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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기유(日東記遊)

장서인영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V.0000.0000-20090716.AS_SA_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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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 | 사부-지리류
· 작성주체 김기수(金綺秀, 1832-?)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四周單邊, 無界, 12行22字, 無魚尾 ; 34.5 X 20.7 cm
· 주기사항 內容: 高宗13(1876)에 修信使로 日本을 訪問했을 때 見聞을 記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15.18

안내정보

『일동기유(日東記遊)』 필사본 1책은 김기수(金綺秀)가 1876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일기이다. 버클리대본 『일동기유』는 본래의 『일동기유』(일명 『수신사김기수일기(修信使金綺秀日記)』)를 전부 초록하고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 의 일부를 초출한 것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김기수(金綺秀)의 본관은 연안, 자는 계지(季芝), 호는 창산(蒼山)이다.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김준연(金駿淵)이다. 1869년(고종 6)에 경릉참봉(敬陵參奉)으로 있었고, 1875년에는 노성현감(魯城懸監)으로 재직하면서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해 응교(應敎),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통정대부ㆍ예조참의로서 수신사(修信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것이 근대 한일교섭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김기수는 이때의 견문을 『일동기유(日東記游)』와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로 기록했다. 이 둘을 합하여 『수신사문견록(修信使聞見錄)』이라고도 하였다. 이 기록들은 이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9년에 덕원부사(德源府使), 1881년에 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냈다. 1884년에는 증광시 별시 문과의 시관(試官)을 지내고, 1888년에 동지중추부사, 1893년(고종 30) 8월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었다. 이해 황간(黃澗)·청풍(淸風)의 민란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기도 했다. 명필로도 유명했다.
수신사(修信使)는 개항 이후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을 말한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전에는 통신사(通信使)라고 하였다가, 그 이후 근대적 의미에서 수신사로 고쳐 불렀다. 『수신사문견록(修信使聞見錄)』은 1876년에 김기수가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첫 사절로서 파견되어 일본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일기를 초록한 것이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이 초대외교의 형식을 취해 조선에 대해 사신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자 조선 정부는 그 요청을 수락하여 공식 사절단의 파견을 결정했다. 그 결과 당시 예조참의였던 김기수가 처음 수신사로 파견되었다. 김기수 일행의 보고문서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그리고 정부로 하여금 근대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성 및 내용
김기수의 『일동기유』는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와 합하여 『수신사문견록(修信使聞見錄)』이라고도 하였다. 『일동기유』는 5월 8일에서 26일까지의 일기로, ‘수신사김기수일기(修信使金綺秀日記)’라고도 한다. 김기수가 수신사에 임명되었던 것은 1876년 2월 22일이고, 서울을 출발하였던 것이 4월 4일이었으므로 이 시기부터 5월 7일까지의 일기는 원래 산일(散佚)된 것으로 보인다.
버클리대본은 『일동기유』는 본래의 『일동기유』(즉, 『수신사김기수일기』)를 전부 초록하고 『수신사일기』의 일부를 초출한 것이다. 따라서 5월 8일에서 26일까지의 일기가 전부 들어 있고, 일본에서 만난 미야모토[宮本]와의 왕래 서찰, 몇가지 산문 견문록, 그리고 증시(贈詩)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버클리대본 『일동기유』은 목차가 없으며, 내용이 바뀌는 데 따른 특별한 표시도 없다. 그 내용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일동기유』(제목 없음) : 5월 8일에서 26일까지의 일기.
미야모토[宮本] 대승(大丞)의 서신 5통(제목 없음)
김기수의 서찰 「與宮本大丞」
김기수의 산문 「息軒後題」
김기수의 산문 「觀陸軍精造局記」
김기수의 시 : 「宮本鴨北要余書詩贈䟽見女史强應之」, 「次龜谷永」, 「又次龜谷永, 「次奧書記」, 「次贈田貢」, 「次人」, 「和人」, 「和淺田惟常」, 「次曾田貢」, 「次韻贈開成儒生」, 「神戶港留題」.
버클리대본 『일동기유』는 한 행마다의 글자수도 일정하지 않고, 편제도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시 제목이나 시에서도 오자가 눈에 띈다. 따라서 정사본(淨寫本)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본래 김기수의 『수신사문견록』의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동기유』와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로 이루어져 있다. 『일동기유』는 4권이며 끝에 후서(後敍)가 붙어 있다. 후서에 의하면 김기수가 일본에 갔다 온 다음해인 1877년 2월에 황해도 곡산군수(谷山郡守)로 있을 때 정리한 것이라 한다. 제1권에는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 사회(事會)·차견(差遣)·수솔(隨率)·행구(行具) 등 11항목으로 정리되어 있다. 제2·3권에서는 일본에서 여러 인문들과 교유하고 문물을 견문한 내용을 완상(玩賞)·결식(結識)·연음(燕飮)·문답(問答)·궁실(宮室)·성곽(城郭), 인물(人物)·속상(俗尙)·정법(政法)·규조(規條)·학술(學術)·기예(技藝)·물산(物山) 등 13항목으로 분류하여 상세히 정리해 놓고 있다. 제4권은 귀국하여 별단을 올리기까지의 내용으로 문사(文事)·귀기(歸期)·환조(還朝) 등 3항목으로 되어 있다.
한편 『수신사일기』는 1책의 필사본이며‚ 가철되어 있다. 표지에는 ‘부(附) 수신사장계초(修信使狀啓抄) 수신사입지초(修信使入侍抄)’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수신사입시초(修信使入侍抄)」는 누락되었고, 「수신사장계초(修信使狀啓抄)」와 5월 8일에서 26일까지의 일기인 「수신사김기수일기(修信使金綺秀日記)」만 실려 있다. 「수신사장계초」는 4월 29일에서 6월 7일까지의 여정, 수신사 파견의 경위‚ 일본과 서양제국의 통상ㆍ외교 현황‚ 교통수단‚ 의복‚ 군대의 편제 및 훈련‚ 궁전 및 가옥의 특색 등을 언급한 내용이다.
한편 연세대 중앙도서관에는 『수신록(修信錄)』이 있다. 이것은 김기수의 『수신사문견록』과 윤협(尹)의 「인천부사장계(仁川府使狀啓)」를 초하여 합철한 것이다. 윤협은 1875년에 인천부사로 있을 때 일본 외무권대승(外務權大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와 인천에서 회견하고 이 「인천부사장계」를 올렸다. 연세대본 『수신록』은 또한 이른바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의 전말을 알 수 있게 하는 관련 문서를 상당히 많이 초출(抄出)해 두었다. 단 그 『수신사문견록』은 「수신사장계초」와 『수신사일기』의 5월 8일부터 26일까지 일기를 초록한 것이다. 규장각본에는 김기수가 일본에 첫 사절로 파견되어 가기 전에 찍은 사진도 소장되어 있으나, 연세대본에는 관련 자료가 없다.
또한 『수신사일기』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도 이본이 있다. 역시 1책의 필사본이되, 5월 8일-6월 1일‚ 11월 10일-18일까지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5월 8일-26일의 일기 내용은 규장각본과 일치한다. 6월 1일의 일기 내용은 귀국한 후 입시(入侍)해서 문답을 나눈 일을 기록한 것인데‚ 내용상 규장각본에 누락된 「수신사입시초(修信使入侍抄)」와 일치할 것으로 추정된다. 뒷부분은 김기수가 송전(松田, 함남 문천)의 개항문제로 서울에서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담판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고려대 소장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사료총서(韓國史料叢書) 제9권 『수신사기록(修信使記錄)』의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 제1권으로 활자화하여 간행한 바 있다.
김기수가 이끄는 수신사 일행 76명은 1876년 4월 4일 서울을 출발하여 29일에 일본 기선 고류마루(黃龍丸)를 타고 부산을 떠나, 이튿날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뒤 약 2개월간의 시찰을 마치고 1876년 5월 7일 부산을 거쳐 6월 1일 서울에 도착해서 고종황제에게 귀국 보고를 하였다. 김기수 일행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예정에 없이 일왕(日王)과 접견을 했고 태정대신(太政大臣)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ㆍ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일본 정치인의 연회에 초대받았으며, 원로원ㆍ의사당을 비롯하여 육군성ㆍ해군성ㆍ내무성ㆍ문부성ㆍ대장성과 경시청ㆍ개척사 및 육해군의 군사시설과 훈련상황, 박물관ㆍ소방훈련 등 일본의 근대화 시설들을 관람하였다. 『수신사김기수일기』는 날짜와 날씨를 제시하고 그날의 주요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김기수는 일본 관리들과 함께 외무성‚ 어화원‚ 해군성‚ 원로원‚ 태학‚ 여학교‚ 개성학교(開成學校) 등을 돌아보며 그들과 대화한 담초(談草)를 옮겨두었다.
주지하다시피 병자수호조약은 ‘韓日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사이에 국제법적인 외교관계를 갖게 되었다. 1876년 2월에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2척, 운송선(運送船) 3척에 약 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 갑곤(甲串)에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하자, 조선 정부는 신헌(申櫶)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협상하게 하였다.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체결된 조약은 모두 12개조인데, 연세대본 『수신록(修信錄)』에는 ‘七月初七日講定約條’에 그 조약을 전부 실어 두었다.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고, 제2조에서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는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2개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였다. 제4조와 제5조에서는 개항장 내에 조계(租界)를 설정하여 그곳에서의 일본 상인의 자유로운 무역과 가옥의 조영(造營) 등 거주의 편의를 제공할 것을 규정하였다. 제7조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연해ㆍ도서ㆍ암초 등을 측량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제8조와 제10조에는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범죄자들에 대해 현지에 파견된 일본영사가 재판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었다. 불평등한 조약의 내용임을 알 수가 있다.
서지적 가치
버클리대본 『일동기유』는 본래의 『일동기유』(즉, 『수신사김기수일기』)를 전부 초록하고 『수신사일기』의 일부를 초출한 것이다.
그런데 버클리대본 『일동기유』는 한 행마다의 글자수도 일정하지 않고, 편제도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시 제목이나 시에서도 오자가 눈에 띈다. 따라서 정사본(淨寫本)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마도 누군가 원본을 초출하여 열람에 편하게 한 것인 듯하다.
김기수의 『일동기유』와 『수신사일기』를 합철한 『수신사견문록』의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규장각본에는 사진 등 관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버클리대본은 관련 자료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또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수신록(修信錄)』은 김기수의 『수신사문견록』과 윤협의 「인천부사장계(仁川府使狀啓)」를 초하여 합철하여 두었다. 이것은 수신사의 최초 도일로부터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에 이르기까지의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초록(抄錄)의 부류에 비해 버클리대본 『일동기유』는 초록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이상의 면에서 보면, 버클리대본 『일동기유』는 후인의 초록이면서 관련 자료를 충실히 종합하지도 않았고, 초록도 정세하지 않다. 따라서 그 서지적인 가치는 결코 높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버클리대본 『일동기유』는 김기수의 『수신사견문록』이 근세에 널리 읽혔음을 방증해 준다. 또한 그 초록의 방식은 국내에 산견되는 여타의 이본들과는 초록 방식이 다르다. 특히 미야모토(宮本)를 보면, 수신사의 최초 도일로부터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에 이르기까지의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적 가치
참고문헌
심경호, 「수신록 해제」, 『연세대학교중앙도서관소장고서해제 12』, 평민사, 2008.
심경호, 「수신사필담일록 해제」, 『연세대학교중앙도서관소장고서해제 12』, 평민사, 2008.
집필자 : 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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