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부여현지(扶餘縣誌)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V.0000.0000-20090716.AS_SA_174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 | 사부-지리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30張) : 四周雙邊 半郭 21.6 x 15.6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2葉花紋魚尾 ; 32.2 X 21.0 cm
· 주기사항 表題: 百濟故都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0.2

안내정보

충청도 54개 군현 중 부여현에 대한 관찬읍지(官撰邑誌)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부여현
구성 및 내용
조선후기 부여현의 위치와 영역
백제고도지(百濟古都誌)라는 표제 안 첫 장에 다시 부여현지라고 서명이 적혀 있다. 서문과 목차가 없이 건치연혁부터 군명, 성씨, 형승, 산천, 풍속, 방리, 토산, 학교, 단묘, 공해, 창고, 불우, 누정, 역원, 교량, 제언, 군병, 원전답, 조적, 균역, 진공, 봉름, 고적, 능묘, 명환, 인물(우거, 효자, 열녀), 제영까지 모두 28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방 경계와 도리(道里)가 없다.
- 건치연혁 :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백제 때 소부리군(일명 사비)였고, 백제 성왕 때 웅천(지금의 공주)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의자왕 때 신라의 김유신과 당의 소정방의 침공을 받아 신라 땅이 되었다.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본조(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었다. 관원으로 현감과 훈도만 간략하게 적었다.
- 군명 : 소부리, 남부여, 반월, 사비, 여주 등 다섯 이름이 적혀 있다.
- 성씨 : 본현의 성씨로 지, 이, 서, 전, 형, 조, 고, 표씨가, 속현의 성씨로 백씨가 적혀 있다.
- 형승 : 탄현(炭峴), 백강(白江) 네 글자로 부여의 형승을 압축하였지만,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탄현과 백강은 나당 연합군의 백제 침공 루트이다. 탄현은 본 읍지 산천조에 좀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산천 : 부소산, 탄현, 부산, 망월산, 취령산, 오산, 나소현, 백마강, 고성진, 대왕포, 광지포, 양단포, 금강천, 석탄이 등재되었다. 이 가운데 백마강과 석탄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풍속 : 선비는 학문을 높이 여기고 백성은 농사에 부지런하다고 적혀 있다. 『여지도서』의 내용과 같다.
- 방리 : 현내면, 대방면, 초촌면, 몽도면, 도성면, 공동면, 방생동면, 가좌동면, 송원당면, 천을면 등 모두 10개면과 각 면에는 소속 리가 소주로 적혀 있다. 따로 호구 항목을 두지 않고 방리조 마지막에 138리, 3,483호, 15,909구임을 기록하였다.
- 토산 : 저(모시), 위어(청어목 멸치과), 노어(농어), 석수어(조기, 今無), 수어(숭어), 백어(청어목 뱅어과), 즉어(붕어), 이어(잉어), 합(대합 조개), 복령이 적혀 있다.
- 학교 : 향교 하나만 올라 있다. 서쪽 1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남쪽 1리에 있다하여 향교가 이설했음을 알려준다. 현 부여읍 동남리에 있다.
- 단묘 : 사직단, 성황묘, 여단, 문묘, 의열사, 부산서원이 등재되었다. 의열사가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다. 의열사(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4호)는 현재 부여읍 동남리에 있다. 1575년(선조 8)에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이 백제 때 충신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 고려 말기의 충신 이존오(李存吾, 1341-1371)의 충의를 전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1577년에 사액되었고, 1641년(인조 19)과 1675년(숙종 1)에 각각 중수되었다. 1866년(고종 3)에 철폐되었다가 복원되었다. 부산서원은 규암면 진변리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경여(李敬輿, 1585-1657년)를 배향하였다. - 공해 : 객관, 제민헌, 향청, 청원당, 무학당, 군기고, 화약고가 소개되었다. 객관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제민헌은 곧 동헌을 일컫는다. 이들은 조선시대 부여의 치소가 소재했던 현 부여읍 관북리에 있다. 옛 치소 영역이 1982년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되었다.
- 창고 : 사창, 해창, 홍산창의 규모와 위치가 간략하게 기술되었다.
- 불우 : 숭각사, 도천사, 경용사, 보각사, 망얼사, 호암사, 고란사, 망심사, 부산사, 환문암, 문주암이 올라 있다. 도천사(은산면 대양리)와 고란사(부여읍 쌍북리)가 기술된 분량이 많다. 도천사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다. 고란사는 법당 하나만 복원되어 요사채와 함께 작은 사찰로 남아 있는데, 은산 승각사를 이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 누정 : 제성루, 감고루, 대재각이 등재되었다.
- 역원 : 은산역과 용전역, 고성원과 복천원, 금강원이 등재되었다. 사방과 리정만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은산역과 용전역은 모두 이인도 소속이다. 역관, 역마, 역졸, 역노, 역비 등의 세부 설명이 없다. 『여지도서』에 은산역에는 역마 11마리, 역노 40명, 역비 20명이, 용전역에 역마 11마리, 역노 30명, 역비 40명이 소속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세 원에 대해 『여지도서』는 ‘지금은 셋 다 못쓰게 되어 무너지고, 다만 옛터만 남아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 교량 : 구랑교, 토교, 양단진교, 금강천교가 올라 있다. 양단진교에 대해 ‘예전에 석교로 축조된 관로였다. 백마진을 건너 이곳을 지나면 서쪽의 여러 읍으로 통하였는데, 지금은 무너져서 통할 수 없다. 이에 규암진을 건너는 길이 관로가 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여지도서』에 수록된 부여현 지도에도 관로가 규암진 길로 표시되어 있다.
- 제언 : 국령지, 연화지, 만광지, 신교지가 올라 있다. 소재 위치와 둑의 길이, 둑 길이를 제외한 지(池)의 둘레와 수심을 척·촌 단위까지 기록하였다. 국령제언이라 하지 않고 저수지 이름을 썼다. 『여지도서』부여현 지도에 네 저수지가 모두 그려졌지만, 제방 표시는 없다.
- 군병 : 2,304명의 인원 수만 기록되어 있다. 소주에 납포군, 납미군, 잡색군으로 분화되어 기술되었다.
- 원전답 : ‘모두 합쳐 4,118결 75부 9속’이 기록되었다. 소주에 ‘밭이 2,338결 46부 4속인데 경작하지 않는 밭이 1,338결 39부 7속이고, 실제 경작하는 밭이 1000결 6부 7속이다. 논이 1,780결 29부 5속인데 경작하지 않는 논이 217결 74부이고 실제 경작하는 논이 1,562결 55부 5속이다.’라고 적혀 있다.
- 조적 : 조적 총량이 미·태·두·모·진삼 별로 적혀 있다. 총량은 9,390석 10두 8승 6합 3석 5리 2푼이다.
- 균역 : 균역청세선과 결전이 적혀 있다.
- 진공 : 준시(곶감)와 약재가 등재되었다. 약재는 월령별 품목과 물량이 명시되었다. 『여지도서』와 월령이 일치하는데, ‘과만감사도계진상’ 품목과 물량은 본 읍지에 없다.
- 봉름 : 아록공수위[아전 녹봉 및 관아 경비에 충당하는 몫], 관수[수령 양식 몫], 공사지가[공무용 종이 값 몫], 유청가미[기름과 꿀 값 몫], 사객지공[손님 접대 비용에 충당하는 몫], 신역상정[신역에 필요한 몫] 등의 항목에 대한 비용이 쌀로 명시되었다.
- 고적 : 반월성, 증산성, 청산성, 청마산성, 천정대, 조룡대, 낙화암, 자온대, 의염창 옛터, 석전부곡, 풍지소, 대당평백제비, 유인원비, 조선통페지인, 흥수동, 이은암 옛터가 등재되었다. 대당평백제비와 유인원 신도비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대당평백제비는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새긴 기공문이 있다하여 속칭 당평제비 또는 평제비로 불렸는데,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이 바로 이것이다. 유인원비는 당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660년에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까지도 평정하였다. 백제 멸망과 관련된 고적이 강조되었다.
- 능묘 : 능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략한 위치와 함께 정흥인묘, 정득열묘, 정택뢰묘, 황일호묘, 홍윤성묘, 이상진묘, 황윤묘, 윤혜교묘가 소개되어 있다.
- 명환 : 홍가신, 김집 두 명이 선정되었다.
- 인물 : 아래와 같은 인물이 실려 있다. 백제 성충, 계백, 흥수, 흑치상지, 지수신, 본조(조선) 정인지, 황신, 정홍임, 정득열, 권신길, 황일호, 유명, 박종, 정택뢰, 유대칭, 윤해 , 엄봉신, 황하신, 정익상, 정언충 / (우거) 고려 이존오, 본조(조선) 이경, 이민적, 이사명, 이순명 / (효자) 고려 서공, 본조(조선) 정천세 황진, 민진익, 류승춘, 박세구, 윤광은, 한구상, 김필능, 김운신, 김광악, 정인 / (열녀) 정씨, 조씨, 정씨, 이씨, 윤덕, 작달 / (충노) 개질동. 다른 읍지와 달리 유독 백제 인물이 많이 실렸으며, 고려 인물이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의자왕 당시 충신인 성충을 제외하면 백제 인물은 모두 백제 말기 나당연합군에 대항한 사람들이다. 황일호(黃一皓, 1588-1641)에 대한 기술 내용이 많다. 황일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이고, 자는 익취(翼就), 호는 지소(芝所)이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전공을 세우고 척화를 적극 주장하였다. 1638년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치고자 최효일(崔孝一) 등과 모의하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어 청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 부여 의열사(義烈祠), 운봉 용암서원(龍巖書院), 의주 백마산성사(白馬山城祠)에 배향되었다.
- 제영 : 대왕포월공추야(시:민사평), 조룡대하강자파(시:이곡), 가루무전수형비(시:이승소), 흥망이공여동치(시:최숙생), 일파관도만생조(시:홍적), 성대의자강(시:이안눌), 월명장적심무홀(시:이호민), 일홀(?)동풍독의주(시:정문익), 처처수운쇄고대(시:이경필), 천년포사여산애(시:이진망), 산유화(백제때 가요)가 실려 있다. 산유화를 제외하면 모두 시이지만 누정 정보는 없다. 전체 시구 중 대표 구를 표제어처럼 삼았다.
서지적 가치
본 『부여현지』가 언제 편찬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영조대까지의 내용이 실려있다. 시대 순으로 인물조에서 마지막으로 소개된 정언충(鄭彦忠, 1706-1771)은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죽기 3년 전인 1768년(영조44)에 승지까지 지냈다. 서문과 목차, 그리고 지도가 없어 지리지로서의 서지적 가치가 높지 않다. 본문 중에는 중간 중간에 잘못 쓴 글자를 지우거나 옆에 덧써 수정한 흔적도 보여 필사도 깔끔하지 않다. 특히 사방 경계와 도로 등 기본적인 지리정보도 누락되어 있고, 호구나 역원에 대한 정보도 매우 소략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본 읍지의 소장처인 버클리 아사미 문고의 『부여현지』를 영인한 마이크로필름(M古3-1995-7)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도 부여읍지 세 종이 소장되어 있다. 『부여지』(규15705), 『부여현읍지』(규10765), 『부여현읍지』(규17367)가 그것인데, 본 『부여현지』보다 내용이 충실한 편이다. 다만 현재 한국에는 동일한 읍지가 없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염두할만하겠다. 『여지도서』보다 약간 뒤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될 뿐 편찬 시기나 편찬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항목 구성이나 내용이 『여지도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부여 지역에 대한 지리지로서의 가치는 크지 않다고 판단된다.
내용적 가치
본 읍지는 백제와 관련된 내용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먼저 드러나는 특징이다. 대표적인 항목이 고적조로 백제 멸망과 관련된 기사가 많아 고도(古都)로서의 백제에 대한 향수와 회상이 짙게 배어 있어 부여의 지역 감성을 옅볼 수 있다. 또한 인물조에서도 백제 인물이 수록된 것도 특이한 경우이지만, 백제 인물 이후 고려 인물 없이 조선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백제의 인물 또한 모두 백제 멸망기 나당연합군에 대항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단묘조에서 의열사가 장황하게 기술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반면, 자연환경이나 지리적·사회경제적 상황을 알려주는 항목에 대한 내용은 대체로 소략하다. 읍지 편찬의 기본적인 목적이 지역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치의 기본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라면, 이 점에서 본 읍지의 내용적 가치는 크지 않다. 이러한 성격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세 종의 부여읍지에서도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리적 관점에서, 또는 지리 자료로서의 부여읍지는 『여지도서』나 『대동지지』가 본 읍지보다 더 참고할 만하다.
참고문헌
규장각,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 사부 4,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3(초판 2쇄).
양보경, 『朝鮮時代 邑誌의 性格과 地理的 認識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7.
집필자 : 김종혁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