』는 『병자록』과 『강도록』을 별책으로 엮은 것이다. 현재 이 두 저작을 하나로 묶어서 ‘枕戈誌’란 제목을 단 것은 버클리대본이 유일하다. 다만 『병자록』과 『강도록』의 이본은 국내에 다종이 전하고 있다.
『병자록』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5종, 규장각에 2종, 장서각에 3종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밖에 고려대, 동국대, 성균관대 도서관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표제가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청구기호: 古2154-3) 활자본으로는 1928년 조선박문서관에서 발행한 『임진급병자록(壬辰及丙子錄)』이 있는데, 이것은 한문에 토를 단 것이다. 이상의 이본들은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구성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강도록』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되어 있는 『남성록(南城錄)』(필사본 1책, 청구기호: 한古朝51-나137)에 부록되어 전하고 있다. 『남성록』은 찬자 미상으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내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침과지』에 수록된 『병자록』은 국중본에 비해 일자별로 몇몇 기사가 누락되어 있고, “萬曆四十六年戊午”를 “萬曆四十五年戊午”라고 하는 등 오기가 더러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침과지』는 『병자록』과 『강도록』의 이본 중 하나로 충분히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내용적 가치
『침과지』는 병자호란의 실기(實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저작인 『병자록』과 『강도록』을 별책으로 편집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윤선서(尹宣擧, 1610-1669)는 「병자록발(丙子錄跋)」(『노서유고(魯西遺稿)』 권16, 한국문집총간 120, 315면)에서 『병자록』과 『강도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 듣기에 당시에 이(李) 주서(注書)가 남한산성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진실을 잃었다고 하였다. 비단 진실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실이 전도되고 바뀌기까지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오류를 바로잡는 자가 없었는데, 이제 이 『병자록』을 보면 잘못 기록된 것은 의당 절로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의 일에 대해 기재한 부분은 소략하여 당시의 사정을 다 갖추지는 못했다. 참의공(곧 나만갑)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보고 들은 것이 달랐기 때문에 의심스러워 확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강도록』을 본 적이 있었는데, 누가 기록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또한 거짓과 사실이 서로 섞이고 말았다. 나는 당시 강화도에서 직접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화란(禍亂)의 시말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에 감히 별도로 한 통을 지어서 『병자록』의 뒤에 부기하여 독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余聞當時有李注書者, 記山城事, 頗失其眞, 非徒失眞, 亦且顚倒而變易之. 人皆不韙之, 而無以正其訛謬, 今見此錄, 則僞記自當廢也. 至於江都事, 所載撮略, 無以備盡事情. 參議公所不身歷, 故見聞同異, 容有然疑之難定者矣. 曾見有江都錄, 不知何人之所記, 而亦未免虛實之相混. 余則身陷于江都, 明知禍亂本末, 乃敢別爲一通, 付諸此錄之後, 使覽者有所考信焉.)"
윤선거는 먼저 『병자록』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일을 제대로 기록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병자록』 내 강화도 관련 내용이 소략한 점을 아쉬워하였다. 편자 미상의 『강도록』 역시 당시 강화도에서 벌어진 사건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이에 윤선거는 당시 강화도에 있었던 경험을 살려 자신이 직접 별도로 사건의 시말을 적어서 『병자록』의 말미에 붙인다고 하였다. 윤선거가 지은 이 글은 「기강도사(記江都事)」란 제목으로 『노서유고』 권15에 수록되어 있는데 완성본은 아니다.(이 글의 원주에 “欲記此以附於羅公萬甲丙子錄之下, 而未及成焉.”라고 되어 있음.)
요컨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과 강화도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으며, 여기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침과지』의 편찬자 역시 이 점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병자록』과 『강도록』을 함께 묶어서 별책을 편찬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장경남, 「『병자록(丙子錄)』 해제」, 『국립중앙도서관 선본 해제』 1, 국립중앙도서관, 1970.
집필자 : 안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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