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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지(成川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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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 | 사부-지리류
· 작성주체 이상의(李尙毅, 1560-1624)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四周雙邊 半郭 21.5 x 15.8 cm, 有界, 10行20字, 上2葉花紋魚尾 ; 32.7 X 21.0 cm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0.40

안내정보

조선후기에 편찬된 평안도 41개 군현 중 성천도호부의 관찬읍지(官撰邑誌)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성천도호부가 주관하였다.
구성 및 내용
조선시대에 성천부에 있던 25-28개 가량의 방(坊)은 1914년에 13개의 면으로 통합되었다. 오늘날 성천군은 평양시와 강동군의 동쪽, 평안남도 남단에 위치하면서 황해북도와 접경하고 있다. 『조선향토대백과』(과학백과사전출판사·평화문제연구소 공동편찬, 2003-2005)에 따르면 성천군은 1읍/20리/3노동자구(성천읍/거흥리, 계석리, 금평리, 기창리, 대봉리, 덕암리, 룡산리, 룡흥리, 문옥리, 백원리, 삭창리, 삼덕리, 상하리, 신풍리, 암포리, 온정리, 운봉리, 장상리, 향풍리, 회전리/신성천로동자구, 은곡로동자구, 장림로동자구)로 편재되어 있다. 본 읍지는 상·하 두 권으로 편성되었다.
조선후기 무주도호부의 위치와 영역
본 읍지의 체제와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서문과 편저자는 없지만 서두에 지도 3종과 목차가 실려 있다.
- 성천폭원총도(成川幅員緫圖) : 성천부 읍지도로 주요 산과 사찰, 부방(部坊)과 주요 관청을 개략적으로 표시하였다.
- 성천관부도(成川官府圖) : 비류강 양안의 주요 관청과 관방시설, 그리고 산봉·사찰·교량·누정 등, 성천부 중심부의 주요 시설들을 표시하였다.
- 성천강선루도(成川降仙樓圖) : 강선루의 규모와 구조를 알 수 있도록 조감도처럼 그렸다.
- 교재서책(校在書冊) : 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서, 사서, 문집, 지리지 등 45종의 문헌 제목을 적었다.
- 성천지목록 : 상권에는 강역, 사경, 연혁, 성지, 부방, 군명, 풍속, 형승, 산천, 누대정사(樓臺亭榭), 사우, 공서, 학교, 직역, 교량, 토산, 음악, 원우, 불우, 호구, 인물, 효열, 연방, 급제문과, 고적, 잡지, 치적 등 27개 편목이, 하권에는 시문이 수록되었음을 알려준다. 상권 마지막 편목인 ‘치적(治蹟)’은 실제 본문에서 ‘환적(宦蹟)’으로 적혀있다. - 강역 : 고사를 들어 강역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본 지지에서 강역을 서술한다고 기술하였다. 본 읍지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각 편목을 설정한 이유를 먼저 기술하고 그 내용을 수록한다는 점이다. 이하 편목에서도 같다.
- 사경 : 동서, 남북의 길이, 사방 경계의 거리, 서울까지의 거리를 적었다.
- 연혁 : 고구려 동명왕과 졸본의 송양의 기사에서 이곳을 다물로 비정하였다. 성천이라는 이름은 1415년(태종 15)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 성지 : 홀골성, 회산천성성, 용천통지, 심천지 등이 소개되었다. 홀골성에는 동명왕 관련 기사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 부방(部坊) : 상부와 하부 및 23개 방을 열거하고 부내(=상부)와 떨어진 거리를 식(息)·리(里)로 나타냈다. 여러 방의 이름이 오늘날 성천군 리 이름으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 군명 : 비류, 다물, 졸본부여, 강덕진, 송양, 성주, 성천이 기재되었다.
- 산천 : 학령산, 비류강, 온천과 냉천, 연못과 우물 등이 소개되었다. 기재된 산봉은 성천폭원총도(成川幅員緫圖)와 성천관부도(成川官府圖)에 표시되어 있다.
- 누대정사(樓臺亭榭) : 객관에 있는 강선루를 비롯하여 관(館/觀)·각(閣)·정(亭)·당(堂) 등이 열거되었다.
- 사우(祠宇) : 사직단, 문묘, 성황사, 여단, 무학사가 소개되어 있다. 각 위치와 건물의 규모, 제기 품목 등이 기재되었다.
- 공서(公署) : 동명관, 반선관, 영롱각, 청화각, 강선루, 아사, 형옥, 본창 등의 건물 규모와 각 부속 건물의 규모, 중수 기사 등이 실려 있다. 맨 앞에 기술된 동명관은 성천읍 객사의 본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이를 중심으로 객사는 통선관·유선관·학선관·집선관·승진각·영롱각·봉래각·반선관·소요헌·헌허각·도명헌·조운각·강선루·십이루 등 337칸에 달하는 10여 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문루인 방선문 한 동만 남아 있다.
- 학교 : 향교(명륜당, 동재, 서재)와 학령서원이 소개되었다.
- 직역 : 좌수, 별감, 중군, 파총, 무학, 군기감, 기고관, 기패관, 초관, 장관, 별장, 영장의 인원이 적혔다.
- 교량 : 구룡석교를 비롯하여 20개 교량의 위치가 적혔다. 타 군에 비해 교량 수 자체가 많은 것도 그렇지만 석교와 장교(長橋)가 많아 이채롭다.
- 토산 : 곡류, 과류, 채류, 목류, 약재, 환양류[豢養類=가축류], 금류(禽類), 수류(獸類), 어류, 잡류 등 모두 150종 이상이 실렸다.
- 음악 : 악기, 음악, 춤, 무인(舞人) 등 각 종류의 이름만 간단히 적었다.
- 원우(院宇) : 망운원, 영빈원, 보강원, 온정원, 성은원, 석장원이 소재지와 함께 적혔다.
- 불우 : 자복사를 필두로 폐지된 사찰까지 포함하여 24곳의 사찰이 소재 산명과 함께 적혔다.
- 호구 : 지역 구분 없이 군내 전체 호구수만(6,507호, 48,171명) 간단히 기록하였다.
- 인물 : 이구령의 최고 관직(우의정), 시호(강공), 묘 위치(부의 남쪽 20리 지점)가 적혔다. 이밖에 열 명의 인물이 더 수록되었다. 열 명 중 관직에 오른 이는 장괄도(6품), 김의충(양덕현감), 나승윤(우후) 세 명이다.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성품을 적었다.
- 효열 : 효자 김서응을 포함하여 열 명의 효자, 열녀가 올랐다.
- 연방 : 생원과, 향시(鄕試), 회시(會試)에 합격한 사람을 적었다. 모두 9명이다.
- 급제문과 : 문과에 급제한 사람 윤영 한 사람이 올랐다. 윤영(尹瑛, 1595-?)은 1635년(인조 13)에 문과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거산찰방에까지 올랐다.
- 고적 : 동명왕 궁터와 송양왕 궁터를 소재지만 언급하였다.
- 잡지 : 읍지의 편목으로 잘 편성되지 않지만, 일반 읍지의 고적 조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동명왕과 주몽 관련 기사로부터 고려와 조선의 인물과 관련된 일화, 마을의 거주 공간이나 제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민간 설화와 같은 이야기들이 서술되었다. 상권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다.
- 환적(宦蹟) : 서두 ‘목차’에는 ‘치적’(治蹟)으로 적혀 있으나 책 안에서는 환적이라 적혀있다. 조선 초기 성종 때 활동했던 민효증(閔孝曾, ?-1513)부터 인조 때 활동했던 이지안(李志安, 1601-1657)에 이르기까지 조선 초·중기의 인물 12명의 치적이 실렸다. 12명 중에는 이상의, 이지정, 이지안 3부자가 있다. 이지정과 이지안이 광해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상의의 아들이다. 이지안은 본관이 여주이고, 허목과 함께 정언창에게서 수학하였다. 성호 이익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지정(李志定, 1588-1650)은 성천부사를 하다가 그의 사위 이계(李烓)가 명과의 밀무역 사실이 발각되어 부사직에서 물러났다. 이밖에 정현, 최립, 조호익, 정구, 이경천, 박엽, 정두원, 정언황의 치적이 소개되었다.
환적을 끝으로 성천지 상권이 끝난다. 마지막 면에 ‘성천지권지상종’(成川志卷之上終)이라 적혀 있고, 이어서 2권 시작하는 면에 ‘성천지권지하’(成川志卷之下)라 적혀 있다. 하권은 시문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하권에는 시·기·문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분량은 상권보다 많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강선루와 관련된 시문이다. 대부분 강선루의 제영시일 것으로 추정되나 읍지에서 정확히 명시되지는 않았다.
강선루는 성천부 객사의 부속 건물로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343년(충혜왕4)에 창건되었다가 불타 없어진 후 1768년에 다시 지었으나 1951년 6·25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강선루 아래로는 대동강 지류인 비류강이 흐르고, 그 건너에 홀골산 12봉이 펼쳐져 있어 관서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본 읍지의 ‘성천관부도’는 이를 그린 것이고, ‘성천강선루도’는 객사의 전경을 그린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에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비루강의 맑은 물에 머리를 감았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강선루라 불렸다. 강선루와 관련하여 유의신, 홍연, 성세장, 어자익, 민춘란, 심수경, 이언충, 신숙주, 정현, 이이, 고경명, 이충, 서거정 등의 시문이 실렸다. 성천부사를 역임한 적이 있는 정구(鄭逑, 1543-1620), 『어우야담』의 저자인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역시 성천부사를 지낸 정홍익(鄭弘翼, 1571-1626) 등은 ‘강선루기’를 지었다. 강선루 외에도 도영헌, 봉래각, 유선각, 영롱각, 집선관, 통선관, 소요헌, 청화각 등의 제영시가 소개되었다.
본 읍지에는 「동명왕편」도 실려 있다. 이는 고구려 동명왕에 대한 전설을 오언시체로 쓴 장편 서사시로,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 제3권에 수록된 것이다. 실제 누가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본 읍지에서도 저자 란에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지칭하여 단순히 ‘이상국’이라고 표기하였다.
이밖에 성천부사를 역임한 최립의 ‘구룡산부사최립기우문’(九龍山府使崔岦祈雨文), ‘약수산부사최립기우문’(藥水山府使崔岦祈雨文), ‘사직단부사최립기우문’(社稷壇府使崔岦祈雨文) 등 세 기우문이 수록되었다. 최립(崔岦, 1539-1612)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특히 시에 탁월하고 글씨 또한 뛰어났다.
서지적 가치
성천의 대표적인 읍지로는 1602년(선조 35)에 본 읍지 ‘환적’ 조에도 등장하는 성천부사를 역임한 이상의가 펴낸 『성천지』와 이를 바탕으로 1656년(효종7)에 부사 이동로(李東老)가 편한 『성천속지』가 있다. 『성천속지』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842년 부사 서재순(徐載淳)이 『성천지』(2책)로 재탄생시켰는데, 제1책(2권)이 이상의가 펴낸 『성천지』이고 제2책(4권)이 이동로의 『성천속지』이다. 『성천속지』는 『성천지』에 있는 내용은 생략하면서 ‘詳舊志’라 주기하였고, 증보·변동된 사항을 기록하였다.
본 읍지는 1842년 본 『성천지』의 제1책과 지도와 편목의 구성이 일치한다. 다만 ‘환적’ 조에 이상의와 그 아들 이지안과 이지정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1602년 본의 『성천지』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 읍지는 목판본처럼 10행 20자로 규격을 맞추고 있고 판심도 있으나 이는 양식을 만든 것일뿐 필사본이다. 반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성천지』(한古朝62-24)는 목판본이다. 이 목판본이 본 읍지와 내용 및 체제가 동일한데, 본 읍지는 이 목판본의 필사본으로 생각된다. 이 목판본에도 이상의 아들들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목판본 제작은 1602년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본 읍지는 1602년 이상의의 『성천지』를 저본으로 하여 만든 목판본을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언제 필사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1842년 판 필사본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 이후 일제시기에 필사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규장각에 소장된 『성천지』(17486)가 바로 일제시기에 이상의의 『성천지』를 거의 모사한 필사본으로, ‘강역’과 ‘사경’이 누락되고 ‘영애’ 조가 추가되는 등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을 뿐이다. 이상의의 『성천지』를 필사한 것으로는 규장각 소장의 『성천읍지』(17487, 1899년 편찬)와 국립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성천지』(古2775-3, 원본소장기관;大阪府立 中之島圖書館(乾9-74)日本)가 있다.
내용적 가치
하권 시문을 제외하더라도 본 읍지는 내용이 자세하여 분량이 큰 편이다. 무엇보다 각 편목 서두에 이 편목을 설정한 이유를 기술한 점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이는 이상의(李尙毅, 1560-1624)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25세이던 1585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홍문관, 사헌부, 성균관 등 문예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고, 평소 학문과 시작을 즐겼으며 성천 부사로 재직 중에는 학교를 크게 일으켜서 성천에서 당시까지 사례가 없었던 소과 합격자를 냄으로써 학구열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중앙으로 돌아와서는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재질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그 공도(公道)를 칭찬받았고, 1618년에는 좌찬성에 올라 세자에게 경서를 가르치는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다.
본 읍지는 고적, 공서(공해), 잡지 시문이 매우 자세한 편인 데에 반해 물적 토대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하다. 이 역시 이상의의 대의와 명분, 교육과 학문을 중시하는 성향의 결과로 생각된다. 그 결과 당시 지역 사회의 생산력을 가늠하는 기본 요소인 호구수가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경지 면적을 알려주는 한전과 수전 조는 아예 없다. 이밖에도 재정과 관련된 부세 항목 또한 누락되었으며 군사나 상업, 교통 관련 정보도 거의 없는 형편이다. 반면 시문이 독립되어 하권으로 구성된 것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본 읍지는 유교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중시함으로써 아직 조선 초기적 색채에서 벗어나지 않은 읍지라 할 수 있다. 다만, 부언하지만, 각 편목의 설정 이유를 서술한 점에서 본 읍지는 그 내용적 가치뿐 아니라 서지적 가치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규장각,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 사부 4,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3(초판 2쇄).
양보경, 『朝鮮時代 邑誌의 性格과 地理的 認識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7.
집필자 : 김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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