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선천규관(先天窺管)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O.0000.0000-20090716.AS_SA_207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주해집 | 종교/풍속-유교 | 경부-역류
· 작성주체 신흠(申欽, 1566-1628)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揷圖 , 四周雙邊 半郭 19.4 x 13.5 cm, 有界, 10行20字, 無魚尾 ; 28.7 X 18.7 cm
· 주기사항 後識: 萬曆四十六年歲舍戊午(光海10,1618)閏夏下澣東陽後人申欽書于壽春寓舍
後識: 萬曆庚申(光海 12, 1620)立冬東陽申欽書
備考: 徐有榘(1764-1845)의 自然經室 寫本의 하나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6.42

안내정보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의 선천역학(先天易學)에 관한 저술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상촌 신흠은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현옹(玄翁)·방옹(放翁),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통칭되는 조선중기 한문학사대가(漢文學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개성도사(開城都事) 신승서(申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송인수(宋麟壽)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6위로 급제하였다. 선조 때에는 이조정랑(吏曹正郞)·병조참판(兵曹參判)·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고, 인조 때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김제남(金悌男)과 연루되었다는 것으로 가죄(加罪)되어 춘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621년(광해군 13) 사면되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하여 벼슬하기 전부터 문명(文名)을 떨쳤고, 벼슬한 후에는 이이(李珥, 1536-1584)·정철(鄭澈, 1536-1593)을 옹호한 것으로 인해 배척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저술들은 『상촌집(象村集)』으로 묶여있다. 『선천규관(先天窺管)』은 권55에 수록되어 있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총 60장으로 되어 있으며, 3장에 “東陽 申欽 纂”라고 적혀 있다. 동양(東陽)은 평산의 옛 별호이다. 또한 홀수쪽에 “自然經室藏”이라고 표기된 것을 보면 이 판본이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소장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장부터 30장까지는 『선천규관』의 본문에 해당되는 글이다. 이 부분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18장부터 29장까지 “화담 서씨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대수(大數)를 추출하였다.(花潭徐氏, 抽出經世大數.)”라고 하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견해를 인용하고 30장에서는 화담의 역학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29장 말미에서 “서씨가 추산한 것은 명쾌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여기에 기록하여 후학들이 참고할 자료로 제공한다.(徐氏所推, 可謂哲矣. 玆記于此, 以備後學參詳.)”라고 하여 화담의 추산을 긍정하고 있다. 이런 점들은 상촌이 화담의 역학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0장부터 44장까지는 『주역』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설(說)」이 수록되어 있다. 「讀易說」, 「七八九六說」, 「由圖爲卦說」, 「二始說」, 「已生未生說」, 「先天圖說」, 「貞悔說」, 「文王八卦方位說」, 「經世衍易圖說」이 있다.
44장부터 55장까지는 『황극경세서』의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萬物動植之數」, 「聲音之數」, 「陰陽爲聲音」이 있다.
55장부터 59장까지는 2편의 「발(跋)」이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발」에는 “萬曆四十六年, 歲舍, 戊午閏夏下澣, 東陽後人申欽, 書于壽春寓舍.”라고 적혀 있고, 두 번째 「발」에는 “萬曆庚寅立冬, 東陽申欽書.”라고 적혀 있다. 첫 번째 「발」에서 만력46년은 1618년(광해군 10) 이고 수춘(壽春)은 춘천의 옛 이름이므로 『선천규관』은 춘천으로 유배되었을 당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발」은 2년 후인 1620년(광해군 12)에 지은 것으로 역시 춘천 유배지에서 지은 것이다.
서지적 가치
상촌의 『선천규관』은 현재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은 없고, 『상촌집』의 일부로 영인되거나 역학저술 가운데 일부로 출판되어 있다. 현재 3곳에서 영인·출판되었는데, 1978년 경문사(景文社)에서 『상촌집』을 영인·출판했으며 1996년 보경문화사(保景文化社)에서 『상촌집』을 영인 출판했다. 1996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한국경학자료집성(韓國經學資料集成)』88 가운데 하나로 『선천규관』을 영인·출판하였다. 이 3개는 동일본을 영인한 것으로 보인다. 『상촌집』이 번역되었기 때문에 『선천규관』도 번역된 『상촌집』 안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본과 원문을 인터넷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한국경학자료시스템에서도 원문을 인터넷으로 서비스한다.
본서는 기존에 영인 출판된 것들보다 글자와 그림이 명확하며 정서(正書)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기존의 판본과는 다른 판본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오탈자는 현재 출간된 영인본과 동일하다. 오탈자만 수정하면 영인 출판하기에 충분한 자료이다. 경문사에서 영인한 『상촌집』과 『한국경학자료집성』88의 일부로 영인된 『선천규관』은 표점(標點)이 있는데 반하여 본서는 표점이 되어있지 않아 불편한 감이 있다.
또, 부호의 표기에 오류가 보인다. 15장에 ‘○’한 부호가 4번 표기되어 있다. 이 부분은 『황극경세서』 「경세성음도(經世聲音圖)」에 나오는 부호를 설명한 부분으로 첫 번째는 ‘○’로 표기되어야 하고, 두 번째는 ‘□’로 표기되어야 하고, 세 번째는 ‘●’로 표기되어야 하고, 네 번째는 ‘■’로 표기되어야 한다.
「발」도 문제가 있다. 「발」2편이 구분 없이 연이어 있다. 이것은 기존의 영인본에서도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발」이라는 표기 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마치 「陰陽爲聲音」의 일부로 보여진다. 실제 『상촌집』을 번역한 민족문화추진회본 번역출판본이나 인터넷을 서비스본 모두 「陰陽爲聲音」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읽어보면 「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이므로 독자가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내용적 가치
상촌의 『선천규관』은 3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저술이다. 첫째, 『선천규관』은 철학저술이라는 점이다. 상촌은 흔히 조선중기 한문학사대가로 잘 알려져 있고, 기존의 연구성과도 한문학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선천규관』은 문학저술이 아닌 철학저술이다. 『선천규관』뿐만 아니라 『휘언(彙言) 一』, 『구정록(求正錄) 上』, 『구정록(求正錄) 下』 등에서도 역학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선천규관』은 상촌의 역학사상이 집약된 핵심 저술이다. 이는 상촌이 문학적 분야뿐만 아니라 철학 특히 역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둘째, 선천역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선천역학은 소옹(邵雍, 1011-1077)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촌은 어렸을 때부터 소옹의 『황극경세서』를 보기 좋아했으며, 북경으로 돈을 보내 『소자전서(邵子全書)』를 구해볼 만큼 소옹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였다. 또, 『주역』을 이해하는데 공이 있는 학자인 공자(孔子), 정자(程子), 소자(邵子), 주자(朱子)를 언급하고 “이 가운데 소자가 서술한 것을 창작의 공이 있으니 소자가 없었더라면 희도(羲圖)가 사라질 뻔하였다(邵之述有作者之功, 微邵則圖其晦乎)”라고 하여 소옹의 공을 높이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선천역학 혹은 『황극경세서』를 연구한 글로는 서경덕의 「聲音解」·「皇極經世數解」·「六十四卦方圖之圖解」가 있고 신흠의 『선천규관』이 있고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선천사연(先天四演)』이 있을 뿐이다. 『황극경세서』는 『성리대전(性理大全)』에 포함되어 있지만 매우 어려운 글이다. 그만큼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이다. 상촌의 『선천규관』은 『황극경세서』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을 풀어줌으로써 『황극경세서』를 이해할 수 있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선천역학의 가교(架橋)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경덕은 16세기 인물이고 신흠은 17세기 인물이며 서명응은 18세기 인물이다. 신흠의 『선천규관』은 서경덕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을 서명응에게 전해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서명응이 지속적으로 선천역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신흠의 『선천규관』과 같은 저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천규관』은 서경덕의 것을 상당부분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경덕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명응은 서경덕이나 신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선천사연』과 같은 저술이 나올 수 있었다. 신흠의 『선천규관』은 선천역학에 관한 몇 안 되는 저술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선배에게 받은 것을 후배에게 물려주는 가교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저술이다.
참고문헌
박희병, 「申欽의 學問과 그 思想史的 位置」, 『民族文化』20, 민족문화추진회, 1997.
서근식, 「象村 申欽의 先天易學에 관한 硏究」, 『東洋古典硏究』20, 동양고전학회, 2004.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西人 象數學風의 형성과 그 의미」, 『한국사연구』115, 한국사연구회, 2001.
황광욱, 「邵雍의 觀物을 통해 본 徐敬德 哲學의 一面」, 『東洋古典硏究』13, 동양고전학회, 2000.
집필자 : 서근식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