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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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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O.0000.0000-20090713.AS_BC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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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주해집 | 종교/풍속-유교 | 경부-예류
· 작성주체 김집(金集, 1574-1656)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목판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卷1冊 : 四周雙邊 半郭 22.1 x 15.0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 31.8 X 20.3 cm
· 주기사항 表題: 喪禮異同
版心題: 喪禮異同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4.17

안내정보

1649년(효종 즉위)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이 그의 나이 76세 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흉례(凶禮)를 『의례경전(儀禮經傳)』과 비교하여 그 이동(異同)을 분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첨가하여 효종에게 올린 예서(禮書)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저자 신독재 김집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다. 세거지는 충청도 연산(連山)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첨지중추부사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17세기는 한국예학사에서 ‘예학의 시대’로 일컬어지고 있다. 17세기 예학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이 시기의 예학이 특히 호서산림(湖西山林)을 중심으로 크게 발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호서산림의 예학은 김집의 부친인 김장생과 김집,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이유태(李惟泰, 1607-1684)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 호서산림들은 학문적으로 이이(李珥, 1536-1584)와 송익필(宋翼弼)(1534-1599)을 종사(宗師)로 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연원하고, 지역적으로는 호서에 속하며, 정치적으로는 서인계로서 김집 이후 산당(山黨)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17세기 학문과 사상, 정치를 주도한 대표적인 산림들이었으며, 무엇보다 조선의 예학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예학자들이었다.
김집은 이이의 학문을 받아 예학을 일으킨 부친 김장생을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 이황(李滉, 1501-1570)을 이어받은 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김집은 무엇보다 부친의 학통을 이어받아 예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다. 그리하여 아버지 김장생이 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나 신의경(申義慶)·김장생의 공저인 『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을 교정하고 편집, 간행할 뿐 아니라 스스로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을 편찬하는 등 예학 관련 활발한 학술 활동을 폈다.
18세 때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1623년 인조 반정 이후 정계에 진출, 부여현감, 임피현령, 동부승지·우부승지·예조참판·공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좌참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였다.
1883년(고종 2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본서 이외에 『의례문해속』이 있고, 1922년 돈암서원에서 간행한 『신독재선생전서(愼獨齋先生全書)』가 전한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1책으로 간행된 목판본이다. 내용은 크게 「투진차자(投進箚子)」, 범례(凡例), 본문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에 ‘상례이동(喪禮異同) 단(單)’으로 쓰여 있고, 내제에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부(附)’라고 쓰여 있다. 판식 사항을 살펴보면, 사주쌍변(四周雙邊)이며, 행관(行款)은 10행(行) 20자(字)이다. 판심(版心)은 전반적으로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나 간혹 ‘이엽’이 아닌 ‘삼엽(三葉)’으로 된 곳도 있다. 또 판심이 음각으로 된 곳도 있고 양각으로 된 곳도 있으며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판심제(版心題)는 「투진차자」와 범례 부분에서 ‘상례이동투진차자(喪禮異同投進箚子)’로 되어 있고, 본문에서는 모두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라고 되어 있다. 본문에는 또 『오례의』의 비교 대상서인 ‘『의례경전』’의 표기를 음각으로 새긴 곳도 있고 양각으로 새긴 곳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본문의 표기 방식은 상례 절차의 순서에 따라 그 절차에 해당하는 항목을 먼저 썼다. 이어서 『의례경전』, 『오례의』의 내용을 차례로 쓰고, 마지막에 ‘신안(臣按)’이라 하여 김집의 생각을 기재하였다. 항목은 한 글자 내려서, 『의례경전』의 내용은 극항(極行)에, 『오례의』의 내용은 한 글자 내려서, ‘신안’은 두 글자 내려서 썼다. 대개 고례는 『의례경전』을 위주로 참고했지만 『서경(書經)』의 주서(周書), 『가례(家禮)』, 『통전(通典)』등도 확인된다.
본서는 목차가 없으며,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 또한 없다. 그러나 본서를 편찬하게 된 배경은 본서에 수록된 김집이 올린 차자의 내용에 잘 드러나 있다.
다음은 본서의 내용이다. 먼저 김집이 효종에게 올린 「투진차자」이다. 「투진차자」는 1649년 그가 공조참판에 재직하던 시절 효종에게 본서를 올리면서 함께 올린 차자이다. 이때 그의 나이 76세였다. 본서에 수록된 「투진차자」의 내용은 일부이고 차자의 전체 내용은 『효종실록(孝宗實錄)』에 수록되어 있다. 차자의 전체 내용 가운데 본서를 편찬하게 된 배경 부분만을 「투진차자」에 수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김집은 차자에서 지금 효종이 인조의 국상(國喪) 중인데, 국상 절차가 고경(古經)과 국제(國制)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지만 국제인 『오례의(五禮儀)』만을 준수할 경우 미진한 바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하였다. 무엇보다 『오례의』가 당나라의 『개원례(開元禮)』를 많이 참조하여 오래전부터 예를 강론하는 사람들이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정이(程頤, 1033-1107)와 주희(朱熹)(1130-1200) 등의 예설(禮說)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자신이 올리는 책자는 초종(初終)부터 길제(吉祭)까지 고례(古禮)와 『오례의』를 함께 기록하되 조목마다 같은 점과 다른 점, 빠진 점과 추가된 점을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다음은 편찬 원칙과 서술 방식을 적은 범례로, 모두 5가지 조항으로 되어 있다. 범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례를 위주로 하되 국제를 참고하여 동이득실(同異得失)을 나타낸다. 간혹 논의가 필요한 곳은 자신의 생각으로 증정(証正)한다. 초상(初喪)부터 길제까지 조목과 차례를 한결같이 고례대로 하되 긴요하지 않은 것은 뺀다. 마땅히 행해야 할 절목(節目)인데 혹 누락된 곳이 있으면 다른 예서를 참고하여 보충한다’ 등이었다.
다음은 본문이다. 본문은 죽기 직전 유언(遺言)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고명(顧命)에서 상례 절차를 마친 뒤 지내는 길제(吉祭)까지의 상례 과정을 수록하고 있다. 상례 과정을 보여주는 항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고명(顧命), 초종(初終), 복(復), 역복불식(易服不食), 시사전(始死奠), 계신민(戒臣民), 천시설치철족유당(遷尸楔齒綴足帷堂), 명부(命赴), 곡위(哭位), 수함수폐옥(受含襚幣玉), 위명(爲銘), 진목욕습명의반함빙반지구(陳沐浴襲明衣飯含氷槃之具), 목욕(沐浴), 습반함(襲飯含), 영좌(靈座), 설명정(設銘㫌), 고사묘(告社廟), 진소렴의전(陳小歛衣典), 구환질(具環絰), 소렴(小歛), 단괄발문좌(袒括髮免髽), 봉시이우당배빈(奉尸夷于堂拜賓), 습대질소렴전(襲帶絰小歛奠), 대곡(代哭), 설료(設燎), 진대렴의급빈전지구(陳大歛衣及殯奠之具), 철소렴전(徹小歛奠), 대렴(大歛), 빈(殯), 성복(成服), 진보기(陳寶器), 의려(倚廬), 조석곡(朝夕哭), 조석전(朝夕奠), 삭월월반은전(朔月月半殷奠), 복택(卜宅), 정곽(井椁), 헌명기(獻明器), 복장일(卜葬日), 진조조전(陳朝祖奠), 계(啓), 조조전천거마(朝祖奠薦車馬), 식관(飾棺), 진명기(陳明器), 조전(祖奠), 시(諡), 견전(遣奠), 구행(柩行), 지광(至壙), 폄(窆), 작주(作主), 우(虞), 반곡(反哭), 파조석전(罷朝夕奠), 졸곡(卒哭), 부(祔), 연(練), 대상(大祥), 담(禫), 길제(吉祭) 등이다.
서지적 가치
『고금상례이동의』는 1922년 돈암서원에서 간행한 『신독재선생전서』(이하 돈암서원본)에 수록되어 있다. 돈암서원본이 현재 『한국예학총서(韓國禮學叢書)』(民族文化 2008년 영인본)와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민족문화추진회 2001년 영인본) 등에 수록되면서 널리 읽히고 있다. 본서와 돈암서원본의 차이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판심에서 본서가 ‘상하내향이엽(삼엽)화문어미’로 되어 있지만 돈암서원본은 상내향흑어미(上內向黑魚尾, 간혹 매화점이 들어간 것도 있음)로 되어 있다. 둘째, 김집이 주요하게 참고한 ‘『의례경전』’의 표기를 본서에는 음각 혹은 양각으로 새긴 것이 섞여있고, 양각으로 새겼더라도 의례경전을 표기할 때에는 ‘(儀禮經傳)’이라고 하여 ()를 해 두었다. 반면, 돈암서원본에는 모두 양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의례경전’의 표기와 관련하여 ()를 하지 않았다. 셋째, 돈암서원본에는 목록이 있는 반면 「투진차자」의 내용이 누락되어 있고, 본서는 목록이 없는 대신 「투진차자」를 수록하고 있다. 돈암서원본에는 「투진차자」 부분이 『신독재전서』에 「봉사(封事)」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넷째, 본서의 표기 방식이 상례 절차에 해당하는 항목의 경우 한 글자 내려서 쓴 데 반해, 돈암서원본에는 두 글자를 내려서 썼다.
『고금상례이동의』는 돈암서원본 이외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하 규장각본)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하 장서각본)에 소장된 『의례문해속』에 부록된 것이 있다. 규장각본(청구번호 奎 5731)과 장서각본(청구번호 K1-92)이 본서와 형태적으로 거의 동일하여, 판식주기라든가 본문의 표기 방식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
규장각본은 본서와 동일한 책으로 보인다. 『의례문해속』이 끝나자, 내제에 ‘고금상례이동의부’라고 쓰여 있고, 목록이 없으며, 내용이 「투진차자」, 범례,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 등 거의 차이가 없다. 다만, 본서는 목판에 찍을 때 목판이 많이 마모되어서인지 글자가 뭉개진 곳이 많음에 비해 규장각본은 글자가 매우 선명하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장서각본은 몇 가지 차이를 노정하고 있는데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의례문해속』이 끝나자마자 바로 『고금상례이동의』의 본문으로 이어져 『고금상례이동의』와 관련해서 별도의 표지가 없다. 또 목록과 「투진차자」 및 범례가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난외 상단에 상례의 항목을 두주(頭註)로 써 놓은 점 등이 본서와 달랐다.
그 밖에 『고금상례이동의』는 국립중앙도서관에 2종 정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1종은 『의례문해』(청구번호 古159-108)에 『의례문해속』과 『고금상례이동의』를 함께 수록하고 있는 책이다. 『의례문해』에 부록되어 있는 이 『고금상례이동의』는 필사본이고, 계선(界線)이 없으며, 목록도 없고, 내용은 본문, 「투진차자」, 범례의 순서로 되어 있다. 나머지 1종은 목판본 『고금상례이동의』(청구번호 의산古5213-15)로, 판식주기라든가 본문의 표기 방식 및 내용의 순서, 곧「투진차자」, 범례, 본문으로 되어 있는 것은 거의 동일하다. 다만, ‘길제’ 항목에서 ‘오례의’의 내용과 ‘고금상례이동의종(古今喪禮異同議終)’ 사이에 작은 글씨로 내용을 더 수록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와 같이 국내에 『고금상례이동의』는 여러본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본서는 위와 같은 여러 본과의 대조 및 교감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내용적 가치
조선전기의 예 운영 체제는 왕실례(王室禮)로 대표되는 『국조오례의』와 여말 주자성리학과 함께 도입된 사대부(士大夫)의 예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주자가례』가 보편화되어 갔고, 왕례(王禮)와 함께 사례(士禮)를 적용하면서 왕실과 일반 사대부들에게는 사회 구성체 논리로 예론이 자리를 잡아갔다. 『주자가례』의 보편화로 인한 여러 갈등이 정치사·사회사 속에서 계속 문제가 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왕실 전례와 관련해서는 현종대부터 정치적으로 쟁점화되었다. 현종대에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두 차례의 복제예송(服制禮訟)으로 큰 논란이 일었던 시기였다.
현종대 복제예송이 시작되기 전 그러한 쟁점의 단서로 본서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국조오례의』가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뒤 국가전례서로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해 오다가 임진·병자 양란으로 인해 조선 사회가 큰 변화를 겪으면서 국가전례의 수정이나 보완이 불가피한 상황에 닥쳤다. 그러한 문제점을 조목마다 지적하여 예서로 편찬한 것이 바로 본서였고, 이는 서인의 정치사상적 이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서인들은 기본적으로 왕실이나 사대부 모두에게 『주자가례』를 적용하여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왕실도 사대부와 같은 예를 적용시키자는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 국제인 『국조오례의』는 국전(國典)인 『경국대전』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녔다. 그런데 의례 가운데 가장 어렵다고 한 『국조오례의』의 흉례를 『의례경전』을 중심으로 조목조목 문제점을 제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상례 절차를 『주자가례』에 가깝게 재편한 것은 매우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본서는 17세기 예학 연구만이 아니라 이 시기 정치 사상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 『고금상례이동의』는 1788년(정조 12)에 기존의 국가전례서를 총 집대성한 『춘관통고(春官通考)』의 「흉례」에도 반영되는 등 예학을 연구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예서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기범, 「17세기 호서예학파의 예학사상 -왕조례(王朝禮)의 인식을 중심으로-」, 『韓國思想과 文化』 26, 韓國思想文化學會, 2004.
집필자 : 이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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