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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고변(詩故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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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O.0000.0000-20150331.NS_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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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주해집 | 종교/풍속-유교 | 경부-시류
· 작성주체 서형수(徐瀅修, 1749-1824) 집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인찰공책지)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9세기]
· 형태사항 6卷3冊 : 上下單邊 左右雙邊 半郭 19.5 × 13.4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中黑口無魚尾 ; 31.6 X 21.0 cm
· 주기사항 表題: 詩故辨
書根題: 詩
專用印札空冊表示(版下口): 自然經室藏(徐有榘, 1764-1845)
序: 乾隆四十八年癸卯(1783)…趙雪颿序
凡例(3張)
· 현소장처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 청구기호 韓4-50

안내정보

6권 3책 고본(稿本)인 『시고변(詩故辨)』은 명고(明皐) 서형수(徐瀅修, 1749-1824)가 저술한 『시경(詩經)』주석서이다. 이 주석서는 시가 창작된 연유에 대해 주로 검토한 저술로, 소서(小序)부터 제가(諸家)의 설들을 주석가의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있는 구성을 하고 있어, 소서(小序)를 주자(朱子)의 설과 동등하게 취급함으로써 주자의 설을 맹신하는 말학(末學)의 고루함을 배격한 특징이 있는 저술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명고(明皐) 서형수(徐瀅修, 1749-1824)는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차남으로 태어나, 계부(季父) 서명성(徐命誠, 1731-1750)에게 출계(出系)하였다. 본관은 대구(大邱)이고, 자(字)는 여림(汝琳)·유청(幼淸), 호(號)는 명고(明皐)·오여헌(五如軒)이다.
서형수 집안은 대대로 조정(朝廷)의 중신(重臣)을 지냈다. 6대조인 서성(徐渻, 1558-1631, 號 藥峯, 諡號 忠肅)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고, 5대조인 서경주(徐景霌, 1573-1654)는 선조(宣祖)의 부마(駙馬)로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진 인물이다. 증조부 서문유(徐文裕, 1651-1707)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조부 서종옥(徐宗玉, 1688-1745)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숙부 서명선(徐命善, 1728-1791, 號 歸泉)은 정조(正祖)를 옹립한 공이 있어서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리고 생부 서명응과 서형수의 형인 학산(鶴山) 서호수(徐浩修, 1736-1799)와 함께 정조대(正祖代) 문화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유명하다. 서명응은 영조대(英祖代)에 문형(文衡)을 지냈고, 영(英)·정조대(正祖代)의 국가 편찬사업에서 편찬사업의 관리자이자 실무자로 활동하며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保晩齋剩簡』 등 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이고, 서호수는 『문헌비고(文獻備考)』, 『규장총목(奎章總目)』을 편찬한 인물이다. 한편, 조선후기 대표적인 백과전서식 유서(類書)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편찬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서호수의 친아들로 서형수에게 조카가 된다.
서형수는 1773년(영조 49) 진사가 되었고, 1783년(정조 7) 증광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고, 그 해에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다. 초계문신 시절 그는 정조의 명을 받아 『중용강의(中庸講義)』(1785년)·『대학강의(大學講義)』(1785)·『논어강의(論語講義)』(1785)·『맹자강의(孟子講義)』(1785)·『상서강의(尙書講義)』(1785) 등을 편찬하였고 『대학유의(大學類義)』(1799)·『사서집석(四書輯釋)』(1799)·『주공서(周公書)』(1800) 등의 편찬에 관여하였다. 이후 1806년(순조 6) 경기관찰사로 있던 서형수는 김달순 옥사가 일어나 김달순의 모주(謀主)로 지목되어 추자도로 유배되었고, 유배생활은 계속되어 1823년 추자도에서 전라도 임피현(臨陂縣)으로 이배되어 그 다음 해 1824년에 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명고전집(明皐全集)』과 『시고변(詩故辨)』 등이 있다.
주요 교유 인물로는 성대중(成大中, 1732-1812),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유금(柳琴, 1741-1788), 李喜經(1745-?), 柳得恭(1748-1807), 李喜明(1749-?) 등이 있다. 이들은 이른바 '연암그룹' 또는 '연암일파(燕巖一派)'의 인물들이고 서형수도 이들과의 교유와 그의 고증학풍(考證學風)으로 인해 '연암일파(燕巖一派)'로 언급되기도 한다.
구성 및 내용
『시고변(詩故辨)』은 6권 3책으로, 『시경(詩經)』 311편 전편에 대한 설명을 싣고 있다. 권1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 권2는 패풍(邶風), 용풍(鄘風), 위풍(衛風), 왕풍(王風), 권3은 정풍(鄭風), 제풍(齊風), 위풍(魏風), 권4는 당풍(唐風), 진풍(秦風), 진풍(陳風), 회풍(檜風), 조풍(曹風), 빈풍(豳風), 권5는 소아(小雅), 대아(大雅), 권6은 주송(周頌), 노송(魯頌), 상송(商頌)이 수록되어 있다.
각 편에는 소서(小序)와 주자(朱子)의 『시집전(詩集傳)』을 수록하고 있고, 설명은 소서(小序)와 이와 관련한 제가(諸家)의 설, 『시집전(詩集傳)』과 이와 관련한 제가(諸家)의 설, 그리고 서형수 자신의 안설(按說)의 순서대로 실었다. 제가(諸家)의 설은 학자의 시대 순서에 따라 실었다. 서형수가 인용한 학자들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명

자/호

생몰년

시대

서   명

인용

횟수

左丘明

 

B.C.556~B.C.451

『春秋左傳注疏』

5

賈誼

賈生

B.C.200~B.C.168

前漢

『新書』

2

韓嬰

 

B.C.200~B.C.130

前漢

『韓詩內傳』

4

杜䕫

 

未詳

前漢

 

2

毛萇

 

未詳

前漢

『毛詩注疏』

26

孔安國

子國

未詳

前漢

『詩經正義』

2

劉向

子政

B.C.79~B.C.8(?)

前漢

『古列女傳』

5

鄭玄

康成

127~200

後漢

『毛詩箋』

76

王肅

子雍

195~256

『孔子家語』

陸璣

元恪元凱

261~303

『毛詩草木鳥獸蟲魚疏』

1

杜預

元凱

222~284

『春秋左傳注疏』

1

陸元朗

德明

550(?)~630

『經典釋文』

4

孔穎達

仲達, 沖澹

574~648

『毛詩注疏』

88

賈公彦

 

未詳

『周禮注疏』

1

杜佑 

君卿

735~812

『通典』

1

歐陽修

永叔, 廬陵

1007~1072

北宋

『詩本義』

18

劉彛

執中, 長樂

1017~1086

北宋

 

1

劉敞

原父, 公是

1019~1068

北宋

『詩經小傳』

1

張載

子厚

1020~1077

『張載全書』

1

章如愚

俊卿

未詳

『新刻山堂詩考』

1

王安石

介甫, 臨川

1021~1086

北宋

『王荊公詩注』,『詩經新義』

2

程頤

伊川, 正叔

1033~1107

北宋

『程氏經說』

11

蘇轍

子由, 潁濱

1039~1112

北宋

『詩解集傳』

17

范祖禹

淳夫, 華陽

1041~1098

北宋

『詩解』

2

陸佃

農師 

1042~1102

北宋

『埤雅』 

2

胡安國

康侯,文定

1074~1138

北宋

 

1

董逌

彦遠 

未詳

北宋

『廣川詩故』

1

廖剛

用中,高峰

1070~1143

北宋

『詩經講義』

1

鄭樵

漁仲, 夾漈

1104~1162

南宋

『詩辨妄』

曹粹中

純老

未詳

南宋

『放齋詩說』

4

陳鵬飛

少南

未詳 

南宋

『詩解』

2

李樗

迂仲

未詳

南宋

『毛詩李黃集解』

14

林之奇

少潁

1112~1176

南宋

 

1

范處義

逸齋

未詳

南宋

『詩補傳』

28

朱熹

元晦, 晦菴

1130~1200

南宋

『詩集傳』

『詩序辨說』

『詩集解』等

310

4

5

張拭

敬夫, 南軒

1133~1180

南宋

『經筵詩講義』

1

呂祖謙

伯恭, 東萊

1137~1181

南宋

『呂氏家塾讀詩記』

21

黃櫄

實夫

未詳

南宋

『毛詩李黃集解』

6

輔廣

漢鄕,潛庵,

未詳

南宋

『詩童子問』

10

段昌武

子武

未詳

南宋

『段氏毛詩集解』

1

嚴粲

明卿,坦叔

未詳

南宋

『詩緝』

16

黃震

東發

1213~1280

南宋

『讀詩一得』

4

金履祥

吉甫, 仁山

1232∼1303

南宋

『資治通鑑前篇』 

1

胡一桂

庭芳, 雙湖

1247~?

『讀詩』

4

吳澄 

幼淸, 草廬 

1249~1333

『吳文正集』

1

馬端臨

貴與

1254~1323

『文獻詩考』

1

許謙

益之

1270~1337

『詩集傳名物鈔』

3

劉瑾

公瑾, 安成

?~1510

『詩傳通釋』

9

朱倬

孟章

1086~1163

『詩經疑問』

1

朱公遷

克升

未詳

『詩經疏義會通』

4

蔣悌生

仁叔

未詳

『詩經蠡測』

2

張彩

還白, 尙質

?~1510

『詩原』

1

呂柟

仲木, 涇野

1479~1542

『毛詩說序』

1

季本

明德, 彭山

1485~1563 

『詩說解頤』

1

鄒泉

嶧山

未詳

『詩經說約』

2

徐常吉

士彰, 儆弦

未詳

『詩論辨』

1

郝敬

仲興, 楚望

1558~1639

『毛詩原解』

8

徐光啓

子先

1562~1633

『詩經傳稿』

1

張次仲

宗一

1589~1676

『待軒詩記』

1

何楷

元子

1594~1645

『詩經世本古義』

6

吳肅公

雨若

1626~1699

 

2

胡紹曾

元岵

未詳

『詩經胡傳』

1

顧炎武

寧人, 亭林

1613~1682

『日知錄』

1

毛奇齡 

西河

1623~1716

『詩傳詩說駁義』

2

李因篤

子德, 天生

1632~1692

『古今韻考』

1

李光地

晋卿

1642~1718

『詩所』

王鴻緖 

季友

1645~1728

『欽定詩經傳說彙纂』

65

그리고 서형수 자신의 안설(按說)은 필요에 따라 수록하여 총론 포함 모두 62조가 있는데, 대부분이 풍(風)에 실려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시경(詩經)』 해석에 있어서 작자 문제와 음시설(淫詩說) 문제 같은 논란이 풍(風) 부분에 많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안설(按說)은 주남(周南)에 3조, 召南(소남)에 4조, 패풍(邶風)에 3조, 위풍(衛風)에 5조, 왕풍(王風)에 3조, 정풍(鄭風)에 8조, 제풍(齊風)에 4조, 위풍(魏風)에 1조, 당풍(唐風)에 3조, 진풍(秦風)에 2조, 진풍(陳風)에 5조, 빈풍(豳風)에 4조, 소아(小雅)에 7조, 대아(大雅)에 3조, 주송(周頌)에 4조, 노송(魯頌)에 1조, 상송(商頌)에 1조가 실려있다.
서형수는 자신의 견해와 궤를 같이 하는 제가(諸家)의 설을 선택하여 인용하면서, 필요에 따라 자신의 안설을 수록하여 자신의 시경론(詩經論)을 전개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소서(小序)를 중심으로 『시경(詩經)』을 해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주자(朱子)의 음시설(淫詩說)을 비판적으로 대하는 것이 그것이다.
서지적 가치
본서는 판심에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판심제 원고지에 쓰여진 필사본이다.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판심제 원고지는 서형수의 조카인 서유구가 쓰던 원고지이다. 서유구는 풍석암(楓石庵)과 자연경실(自然經室)이라는 자신의 서재를 만들었는데, 풍석암(楓石庵)은 서유구가 젊었을 때 사용한 서재 이름이다. 서유구는 젊었을 때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판심제 원고지를 만들어, 자신의 저작 뿐 아니라 직접 구할 수 없었던 서적을 필사하여 소장하였고, 정계에서 은퇴할 때 쯤인 1837년(헌종 3) 번계(樊溪)에 살 곳을 정하고 자연경실(自然經室)이라는 서재를 꾸민 뒤,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판심제 원고지를 만들어 자신의 저작 및 주변 인물들의 저작을 정리하였다. 서형수의 『시고변(詩故辨)』도 이러한 서유구의 정리과정에서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것이다. 참고로 서유구의 저작 및 장서 대부분은 사토 로쿠세키(佐藤六石, 1864-1927) 수집본이 있는 日本 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과 아사미 겐타로(淺見倫太郞, 1869-1943) 수집본이 있는 UC Berkeley의 淺見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장서들에서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판심제 원고지 필사본과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판심제 원고지 필사본을 볼 수 있다.
『시고변(詩故辨)』에 실려있는 청나라 조설범(趙雪颿)의 서문을 보면 1783년(건륭 48, 정조 7)에 쓰여졌고, 서형수의 몰년도 1824년(순조 24)이기 때문에, 서유구의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것은 『시고변(詩故辨)』이 완성된 후 꽤 오랜시기임을 알 수 있다. 서유구의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 필사본 중 서씨 일가의 저작은 대부분 여러 번의 필사과정을 거쳐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로 정리가 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 『시고변(詩故辨)』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정리된 것으로 보이고, 그 이전의 필사본은 보이지 않아, 현재는 유일본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한편,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日本 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의 『시고변(詩故辨)』을 1987년 복사하여 소장하고 있다.
내용적 가치
서형수는 스스로 주자학(朱子學)을 발양하는 데 평생의 힘을 기울였다고 술회하였다. 서형수는 소서(小序)와 집전(集傳)을 함께 수록하고 고금(古今)의 제설(諸說)을 취하여 편의 뜻을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시고변(詩故辨)』을 저술하였다고 凡例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는 주자의 『시집전(詩集傳)』에서 빠뜨린 것에 대한 보완이면서 주자학에 공을 세우는 것이라고 표방하였다. 이는 서형수를 포함한 서명응 일가의 학문적 특징인 고증적인 학풍을 보이는 것으로, 주자학에 의존하지 않고 여러 설들을 절충하는 학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시고변(詩故辨)』의 구성은 청나라 왕홍서(王鴻緖, 1645-1728)가 편찬한 『흠정시경전설휘찬(欽定詩經傳說彙纂)』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데, 『흠정시경전설휘찬(欽定詩經傳說彙纂)』이 서형수와 서유구의 글에서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서형수가 『시고변(詩故辨)』을 저술할 때 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흠정시경전설휘찬(欽定詩經傳說彙纂)』은 제가(諸家)의 설들을 빠짐없이 수록한 것으로 보이는 반면, 『시고변(詩故辨)』은 서형수의 편집의도에 따라 일부만 인용하여 저술되었다. 조선후기 주자의 학설을 맹신하는 말학(末學)의 인습과 고루함을 배격하고, 청나라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의리와 고증을 함께 밝히는 학문의 특징과 조선후기 시경론의 한 면을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윤선영, 「明皐 徐瀅修의『詩故辨』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심경호, 『朝鮮時代 漢文學과 詩經論』, 일지사, 1999.
한민섭, 「서명응(徐命膺) 일가(一家)의 박학(博學)과 총서(叢書)·유서(類書) 편찬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집필자 : 한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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