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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찬초(記事撰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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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역사서 | 사회-역사 | 사부-잡사류
· 작성주체 정태화(鄭太和, 1602-1673)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숙종연간(1674-1720)이후]
· 형태사항 1冊(66張) : 四周雙邊 半郭 21.1 x 15.6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向2葉花紋魚尾 ; 31.3 X 20.8 cm
· 주기사항 第1張墨書: 翼憲公在翰苑時史草(仁祖朝)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2-17

안내정보

『기사찬초(己巳撰草)』는 양파(陽坡) 정태화(鄭太和, 1602-1673)가 예문관의 전임사관으로 있을 때 작성한 가장사초(家藏史草)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찬자(撰者) 정태화는 형조판서를 지낸 정광성(鄭廣成, 1576-1654)과 창원황씨(昌原黃氏) 사이에서 1602년(선조35)에 장자로 태어났다. 조부는 좌의정을 지낸 정창연(鄭昌衍, 1552-1636)이다. 본관은 동래,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이다. 1624년(인조2)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628년(인조6)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과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629년(인조7)에 천거를 통해 예문관에 들어갔는데, 『기사찬초』는 이때 전임사관을 역임하면서 기술한 사초를 모아 보관한 가장사초(家藏史草)이다.
1630년(인조8)까지 정태화는 정언, 이조좌랑, 헌납, 세자시강원 설서, 장악원정, 통진현감 등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49년(인조27) 봄에는 우의정에 제수되어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이후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였고, 1651년(효종2)에 조정으로 돌아와 영의정을 지냈다. 총 다섯 번에 걸쳐 영의정 역임하였고, 1673년(현종14)에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680년(숙종6)에 숙종으로부터 익헌(翼憲)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정태화 집안은 동서분당 이후 당색을 동인⟶북인⟶대북⟶서인 등으로 바꾸며 번성하였다. 특히 인조반정(1623)을 계기로 서인이 되었다. 정태화는 부인 여흥 민씨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첨정(僉正) 정재대(鄭載岱)이고, 차남은 승지(承旨) 정재숭(鄭載嵩, 1632-1692)이며, 3남은 부솔(副率) 정재악(鄭載岳)이다. 4남은 별검(別檢) 정재항(鄭載恒)이고,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을 쓴 5남 정재륜(鄭載崙, 1648-1724)은 숙정공주(淑靜公主)를 아내로 맞아 동평위(東平尉)라는 작호(爵號)를 받았고, 숙부인 정치화(鄭致和)에게 출후(出後)하였다. 3녀는 현감(縣監) 이명기(李命耆)와 사인(士人) 이두령(李斗齡), 송규성(宋奎成)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저서로는 『양파유고(陽坡遺稿)』와 『양파연기(陽坡年紀)』가 있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표지에 ‘기사찬초’라는 표제가 있다. 표제지에는 “익헌공재한원시사초 인조조(翼憲公在翰苑時史草 仁祖朝)”라고 적혀있는 제(題)가 있다. 이를 통해 인조 연간에 찬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익헌이라는 시호와 한원이라는 관청명으로 보아 정태화가 예문관에 있을 때 작성한 사초임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찬초』는 1629년(인조7) 2월 29일부터 3월 14일까지 15일 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비록 15일 간의 짧은 사초임에도 29개의 사론(史論)이 기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책의 구성은 「숭정이년기사이월이십구일을묘(崇禎二年己巳二月二十九日乙卯)」, 「삼십일병진(三十日丙辰)」, 「삼월초일일정사(三月初一日丁巳)」, 「초이일무오(初二日戊午)」, 「초삼일기미(初三日己未)」, 「초사일경신(初四日庚申)」, 「초오일경신(初五日庚申)」, 「초육일임술(初六日壬戌)」, 「초칠일계해(初七日癸亥)」, 「초팔일갑자(初八日甲子)」, 「초구일을축(初九日乙丑)」, 「초십일병인(初十日丙寅)」, 「십일일정묘(十一日丁卯)」, 「십이일무진양(十二日戊辰兩)」, 「십삼일기사(十三日己巳)」, 「십사일(十四日)」 등으로 되어 있다. 2월 29일 기사에만 명 연호인 숭정(崇禎)을 부기하였고, 30일 기사는 명 연호와 월은 쓰지 않고 날짜만 기록하였다. 3월 기사에서는 명 연호를 생략하고 3월 1일에만 달을 표기했는데, 이후에는 생략하고 날짜만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마지막 날인 14일 기사에서는 날짜에 해당하는 간지마저도 생략하였다.
「숭정 2년 기사 2월 29일 을묘」 기사의 내용은 인조가 경연에 참석한 것과 인조가 도독부 차관 모유간(毛有簡)의 진문(進聞)대한 기사와 사론, 노사(虜使) 중남(仲男)을 접견할 때의 문제, 강응립(姜應立)이 청의 사신을 만난 일로 치죄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문과 사론, 예빈시 관원의 호차(胡差) 구관당상(句管堂上)의 치계와 사론, 송광유(宋匡裕)의 옥사와 관련한 정언 조석윤(趙錫潤, 1606-1655)의 치계가 기록되어 있다.
「30일 병진」 기사는 평안・황해도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耈, 1574-1633)의 치계에 대한 내용이다.
「3월 초1일 정사」의 기사는 함경도관찰사 이명(李溟, 1570-1648)의 계문과 그에 대한 사론이 기록되어 있다.「초2일 무오」기사는 경연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등은 잇따른 재변에 우려를 나타내고, 인조에게 국정 전반의 대책을 강구토록 청하는 내용이다. 또한 관향사 성준구가 둔전 별장 성풍렬(成豊烈) 등을 포상할 것을 청하자, 인조가 이를 윤허하는 기사와 그에 대한 사론이 있다. 또한 강원도 암행어사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의 계문과 사론, 경기관찰사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치계와 제릉(齊陵) 정자각(丁字閣)의 화재와 사론, 정언 조석윤이 치계한 내용이다.
「초3일 기미」 기사로는 송광유와 황일호(黃一皓, 1588-1641)의 일에 대한 정언 조석윤과 김영조(金榮祖, 1577-1648)의 치계를 인조가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비롯해, 인조의 특별 하교와 사론,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등이 천재(天災)로 인한 수성(修省)의 방법을 논한 것,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유림(柳琳, 1581-1643)의 장계와 그에 대한 사론, 호조의 삼별수미(三別收米)를 수납하지 않은 관원들의 파직을 청하는 계문, 비변사의 평안도 관찰사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장계에 대한 치계와 사론 등이 있다.
「초4일 경신」의 기사는 인조가 영사 김류(金瑬, 1571-1648) 등과 함께 『서전(書傳)』을 진강했다는 내용을 비롯해, 황해도관찰사 이경용(李景容, 1580-1635)의 장계와 그 사론, 인조가 영부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에게 사관을 보내 유시하라는 내용, 검열 윤명은(尹鳴殷)의 서계와 장신(張紳, ?-1637)을 부총관으로 삼는 등의 인사에 대한 내용이다.
「초6일 임술」의 기사는 경연에서 부제학 정경세가 부모의 봉분에 분황제를 지내러 가겠다고 하는 내용과 그 사론, 장령 김지복(金知復, 1568-1635)과 정언 조석윤이 송광유의 일에 대해 아뢰었으나 인조는 윤허하지 않는 기사와 그에 대한 사론, 행대사헌 이홍주(李弘胄, 1562-1638)가 천재로 인해 올린 차자(箚子)이다.
「초7일 계해」 기사는 인조가 명도독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의 차관 모유준(毛有俊)을 접견한 내용과 정묘호란 이후 용악(用樂)에 대한 논의와 그 사론이다. 또한 인조가 명 도독부 차관 유격 모유간(毛有簡)을 접견한 내용이다.
「초8일 갑자」의 기사로는 인조가 도승지를 보내 영중추부사 이원익을 회유하여 입궐하도록 하라는 내용을 비롯해, 장령 김지복(金知復)의 계문(啓聞)이 실려 있다. 또한 영중추부사 이원익의 차자와 장신 등의 인사 행정에 관한 것, 연평부원군 겸병조판서 이귀(李貴, 1557-1633)의 차자 등이 있다.
「초9일 을축」 기사는 연평부원군 이귀가 탑전에서 대신들과 말다툼을 한 일에 대해 파직을 청하는 내용과 그에 대한 사론, 장령 김지복이 이완을 법에 의거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는 내용과 영중추부사 이원익의 차자로 구성되어 있다.
「초10일 병인」의 기사로는 승정원에서 사관을 보내서 이원익을 권유하라는 인조의 하교, 행공조판서 신경진(申景禛, 1575-1643)의 상소, 우승지 박정(朴炡, 1596-1632)이 서로(西路)의 피폐한 상황을 아뢰는 계문, 평안도관찰사 김시양의 장계와 그 사론 등이 있다.
「11일 정묘」의 기사로는 인조가 경연에서 영사 오윤겸(吳允謙, 1559-1636) 등을 입시한 가운데 『서전』을 진강한 내용과 그에 대한 사론,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올린 차자 등이 수록되어 있다.
「12일 무진양」의 기사는 이조의 치계로 이충경(李忠慶)을 포로로 잡은 유공자들에게 논상할 것과 평강현감 이명익(李明翼, 1617-1687)을 당상관으로 승직시키는 등의 인사에 관한 내용이다.
「13일 기사」의 기사는 평안도절도사 윤숙(尹璛)의 장계와 승정원에서 명의 유격(遊擊) 사복(伺僕)이 일으킨 작폐를 치계한 내용이다.
「14일」 기사는 인조가 특진관 이서(李曙, 1580-1637), 동지사 홍서봉(洪瑞鳳, 1572-1645) 등이 입시한 가운데 『서전』을 진강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서지적 가치
본서는 표지에 ‘기사찬초’라는 표제가 있다. 표제지에는 “익헌공재한원시사초 인조조(翼憲公在翰苑時史草 仁祖朝)”라고 적혀있는 제(題)가 있다. 이를 통해 인조 연간에 찬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익헌이라는 시호와 한원이라는 관청명으로 보아 정태화가 예문관에 있을 때 작성한 사초임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찬초』는 1629년(인조7) 2월 29일부터 3월 14일까지 15일 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비록 15일 간의 짧은 사초임에도 29개의 사론(史論)이 기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책의 구성은 「숭정이년기사이월이십구일을묘(崇禎二年己巳二月二十九日乙卯)」, 「삼십일병진(三十日丙辰)」, 「삼월초일일정사(三月初一日丁巳)」, 「초이일무오(初二日戊午)」, 「초삼일기미(初三日己未)」, 「초사일경신(初四日庚申)」, 「초오일경신(初五日庚申)」, 「초육일임술(初六日壬戌)」, 「초칠일계해(初七日癸亥)」, 「초팔일갑자(初八日甲子)」, 「초구일을축(初九日乙丑)」, 「초십일병인(初十日丙寅)」, 「십일일정묘(十一日丁卯)」, 「십이일무진양(十二日戊辰兩)」, 「십삼일기사(十三日己巳)」, 「십사일(十四日)」 등으로 되어 있다. 2월 29일 기사에만 명 연호인 숭정(崇禎)을 부기하였고, 30일 기사는 명 연호와 월은 쓰지 않고 날짜만 기록하였다. 3월 기사에서는 명 연호를 생략하고 3월 1일에만 달을 표기했는데, 이후에는 생략하고 날짜만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마지막 날인 14일 기사에서는 날짜에 해당하는 간지마저도 생략하였다.
「숭정 2년 기사 2월 29일 을묘」 기사의 내용은 인조가 경연에 참석한 것과 인조가 도독부 차관 모유간(毛有簡)의 진문(進聞)대한 기사와 사론, 노사(虜使) 중남(仲男)을 접견할 때의 문제, 강응립(姜應立)이 청의 사신을 만난 일로 치죄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문과 사론, 예빈시 관원의 호차(胡差) 구관당상(句管堂上)의 치계와 사론, 송광유(宋匡裕)의 옥사와 관련한 정언 조석윤(趙錫潤, 1606-1655)의 치계가 기록되어 있다.
「30일 병진」 기사는 평안・황해도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耈, 1574-1633)의 치계에 대한 내용이다.
「3월 초1일 정사」의 기사는 함경도관찰사 이명(李溟, 1570-1648)의 계문과 그에 대한 사론이 기록되어 있다.「초2일 무오」기사는 경연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등은 잇따른 재변에 우려를 나타내고, 인조에게 국정 전반의 대책을 강구토록 청하는 내용이다. 또한 관향사 성준구가 둔전 별장 성풍렬(成豊烈) 등을 포상할 것을 청하자, 인조가 이를 윤허하는 기사와 그에 대한 사론이 있다. 또한 강원도암행어사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의 계문과 사론, 경기관찰사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치계와 제릉(齊陵) 정자각(丁字閣)의 화재와 사론, 정언 조석윤이 치계한 내용이다.
「초3일 기미」 기사로는 송광유와 황일호(黃一皓, 1588-1641)의 일에 대한 정언 조석윤과 김영조(金榮祖, 1577-1648)의 치계를 인조가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비롯해, 인조의 특별 하교와 사론,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등이 천재(天災)로 인한 수성(修省)의 방법을 논한 것,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유림(柳琳, 1581-1643)의 장계와 그에 대한 사론, 호조의 삼별수미(三別收米)를 수납하지 않은 관원들의 파직을 청하는 계문, 비변사의 평안도 관찰사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장계에 대한 치계와 사론 등이 있다.
「초4일 경신」의 기사는 인조가 영사 김류(金瑬, 1571-1648) 등과 함께 『서전(書傳)』을 진강했다는 내용을 비롯해, 황해도관찰사 이경용(李景容, 1580-1635)의 장계와 그 사론, 인조가 영부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에게 사관을 보내 유시하라는 내용, 검열 윤명은(尹鳴殷)의 서계와 장신(張紳, ?-1637)을 부총관으로 삼는 등의 인사에 대한 내용이다.
「초6일 임술」의 기사는 경연에서 부제학 정경세가 부모의 봉분에 분황제를 지내러 가겠다고 하는 내용과 그 사론, 장령 김지복(金知復, 1568-1635)과 정언 조석윤이 송광유의 일에 대해 아뢰었으나 인조는 윤허하지 않는 기사와 그에 대한 사론, 행대사헌 이홍주(李弘胄, 1562-1638)가 천재로 인해 올린 차자(箚子)이다.
「초7일 계해」 기사는 인조가 명도독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의 차관 모유준(毛有俊)을 접견한 내용과 정묘호란 이후 용악(用樂)에 대한 논의와 그 사론이다. 또한 인조가 명 도독부 차관 유격 모유간(毛有簡)을 접견한 내용이다.
「초8일 갑자」의 기사로는 인조가 도승지를 보내 영중추부사 이원익을 회유하여 입궐하도록 하라는 내용을 비롯해, 장령 김지복(金知復)의 계문(啓聞)이 실려 있다. 또한 영중추부사 이원익의 차자와 장신 등의 인사 행정에 관한 것, 연평부원군 겸병조판서 이귀(李貴, 1557-1633)의 차자 등이 있다.
「초9일 을축」 기사는 연평부원군 이귀가 탑전에서 대신들과 말다툼을 한 일에 대해 파직을 청하는 내용과 그에 대한 사론, 장령 김지복이 이완을 법에 의거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는 내용과 영중추부사 이원익의 차자로 구성되어 있다.
「초10일 병인」의 기사로는 승정원에서 사관을 보내서 이원익을 권유하라는 인조의 하교, 행공조판서 신경진(申景禛, 1575-1643)의 상소, 우승지 박정(朴炡, 1596-1632)이 서로(西路)의 피폐한 상황을 아뢰는 계문, 평안도관찰사 김시양의 장계와 그 사론 등이 있다.
「11일 정묘」의 기사로는 인조가 경연에서 영사 오윤겸(吳允謙, 1559-1636) 등을 입시한 가운데 『서전』을 진강한 내용과 그에 대한 사론,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올린 차자 등이 수록되어 있다.
「12일 무진양」의 기사는 이조의 치계로 이충경(李忠慶)을 포로로 잡은 유공자들에게 논상할 것과 평강현감 이명익(李明翼, 1617-1687)을 당상관으로 승직시키는 등의 인사에 관한 내용이다.
「13일 기사」의 기사는 평안도절도사 윤숙(尹璛)의 장계와 승정원에서 명의 유격(遊擊) 사복(伺僕)이 일으킨 작폐를 치계한 내용이다.
「14일」 기사는 인조가 특진관 이서(李曙, 1580-1637), 동지사 홍서봉(洪瑞鳳, 1572-1645) 등이 입시한 가운데 『서전』을 진강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적 가치
가장사초는 사관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역사적 평가를 담았다. 사관의 역사비평이 수록된 사초가 가장사초이다. 이러한 성격의 자료인 『기사찬초』에는 거의 매 기사마다 “사신왈(史臣曰)”로 시작하는 사론이 부기(附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사론의 수는 총 29개에 이른다. 이 사론은 당시 전임사관이었던 정태화가 기록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 시기의 『인조실록』에는 2월 30일 관향사 성준구가 둔전 별장 성풍렬 등을 포상하도록 청한 것에 대한 사론만이 실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기사찬초』에 담겨진 사론들의 분석을 통해 정태화의 역사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사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기사찬초』와 『인조실록』을 비교・검토해보면, 『인조실록』에 『기사찬초』의 수록 내용이 그다지 많이 반영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사서의 비교를 통해서 실록편찬 과정의 단면을 엿볼 있다. 『인조실록』에 누락된 기사의 내용을 보완한다는 면에서도 『기사찬초』의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성무,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동방미디어, 1999.
집필자 : 계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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