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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일기(江北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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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M.1872.0000-20090720.RICH_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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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지지 | 사부-지리류
· 작성주체 최종범(崔宗範, ?-?) 편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872
· 형태사항 1冊(20張) : 無界, 9行字數不定, 無魚尾 ; 24.7 X 14.7 cm
· 주기사항 內容: 壬申(1872)五月三十日-七月初十一日 崔宗範, 金泰興, 林碩根 三人의 鴨綠江上流 旅行日記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481.93.2138

안내정보

평안도 후창군(厚昌郡)의 군관(軍官) 최종범(崔宗範), 김태흥(金泰興)과 수향(首鄕) 임석근(林碩根) 등이 1872년(고종 9) 5월 30일부터 7월 11일까지 평안도강계군(江界郡), 자성군(慈城郡), 후창군(厚昌郡), 삼수부(三水府)의 압록강 건너 대안(對岸)지역을 정찰하고 그 내용을 날짜별로 기록한 일기체의 여행기록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본서의 저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순찰업무를 담당한 인물이 일기체 형식으로 작성한 점에서 순찰일행이었던 평안도후창군의 군관인 최종범, 김태흥, 수향 임석근 가운데 한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선임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최종범이 저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최종범은 1843년(헌종 9) 4월 15일, 『일성록』에 기재된 「判下瑞蔥臺射放入格別單」에 조총(鳥銃)으로 입격자 명단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헌종대 이후 입격한 군관이며, 정탐임무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 다양한 고사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견문이 있었던 인물로 판단된다. 김태흥, 임석근에 관련한 현존하는 인물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상황은 파악하기 어렵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일기체형식의 기행문으로 일자별 날씨와 특기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서술하고, 특정인의 언행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일기를 통해 일행은 탐문기간 중 매일 날씨, 이동거리, 주변형세, 교통수단, 지명과 유래, 인가의 유무와 숫자, 숙박처, 탐문하였던 사람의 내역, 탐문목적의 문답내용, 특히, 숙박처에서 집주인과 나눈 대화는 일행이 주로 정보를 수집하였던 통로였다. 탐문내용을 정리해 보면, 조선인의 월강현황, 월강이유, 월강시기, 규모, 청인과의 관계, 고용여부, 청 관원의 징색여부, 조선인의 생활상황, 생계수단 등 압록강 이북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을 일자별로 정리하면, 일행은 1872년 5월 30일에 최종범(崔宗範), 김태흥(金泰興)과 수향(首鄕) 임석근(林碩根)이 평안도후창군을 출발하여 죽전리(竹田里)의 주중겸(朱重謙)의 집에서 행장을 갖추었다.
6월 1일, 마록포(馬鹿浦)에서 압록강을 건너 원래 거주민(청인과 조선인)을 만나 범월을 방지하고 조·청간 마찰을 방지하기 위해 순찰을 한다는 목적을 밝혔다. 1년전 금창리(金昌里)에서 국경을 넘어 거주하는 임호범(林浩範)의 집에서 숙박하였다. 무장한 청인 50여명이 와서 조선의 채장(寨將), 방장(防將) 등과 교전한 것을 빌미로 국경을 건너온 이유를 탐문하자 이전의 교전과 자신들은 관련이 없고 조선인이 범월하지 못하도록 순찰한다고 답변하였다. 일반인 복장으로 압록강을 건너 혈암평(穴巖坪)에서 조선인으로 범월하여 도회두(都會頭)를 지내는 신태(辛太)의 집에서 숙박하고, 부락의 분포현황 및 인구구성, 병기관리 실태를 상세히 기록한 ‘인정성책(人丁成冊)’ 1책, ‘병기성책(兵器成冊)’ 1책을 살펴보았다. 인정성책과 병기성책을 통해 살펴보면, 신태가 도회두로 있는 지역은 조선인이 193호(戶) 1,673명이고, 청인이 163호였으며, 군인은 약 300여명이었다. 청인의 조총은 80병(柄), 조선인의 조총은 48병, 대총(大銃)은 20병이었는데, 입동(立冬)에 회두(會頭)의 집에 수거하였다가 다음해 한식(寒食)에 나누어 주었다.
일행은 강을 거슬러 올라 칠도구(七道溝)의 방성민(方成民)의 집에서 숙박하였다. 방성민은 3년전에 범월한 무산(茂山)의 향족(鄕族)으로 조선관원을 경계하자 일행은 압록강 대안에 양화평(楊花坪), 옥계촌(玉鷄村), 나선동(羅善洞), 철포성(鐵鋪城) 등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있고 채선생(蔡先生), 갈처사(葛處士), 곽장군(郭將軍), 김진사(金進士) 등의 영웅이 있다는 설을 믿고 길지(吉地)를 찾아 다니는 사람들로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었다.
일행은 6월 5일, 험난한 산길을 따라 오도구(五道溝)의 박대수(朴大栦) 집에서 숙박하였다. 산세가 험하여 인구가 적고, 대부분 무산지역에서 넘어온 조선인들이며, 삼을 캐거나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최종범이 아파 출발하지 못하였다가 그 다음날 7일, 화개산(華盖山)에 도착하였다. 6월 8일, 김여옥(金汝玉)의 집에서 숙박하며 김여옥의 부친인 김원택(金元澤)으로부터 범월하게 된 경위와 생활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 내용 가운데, 조선의 후창군에서 범월상황을 등록하고, 청나라에 자문(咨文)으로 전달함으로서 조·청간에 조사작업이 있었음, 이주민의 대부분이 대부를 받아 생활한다는 사실, 김여옥의 집을 중심으로 270여호가 공동생활을 하고 있음, 김원택이 청금동(淸金洞)에서 삼도구(三道溝)에 이르는 150리 거리의 조선인 270호 1,465명, 청인 220호 792명의 대회두로서 휘하에 많은 회상(會上)을 두고 있음 등을 파악하였다. 6월 9일, 비로 김여옥의 집에 머물며, 청의 관군이 국경지역에 파견되어 범월인을 색출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6월 10일, 50리를 이동하여 장거리(長巨里)까지 갔다가 김여옥의 집으로 돌아와 숙박하였다. 6월 11일, 고려성(高麗城)에 도착하여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다. 6월 12일, 큰 들판을 건너 길가에서 숙박하였다. 자성, 여연을 넘어 압록강의 북안으로 인가없는 길을 건너갔다. 6월 13일부터 험준한 산악지대를 건너가서 15일에 옥구(玉溝)를 거쳐 팔두강(八頭江)에 도착하였다. 철포성(鐵浦城), 양화촌(楊花村) 등 주변 지형에 대해 상세히 탐문하였다. 이후로 북쪽과 서쪽으로 매일 20리에서 50리까지 이동하며 인가분포, 지형, 지명, 특산물, 거리 등을 상세히 탐문하였다. 일행은 주로 월경하여 거주하는 조선인과 청인에게 문답형식으로 탐문하여 기재하였다. 21일에는 육두강(六頭江)에 도착하여 영변출신 김영변(金寧邊)의 집에서 월경상황에 대해 문답하였다. 여행 도중 식량이 떨어져 인가에서 구매하기도 하고, 도보와 선박을 이용하여 주로 이동하였다. 최종적으로 일행의 탐문이 마무리된 것은 7월 10일이며, 다시 마록포를 통해 귀환하였다.
서지적 가치
본서의 현소장처는 미국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이며, 크기는 14.7×24.7㎝이며, 1책 20장이다. 편찬연대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壬申年”이라는 기록과 본문 중에 1869년(고종 6)에 신설된 후창군(厚昌郡)에 관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으므로 본서는 1872년에 저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서의 이본은 국내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1943년에 필사된 1책 32장의 필사본(古 4850-3)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도서는 권말(卷末) 표지 이면에 ‘昭和十八年(1943) 一月 二十五日, 鄭啓燮 附’라는 기록을 통해 이왕직(李王職) 소장본을 1943년에 전사(轉寫)했음을 확인할 수 있고, 1872년 6월 1일에서 7월 15일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광곽(匡郭) 23×15㎝, 10行 20字로 본서보다 다소 큰 31×21cm 크기이며, 본서에서 빠져 있는 채색지도(彩色地圖)가 있어 일행의 이동경로와 조·청 국경선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이본(K2-4510)은 서울대 규장각본과 동일한 내용과 체제로 구성된 필사본이며, 線裝1冊(35張)으로 채색지도(彩色地圖)가 수록되어 있다. 본서에는 정찰지역의 지형과 이동경로를 표시한 채색지도가 없는 한계가 있다.
내용적 가치
본서의 일행이 탐문한 목적은 정확하지 않지만, 1870년부터 1872년까지 매년 청인들이 수천명씩 무리를 지어 후창군에 침입하여 도벌(盜伐)하거나 민가를 약탈하다가 조선군에 의해 축출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후창군에서 압록강 건너편 청인 근거지의 상황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서 이들을 파견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에서 주로 일행이 탐문한 지역은 강계(江界)‚ 위원(渭原) 등 압록강 북변에서 흑룡강(黑龍江) 남변에 이르는 변경 지역이었다. 이곳은 조청간에 국경선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았던 지역으로 상호간에 무력적인 충돌이 빈번하였으며, 삼(蔘)을 비롯한 경제적 이익관계에 따라 집단충돌까지 발생하였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점을 통해 조선의 군관신분이었던 이들이 신분을 숨기고 탐문하였다는 점은 조선의 국경지역에 대한 피해조사 및 정보수집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일행이 주로 조선인의 집에서 숙박하며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던 점은 정보수집의 용이성과 함께 정보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판단되며, 일행의 정보수집 방향이 조선인의 생활상황을 파악하는 것과 일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자의 관심사항 가운데 이동 중에 절경을 만나면 상세히 그 모습과 유래, 관련 사항을 기재한 점은 단순한 정보수집 뿐만 아니라 일기형식의 기행문에서 필수적인 사항을 포함한 것이다. 본서는 약 45일간의 험난한 지역에 대한 탐문일정을 기록한 것이지만,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주변의 지역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긴요한 자료이며, 특히, 조선의 군관이 직접 작성하였다는 점은 정보지의 성격을 가져 혼란하였던 19세기 후반의 이 지역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선(線) 개념이 아닌 지대(地帶) 개념의 국경을 접한 조선과 청은 청의 봉금(封禁)정책에 입각하여 상호 범월을 엄격히 금지하였지만, 조선후기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증가하는 범월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조선은 청인의 침탈을 단속하기 위해 범월을 명분으로 조선관원을 이 지역에 파견하여 거주현황 및 지세를 파악하였다.
청의 봉금정책으로 인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은 무인지대로 조·청간 완충지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동문휘고(同文彙考)』의 ‘범월(犯越)’, ‘강계(疆界)’, ‘범금(犯禁)’ 등의 외교사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후기 지속적으로 이 지역으로 유민이 발생하여 점진적으로 거주민이 증가하였다. 조선과 청의 엄격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범월을 통해 거주민이 증가한 이유는 채삼(採蔘)이나 벌목을 통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한 도망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조선측에서 범월하는 주된 이유는 본서의 본문에서 신임 무산부사(茂山府使)의 탐학으로 조선인이 백두산 기슭으로 들어가 부지기수로 죽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범월의 실질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특히, 187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청간 이 지역에 대한 이해가 서로 와해되면서 청 정부의 동북지역에 대한 봉금정책도 힘을 잃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유민의 유입을 효과적으로 단속하지 못하였다. 청의 입장에서 가장 변방이라고 할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두만강 상류지역은 청인의 유입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으며, 조선인의 유입이 더 많았다.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이권관계를 두고 수시로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조선과 청의 관군이 파견되어 충돌하는 사례도 많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선인과 청인은 동거하여 자급자족의 자위적 생활영역을 개척하였다.
무산에서 범월한 대회두(大會頭) 김원택(金元澤)이 자신의 관할 하에 조선인 277호, 1,465명의 인정과 청인 220호, 792명의 인정을 두고 대총(大銃) 20자루, 호총(胡銃) 216자루를 보유하고 있었던 점을 통해 동북지역에 유입된 거주민들은 스스로 자치기구를 구성하고 안전을 위해 무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조직은 ‘회상제(會上制)’였는데, ‘대회두(大會頭)’, ‘도회두(都會頭)’ 등을 우두머리로 하여 민사(民事)와 병사(兵事)를 관장하고, 그 아래에 ‘회상(會上)’이 있어 각 촌락을 관리하였다.
본서와 같은 조선측의 국경선 주변지역에 대한 탐사 및 순찰업무를 통하여 주민거주형태와 생업관련 사항을 수시로 파악함으로서 청과의 국경분쟁 관련 외교교섭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효과적인 교섭을 시행할 수 있었다. 1885년(고종 22)의 「을유감계(乙酉勘界)」와 1887년(고종 24)의 『정해감계(丁亥勘界)」는 조·청간 국경에 대한 외교적 교섭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전체적으로 19세기 후반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대안지역의 조선인 거주상황, 생활상황, 청인과의 관계 등에 대한 중요 자료이다. 1994년에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江北日記·江左輿地圖·我國輿地圖-한국학 자료총서 2』에 全文이 영인·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고종대 조청국경지역의 범월과 잠채 등으로 인한 외교분쟁의 경위를 파악하고, 간도문제의 세부 사항을 확인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崔植仁, 「土地제도와 租稅制度 變遷의 民族史的 흐름에 관한 연구-北方彊域 民族經濟史 硏究를 위하여」, 『한국북방학회논집』2, 한국북방학회, 1996.
강석화 , 「19세기 북방 강역에 대한 인식」, 『역사와 경계』65, 부산경남사학회, 2007.
집필자 : 김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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