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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일록(篆餘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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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M.1837.0000-20130520.TOYO_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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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일기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수필류
· 작성주체 김매순(金邁淳, 1776-1840)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837
· 형태사항 不分卷1冊(98張) : 無界, 12行20字, 注雙行 ; 24.7 X 15.4 cm
· 주기사항 裝訂: 四針眼靑色絲綴
紙質: 竹紙
內容: 龍灣日錄. -- 鰲山日錄. -- 巴陵日錄. -- 鶴城日錄. -- 理山日錄. -- 月城日錄. -- 沁都日錄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2-279

안내정보

김매순(金邁淳)이 1803년 28세의 나이로 문례관(問禮官)이 되어 의주(義州)에 나갔던 시절부터 강화부사(江華府使)로 재직하기까지 35년간의 관직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기술한 책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저자 김매순은 1776년(영조52) 김이수(金履鏽)와 죽산 안씨(竹山安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현손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이다. 고문(古文)의 대수로 꼽혀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44-1842)와 함께 연대지문(淵臺之文)으로 불렸으며, 뒤에 김택영에 의해 여한십가(麗韓十家)에 피선되었다. 북악산 아래 장동에서 자라며 공부했고, 1800년 25세의 나이로 초계문신에 선발되었다. 병조 좌랑과 홍문관 수찬을 거쳐,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한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농암과 삼연의 낙론을 계승하여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으나, 이론의 논리를 일부 받아들여 절충하였다. 28세에 문례관이 되었고, 홍문관에 복직하여 사울차(四鬱箚)를 지었다.
용강현령으로 나갔다가 정순대비(貞純大妃) 소상에 참여하고 돌아온 뒤, 종형 김달순(金達淳)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미음(渼陰)에 은거하였다. 은거하는 동안 「풍서기(風棲記)」 등 주요 작품과 『주자대전차의문목표보(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 등 대표 저술을 완성하였다. 한편 다산 정약용과 교유하며 『매씨서평(梅氏書平)』 완성에 도움을 주었다.
49세에 다시 관직에 나와 50세에 양천 현령에 부임하였다. 이어 안변 부사, 초산 부사, 경주 부윤 등의 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내직으로 강화 유수를 역임하였다. 공직에 봉직하는 동안 지방 행정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고, 그때의 노력을 『공이점록(公移占錄)』으로 묶었다. 이는 공무 외에 일상의 잡다한 일을 기록한 『전여일록(篆餘日錄)』과는 내외의 짝을 이룬다.
1897년 전사자로 『대산집』(문총294)이 간행되었고, 『대산초고(臺山初藁)』(성균관대학교 존경각, 규장각)과 『대산유집(臺山遺集)』(연세대 국학자료실) 2종의 이본, 『궐여산필(闕如散筆)』(규장각, 성균관대 존경각), 『공이점록』(규장각, 동양문고) 등의 저술이 있다. 또 『사선생시문초(四先生詩文抄)』(버클리대), 『진신적독(縉紳赤牘)』(규장각), 『동문집성(東文集成)』 등에 작품이 피선(被選)되었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불분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의 ‘전여(篆餘)’에서 전(篆)은 전서(篆書)로 새겨진 벼슬아치의 직인이고, 여(餘)는 여가라는 뜻이다. 김매순이 문례관이 되어 의주로 나갔던 시절부터 강화 유수 시절까지 7번의 관직 생활 동안 공무 외의 일상을 일기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따라서 공무 처리에 관한 기록이나 공문서는 거의 없고 대체로 벼슬에 제수되던 당일로부터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 예를 들면 날짜와 날씨, 경로, 묵었던 곳의 지명, 거리, 도중에 보고 들은 견문, 중간에 보고받은 장계의 내용, 만난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록하였다.
부임한 관직의 순서에 따라 모두 7개의 일록(日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에 강화 유수시절 휘하 관리들의 고과를 평한 포폄등제(褒貶等題)가 부록으로 실려있다.
먼저 「용만일록(龍灣日錄)」은 문례관에 제수되던 1803년(계해) 2월 25일부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윤2월 25일까지의 기록이다. 27일에 출발하여 고양, 파주, 장단을 거쳐 송도에서 묵고 용만으로 갔다는 이동 경로와 거리 정보가 소상하게 적혀 있다. 또 중국 측 칙사(勅使)의 거드름과 오만, 조선 측 접빈사의 대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오산일록(鰲山日錄)」은 용강현령(龍岡縣令)에 재직하던 시기의 일기인데, 1804년(갑자년) 11월 21일부터 1806(병인년)년 8월 25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11월 21일에 제수되어 12월 2일에 떠났으며, 10일에 평양 감영에 가서 관찰사 이서구(李書九)에게 인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05년(을축년) 2월 14일에 이서구를 대신하여 「빈전제향문(殯殿進香文)」을 대신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정순왕후의 인산일에 「인산지애(因山志哀)」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자신의 전최(殿最) 평가와 암행어사 홍병철(洪秉喆)이 자신의 공무 집행 상황을 조정에 보고한 장계 내용도 초록해 놓았다.
「파릉일록(巴陵日錄)」은 양천현령(陽川縣令)에 부임하였던 1825년(을유년) 6월 26일부터 1826년(병술년) 9월 13일까지의 일기이다. 경기감사 박종기(朴宗琦)의 장계와 승정원의 계사를 초록해 놓았다. 양문역에서 이서구를 찾아간 일, 오희상(吳熙常)을 만난 일, 조성약(趙聖約) 등 양천으로 찾아온 벗들과 소요정(逍遙亭)에서 노닌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1826년 3월 25일 「별신일구유(別賑日口喩)」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학성일록(鶴城日錄)」은 안변부사(安邊府使)에 부임하였던 1827년(정해년) 윤5월 14일부터 1828년(무자년) 12월 3일까지의 일기이다. 기사환국(1689)으로 김매순의 5대조 김수항이 유배되었을 때 김창협과 김창흡은 성창역(省昌驛) 근처로 피신을 하였고, 그때 역리(驛吏) 권이종(權以宗)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827년 윤5월 27일, 안변부사로 부임하던 길에 김매순은 성창역에 들러 권이종의 6대손 권윤억(權潤億)을 찾아 후대하고, 그 전말을 적었다. 6월 14일 자에 실린 김삼백(金三百)이란 자의 일도 흥미롭다. 4척 미만의 키에 새카맣고 원숭이처럼 못난 김우종(金禹宗)이란 노인이 자신을 ‘제주 태생으로 306년을 살았으며, 임진왜란을 겪었노라.’고 소개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8월 12일에는 사동촌에서 호랑이를 잡은 일도 기록되어 있다.
「이산일록(理山日錄)」은 초산부사(楚山府使)로 부임하였던 1831년(신묘년) 5월 10일부터 1832년(임진년) 4월 25일까지의 일기이다. 6월 4일에 홍제원(弘濟院)을 출발하였다. 총수산에서 명나라 인사 청악(靑岳) 유홍훈(劉鴻訓)의 글씨를 찾은 일, 자비령 일대의 지형, 더위를 먹어 여곽탕(茹藿湯)을 복용한 일, 평양에서 연광정을 구경하고, 기자묘(箕子廟)를 배알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월성일록(月城日錄)」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하였던 1833년(계사년) 8월 21일부터 1834년(갑오년) 7월 16일까지의 일기이다. 9월 6일에 하직하여 충주 달천강, 수안보, 조령, 예천 삼강, 안계, 군위 도리원, 영천, 경주로 이어지는 이동경로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신라 고도와 계림, 옥산서원 등을 둘러본 사실을 기록하고, 우암과 퇴계의 필적을 찾아본 일, 관찰사 서희순(徐憙淳)을 알현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심도일록(沁都日錄)」은 강화유수로 부임하였던 1834년 6월 16일부터 1837년(정유년, 헌종3) 12월 21일까지의 일기이다. 6월 16일에 배임되어 7월 6일에 경주를 떠나 16일에 용산의 집으로 돌아왔다. 7월 28일에 임지에 도임(到任)하여 행궁과 외규장각을 순시하였다. 11월에 순조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들어왔는데 13일에 순조가 승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용산과 강화도의 뱃길 이동 경로, 죽계(竹溪) 김소행(金紹行)과의 만남,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동춘추(同春秋), 부총관(副摠管), 동경연(同經筵)에 제수된 사실, 1836년 8월 15일에 금수정(金水亭)을 찾은 일, 송시열과 김수항의 각자(刻字)를 찾은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1836년 10월 5일에 「역안재기(易安齋記)」를, 12월 17일에 「중용미발설(中庸未發說)」, 20일에 「대학제가설(大學齊家說)」, 이듬해 2월 5일에 「관덕첩발(觀德帖跋)」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말미에 「심도일록」의 부록 성격으로 강화유수 시절 자신의 휘하에 있던 관리들에 대한 갑오년과 을미년의 고과가 실려있다.
본서의 전체의 구성과 시기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록명

부임 관직

기록 시기

나이

비고

龍灣日錄

문례관 파견시

1803년 2월 25일~윤2월 25일

28

 

鰲山日錄

용강현령 부임시

1804년 11월 21일~1806년 8월 25일

29~31

 

巴陵日錄

양천현령 부임시

1825년 6월 26일~1826년 9월 13일

50~51

 

鶴城日錄

안변부사 부임시

1827년 윤5월 14일~1828년 12월 3일

52~53

 

理山日錄

초산부사 부임시

1831년 5월 10일~1832년 4월 25일

56~57

 

月城日錄

경주부윤 부임시

1833년 8월 21일~1834년 7월 16일

58~59

 

沁都日錄

강화유수 부임시

1834년 6월 16일~1837년 3월 21일

59~62

內職

서지적 가치
본서는 김매순의 친필본으로 추정된다. 괘선은 없고, 1행 20자씩 12행으로 정서되었다. 친필본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규장각본 『궐여산필(闕餘散筆)』, 규장각본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대산근체시(臺山近體詩)』와 필체가 같기 때문이다. 규장각본 『궐여산필』은 『대산초고(臺山初藁)』라는 표지의 제목대로 초고일 가능성이 크며, 『대산공이점록』 역시 연대본 『대산유집』이나 동양문고본 『대산공이점록』과 달리 초고로 보인다. 『대산근체시』는 대산이 젊은 날 지은 과시(科詩)를 모아 묶은 것이다. 이 세 저술은 대산 이외의 다른 사람이 대신 쓰거나 정리했을 가능성이 적은 자료이다. 『고선책보(古鮮冊譜)』에서도 『전여일록』을 대산의 친필로 추정했다.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고선책보』의 저자 역시 해제자와 비슷한 근거로 추정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음에 은거한 19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김매순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의 일상과 만난 인물들이 파악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본서를 통해 은거기를 제외한 김매순의 생애가 거의 대부분 자세하고 정확히 복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서를 통해 작품 창작 시기를 정확히 고증하고 확정할 수 있다. 작가의 이동 경로와 방문 장소, 만난 사람을 분명히 적시해 놓았으므로 시의 경우 작품 제목과 비교해보면 작품 창작 시기를 대체로 정확히 고증할 수 있다. 게다가 작품을 완성할 당시의 정황과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므로 작품 연구에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대산집(臺山集)』의 작품이 창작 순서에 따라 편집된 것은 분명하지만, 문체별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산문의 경우는 창작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글이 대부분이다. 『전여일록』에는 해당 날짜의 기사 말미에 창작한 작품의 제목을 명기해 놓은 것이 많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적지 않은데, 「별신일구유(別賑日口喩)」와 「이안재기(易安齋記)」 등 다수의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내용적 가치
본서가 가지는 내용적 가치는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본서는 날씨에서부터 하루 이동 거리, 심지어는 점심을 먹고 말먹이를 준 지명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지방관들의 보편적인 부임 경로와 평균적인 하루 이동 거리를 알 수 있다. 또한 부임지까지 경유하는 동안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찾아와 만나는 장면, 중앙으로 보고되는 장계 가운데 관련 내용을 보고 받는 장면 등을 통해 지방관의 부임 모습과 문화를 생생히 엿볼 수 있다.
공무를 처리한 행정문서는 여기에 빠져 있다고 전술했다. 다만 제수된 관직의 최종 후보자 명단과 지방관 부임시절 받은 자신의 근무 평가인 전최(殿最)는 기록해 놓았다. 또 암행어사가 염찰한 장계 역시 자신의 부임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초록해 두었다. 이를 통해 김매순의 근무 태도와 세평을 알 수 있다.
교유관계 및 인맥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연구대상의 교유관계나 인적 관계망을 고찰할 경우 대부분 문집에 주고받은 시작품과 편지를 중심으로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때 대상 인물의 정치적 좌표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인물이나 절친한 벗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고찰할 단서가 누락되었다면 그것을 달리 살펴볼 방법이 없다. 본서는 만난 사람과 유람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상 인물의 인맥 관계를 한층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김매순에게 있어서는 이서구(李書九)이다. 「정순왕후 빈전제향문」도 이서구를 대신해 지은 작품임이 본서에 명시되어 있으며, 양문역에서 이서구를 찾아뵌 일 등 문집에는 드러나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가 기록되어 있다.
건강 상태와 질환도 특정 인물을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본서에는 김매순이 평생 식체 때문에 고생한 사실과 그로 인해 늘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복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예민한 성격으로 오랫동안 위장병을 앓은 것으로 보이는데, 작품의 특질을 이해하는 데에도 일부분 기여할 수 있는 정보이다.
사회적 관계망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상황까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언제쯤 용산으로 이주했는지, 종족들은 주로 어디에 살았는지, 사위는 어느 동에 살았는지 등의 정보가 빠짐없이 들어있다. 이로 인해 그의 주요 생활 공간이 드러나고, 안동 김씨의 세거 지역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일상에서 가지던 관심사를 알 수 있다. 해당 부임지에 도착하면 공무 외에 농암과 삼연의 각석(刻石) 및 퇴계와 우암의 흔적을 찾았고, 북관 지역에서는 산천의 형세와 국경 방어에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백성들을 위해 호환을 없애려 노력하기도 했고, 강화도에서는 허물어진 성을 재정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관심의 흔적이 시문으로 나타난 것은 물론이다.
요컨대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김매순의 학문과 문학 세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 본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규필, 「臺山 金邁淳의 學問과 散文 硏究」,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2010.
집필자 : 이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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