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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로(訂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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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O.0000.0000-20160331.NS_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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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주해집 | 종교/풍속-기타종교 | 자부-도가류
· 작성주체 홍석주(洪奭周, 1774-1842)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인찰공책지)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9세기]
· 형태사항 2卷1冊(96張) : 上下單邊 左右雙邊 半郭 19.5 × 13.5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中黑口, 無魚尾 ; 33.9 X 21.6 cm
· 주기사항 表題: 訂老
專用印札空冊表示(版下口): 自然經室藏(徐有榘, 1764-1845)
訂老題: 余出游于世二十有三年困而歸…
內容: 上卷, 42張. --下卷, 54張
· 현소장처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 청구기호 韓11-60

안내정보

조선 후기 노론 계열 학자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가 지은 『노자(老子)』 주석서이다. 2권 1책으로 이루어진 단행본으로, 「정로 권상(訂老卷上)」과 「정로 권하(訂老卷下)」로 구성된다. 서문에 해당하는 「정로제(訂老題)」가 있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정로(訂老)』를 지은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문인이다. 그의 자(字)는 성백(成伯), 호(號)는 연천(淵泉)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풍산 홍씨(蘴山洪氏)의 후예로 1774년(영조 50)에 한양 남부 공동(公洞)에서 태어났다. 22세 때인 1795년(정조 19)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다. 23세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29세에 사간원(司諫院) 검열(檢閱)과 한학교수(漢學敎授), 30세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44세에 대사간(大司諫), 57세에 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 58세에 사은사의 정사(正使)로 청나라를 다녀왔고, 61세(순조 34, 1834)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이처럼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생활을 하던 홍석주는 63세(헌종 2, 1836) 때 남응중(南膺中)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삭출되었다가 66세에 대왕대비의 특지(特旨)로 방석(放釋)되었다. 그리고 1842년(헌종 8) 69세의 나이로 마장리(瑪莊里)에서 생을 마쳤다.
홍석주는 김창협(金昌協)에서 김원행(金元行)으로 이어지면서 형성되어 왔던 석실(石室) 학맥과 관련이 깊은 노론 계열의 학자이다. 그는 경학의 연구에 정밀하였으며, 석실 학맥의 김매순(金邁淳, 1776-1840)과 함께 학문을 연찬하였다. 성해응(成海應)과 한학(漢學)·송학(宋學) 논쟁을 하였고,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상서(尙書)』 금문(今文)·고문(古文) 논쟁 등을 벌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좌씨(左氏)에 대해 서유구(徐有榘, 1764-1845)와 변증을 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서유구는 홍석주의 집안에 비전(秘傳)되던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활자본으로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인연을 갖기도 하였다.
홍석주는 도학자이지만 폐쇄적인 이단배척으로 경직된 정통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제자백가에 대해서도 폭넓은 관심을 가져, 『제자정언(諸子精言)』·『홍씨독서록(洪氏讀書錄)』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는 이단에 대해 맹목적이라 할 만큼 전면적 거부 태도로 서학(西學)이 밀려드는 19세기 전반기라는 시대를 돌파해 나갈 수 없음을 인식한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홍석주는 경학의 전통을 학문의 기준으로 확인하면서도, 관심의 폭을 제자백가에 광범하게 열어놓았으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노자』 이해에 많은 공을 들였다.
홍석주의 저작으로는 『삼한명신록(三漢名臣錄)』을 시작으로 『대상역전(大易象傳)』, 『학해(學海)』,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 『예기집설지의(禮記集說志疑)』, 『학강산필(鶴岡散筆)』, 『연천집(淵泉集)』 등이 전해진다.
구성 및 내용
2권 1책(96장)의 필사본으로 구성된 본서의 표제는 '정로(訂老)'이며, 그 아래에 단행본으로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는 '단(單)'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서문에 해당하는 「정로제(訂老題)」를 이어, 「정로 권상(訂老卷上)」(42장)과 「정로 권하(訂老卷下)」(54장)로 구성되어 있다. 전용인찰 표시는 없고, 판심版心 아랫부분에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이 적혀있다.
「정로 권상」은 『노자』 왕필본의 1-37장까지를, 「정로 권하」는 38-81장까지를 구분하여 주석하고 있다. 『노자』 원문을 각각 편장(篇章)으로 나누어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각 원문에 따라 홍석주의 주석이 붙어있다.
『정로』의 『노자』 원문은 원(元)나라 오징(吳澄, 1249-1333)의 『도덕진경주(道德眞經註)』를 주요 판본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정로』에서 30번에 걸쳐 오징의 『도덕진경주』를 인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석주는, 68장 체제로 구성된 『도덕진경주』와 달리, 81장 체제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81장 체제에서 23장·24장·25장 순서가 24장·25장·23장 순서로 연결되는 차이를 보인다.
『정로』에 인용된 서적은 34종 이상이다. 여기에는 제자서 및 역사서, 『노자』 주석서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서삼경과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유가 서적이 압도적으로 많다. 『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역경』·『좌전』·『예기』·『의례』·『주례』·『태극도설』·『주자어류』·『주희집』·『근사록』·『문선』·『당송팔가문』·『전국책』·『안자춘추』·『사기』·『송사』·『관자』·『한비자』·『손자병법』·『장자』·『주역참동계』·『통현진경』·『노자품절』·『도덕진경주』·『노자해』·『노자주』, 그리고 불경 등이 인용되었다.
『정로』에서 '정(訂)'이란 '바로잡는다[正]'는 의미이고, '로(老)'는 『노자』를 말한다. 그는 『노자』의 근본 취지를 세 가지로 파악하였다.
1. 욕심을 줄임으로써, 정신적 작용을 기른다[寡慾以養神].
2. 다투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응대한다[不爭以應世].
3. 일을 줄이고 살육을 제거함으로써 백성을 다스린다[省事去殺以治民].
그런데 이와 같은 근본취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세상에는 『노자』를 오해하는 여섯 가지 유형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법가인 형명(刑名), 병가(兵家), 도교 금단(金丹), 인륜을 저버리고 세상을 등지는 절속(絶俗), 죽림칠현과 같은 방탕한 데 빠져 거리낌이 없음[猖狂倨傲], 도교 재초부록(再醮符籙) 등이 오해의 구체적인 모습들이다. 홍석주는 "이러한 오해들은 모두 말할 거리도 못된다. 우리 유학자들이 또 저러한 이해방식으로 노자를 공격하는 경우가 있으니, 노자로부터 비웃음을 사지 않기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홍석주는 "노자의 본래 취지를 세상에 밝히고, 그 다음에 성인의 말씀과 합치되는 것은 스승으로 삼을 수 있고 합치되지 않는 것은 부분은 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직접 이 글을 써서 바로잡으니, 대개 노자를 바로잡은 것은 1/10이고, 세상에서 노자를 오해한 것을 바로잡은 것이 9/10이다[余謂老氏之本旨明於世, 而後其合於聖人者可師, 而其不合者亦可辨. 於是, 手爲是書, 以正之, 盖正老氏者什一, 正世之不知老氏者什九云.]"라고 하였다. 이처럼 『노자』 자체에 바로잡아야 할 문제점도 일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목한 것은 『노자』에서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긍정적 측면이었다.
홍석주는 『노자』의 도(道)를 『주역(周易)』·『중용(中庸)』의 도와 성리학의 리(理)와 연계하여 이해한다. 홍석주는 『노자』 1장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주석에서 "도는 자연이다[道者, 自然而已矣]"라고 명시적으로 밝힌다. 아울러 그는 자연(自然, 저절로 그러한 것)을 '영구하여 변질되지 않는 것[久而不變]', '항상된 것[常]'이라고 정의한다. 도가(道家) 계열의 『노자』 이해와 달리, 홍석주의 『정로』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부분은 '영구하여 변질되지 않는' 자연의 도를 두 가지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천지자연의 입장에서 이해한 도, 즉 하늘이 높고 땅이 두텁고 해와 달이 빛나고 산악이 우뚝 솟아있고 강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자연지도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입장에서 이해한 도, 즉 부자군신부부에서 통용되는 마땅히 행해야 하고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인륜지도를 말한다[久而不變者, 惟自然之道, 如天之高, 地之厚, 日月之明, 山岳江河之峙且流, 在人則父子君臣夫婦之倫, 亙萬古而不可易, 皆惟自然而已. 是所謂常也.]
도에 대한 이상의 이해에 바탕한 뒤, 홍석주는 "노자의 말은 비록 고원한 것 같으나, 사실은 두 가지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곧 사람을 내적인 측면에서는 청정함으로 욕심을 줄이게 하고, 외적인 측면에서는 겸손하고 부드러움으로써 자신을 남보다 낮추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알기 어렵고 행하기 어려운 것이겠는가? 이 두 가지 일이 진실로 오천언의 종지로, 천하 온갖 일의 핵심이다.[老子之言, 雖若高遠微玅者, 其實不過二端, 欲使人內淸靜而寡慾, 外謙柔以下人而已. 此豈有難知且難行哉? 蓋此二端者, 寔五千言之宗, 而天下萬事之君也.]"(70장 주석)라고 하였다. 나아가 『노자』의 정치론의 핵심적 주장인 무위(無爲)를 유가의 정치론과 다르지 않다고 역설한다. "『노자』의 '내가 무위하니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된다(我無爲而民自化)'를 포함한 네 구절은 『논어』「위정(爲政)」'덕으로 정치를 행한다'와, 『중용』33장의 '공경을 독실히 하여 천하가 태평해졌다'는 의미이다.[我無爲以下四句, 卽論語爲政以德, 中庸篤恭而天下平之意.]"(57장)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노자』의 대부분은 유가 성인의 말씀과 같이 스승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이에 비해 유가의 평정(平正)함과 달리, 『노자』의 도(道)·무(無)와 같은 개념이 변하여 이단으로 빠진 것들은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결국 홍석주는 『노자』의 미흡한 부분에 얽매여 이단으로 치부하는 데서 벗어나, 『노자』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붕당정치의 폐해와 서학의 범람에 직면했던 당시 현실의 문제를 해소하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지적 가치
기존에 국내에서 활용했던 『정로』는, 단행본으로 발견되지 않고, 『연천집(淵泉集)』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다. 이는 성균관대학교본, 연세대학교본, 이화여자대학교본 등에서 발견된다. 1934년에 한광수(韓光洙)가 펴낸 『연천집』과, 2002년에 민족문화추진회가 영인표점(影印標點)한 『연천집』(한국문집총간 293-294에 수록)이 모두 그것에 기반한 것이다. 그런데 이 판본들은 글씨가 단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탈자가 적지 않다. 그래서 민족문화추진회가 펴낸 『연천집』과 현대의 연구자들은 원문의 상당 부분을 수정하여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 도서관에서 발견된 금번 『정로』는 단행본인데, 이는 당시 홍석주의 『정로』가 일반에게 비교적 널리 읽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개인 문집의 형태가 사후에 제자들이 기존 자료를 수합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금번 『정로』 단행본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금번 『정로』 단행본의 저술과 발행 시기를 논의해보자. 「정로제」에 의하면, 그는 출사를 했던 22세로부터 23년 만에 곤경을 당해서 『노자』를 주석하였다[余出游于世, 二十有三年困而歸, 始杜門謝交而爲此]고 술회하므로, 『정로』의 저술 시기는 44세(1817, 순조 17) 무렵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판심 하단에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이 적혀있는데, 이는 소장자인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말년인 1837년에 번계(樊溪, 지금의 서울 번동 부근)에 살 곳을 정하고 자연경실(自然經室)을 꾸민 이후의 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금번 『정로』 단행본의 발행 시기는, 서유구가 자연경실을 만들고 생을 마치기 전까지의 기간인, 1837-1845년으로 고찰된다.
내용적 가치
금번 『정로』 단행본은 기존의 판본과 비교할 때, 가장 완정(完整)한 것으로 파악된다. 글씨가 단정할 뿐 아니라, 오탈자로 평가받았던 부분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번 『정로』 단행본은 기존의 판본과 비교할 때, 내용적으로도 가장 완정(完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홍석주는 『노자』의 무위(無爲)를 유가적 가치와 다르지 않다고 하여 긍정하는데, 기존 판본에서는 무위에 대해 미(美)·선(善)하지 않다고 함으로써 혼선을 빚는 반면, 금번 『정로』 단행본에서는 미·선하다고 하여, 그 혼선이 해소되어 있다.
2장 주석: 無爲之事, 不言之敎, 固是不美且善也(기존 판본) -> 固非不美且善也(금번 『정로』 단행본)
둘째, 홍석주는 일반인들의 잘못된 『노자』 이해 방식을 여섯 가지로 열거하면서, 첫 번째로 형명(刑名)을 언급하였다. 형명은 법가적 해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노자』36장에서 그런 혐의를 많이 두곤 했다. 그런데 기존 판본에서는 형명에 대한 비판이 분명하지 않은 반면, 금번 『정로』 단행본에서는 형명에 대한 비판임을 분명히 드러난다.
36장 주석 : 夫不得其意, 而得其言, 則流而爲利名權術者, 亦其勢之所必至, 固不容曲爲之諱也.(기존 판본) -> 夫不得其意, 而得其言, 則流而爲刑名權術者, 亦其勢之所必至, 固不容曲爲之諱也.(금번 『정로』 단행본).
참고문헌
금장태, 『한국유학의 『노자』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김학목 옮김, 『홍석주의 노자』, 예문서원, 2001.
조민환, 「洪奭周 『訂老』에 나타난 道論」, 『동양철학연구』 38, 동양철학연구회, 2004.
집필자 : 나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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