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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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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V.0000.0000-20090720.AS_SA_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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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지도 | 사부-지리류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帖 : 彩色地圖 , 30.5 x 18.0 cm ; 149.0 X 205.0 cm
· 주기사항 備考: 說明文 中에 ‘康熙末年’의 표현이 있음
內容: 上端은 黑龍江, 下端은 杆城[東]과 殷栗[西]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0.32b

안내정보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는 조선과 청나라와의 접경 지역을 그린 대표적인 관방지도로 한 장으로 구성된 대형 필사본 채색지도이다. 이 지도는 18세기 중엽 영조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본 지도의 제작자 및 정확한 제작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1712년(숙종 38)에 건립된 백두산정계비가 그려져 있고, 주기에 청의 강희(康熙, 재위 1662-1722) 말년 기록이 언급되어 있으며, 1776년(정조 즉위년)에 초산(楚山)으로 개칭된 평안도 이산(理山)이 옛 이름으로 표시되어 있어 18세기 중엽 영조대에 그린 지도로 추정된다.
17세기 중엽 이후 청나라는 여진족 건국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을 성역화하고, 조선에 대해 이 지역에 대한 지도 제작의 협조 요청, 국경 설정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조선에서도 북방 국경 지역과 고대 강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18세기 초에 『요계관방지도』가 제작되고, 이어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등 북방 지역을 그린 지도의 제작이 활발해졌다.
특히 1746년(영조 22)에 청의 봉황성장이 책문(柵門)을 남쪽으로 옮겨 경작지를 늘리려 한 사건이 이 지도의 직접적인 탄생 계기가 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 조선은 재자관 윤태연을 보내 사태를 조사하게 하고, 북경에 자문을 보내 공사중지를 요청했다. 청은 병부상서를 보내 상황을 파악한 뒤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사를 중지시켰다. 이와 관련해 영조는 책문 이설과 관련된 강희 연간의 전례를 확인하기 위해 새로 수입된 수정본 『성경지(盛京志)』를 구했으며, 조선과 관련이 깊은 토문강, 성경, 영고탑 등지의 지도를 자세히 그려 올리도록 하여 원경하(元景夏)에게 지도제작을 맡겼는데,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를 그 결과로 제작된 작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관련 기록에 영조의 명에 의해 제작된 지도의 제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구성 및 내용
조선과 청나라와의 접경 지역을 그린 대표적인 관방지도로 한 장으로 구성된 대형 필사본 채색지도이다. 제목에서 ‘서북’은 조선의 관서와 관북의 별칭을 지닌 평안도와 함경도를 지칭한다. ‘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저쪽 청과 우리 조선의 양쪽 경계 만리 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그린 지도라는 의미를 지닌다. 백두산과 대택(大澤 : 천지)을 지도의 중심에 두고 조선의 서북지방과 청나라의 만주 국경 일대를 일목요연하게 그렸다. 대상지역은 북으로 흑룡강(黑龍江), 남으로 평안도의 평양(平壤)과 중화(中和)·함경도의 안변(安邊), 동으로 해향해도(海香海島)와 칠여은도(七汝隱島), 서로 중국의 산해관(山海關)까지이다.
조선의 서북지방은 변지(邊地)와 내지(內地)를 가르는 산줄기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만주 지역은 성경(盛京)·흥경(興京)·오라(烏喇)·영고탑(寧古塔) 등 주요 도시들과 함께 청나라가 설치한 유조변책(柳條邊柵)과 변문(邊門)이 나타나 있다. 만주지역의 도로는 조선의 서북지역과 연결되어 있으며, 한 갈래는 의주에서 산해관을 경유해 북경 쪽으로 가는 사행로(使行路)이다. 다른 하나는 북관 개시가 열리는 함경도 회령과 경원에서 영고탑-선창-성경에 이르는 길이다. 사행로에 관한 정보는 『성경지』나 『요계관방지도』보다 자세한 편이며, 우가장을 경유하는 이전의 사행로도 기록되어 있다. 영고탑에서 회령 혹은 경원부까지 이어지는 도로망이 표시되어 있는 것도 이보다 앞서 제작된 대표적인 관방지도인 『요계관방지도』와 다른 점이다. 서북쪽과 동남쪽의 방위 표시를 하고 그에 관한 설명을 덧붙인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정남(正南)방위 표시 옆에는 이 지도의 방위가 흑룡강 이북 지역까지 포함한 것이며 서울을 기준으로 한 방위가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의 왼편 위쪽 여백에는 영고탑의 유래, 청의 건국과정과 군사편제, 몽고에 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주기의 첫 부분을 보면, 영고탑이 강조되어 있다. 청의 몰락과 영고탑 회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지도상에 각화도(覺華島)·구가보(舊家堡)·신요동성(新遼東城)·심양(瀋陽)·오라(烏喇) 등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각화도는 바닷길을 통해 명나라에 가던 조선 사신이 상륙하던 곳이다. 그리고 구가보 인근에는 연대가 있는데, 명나라가 이 연대를 쌓기 위해 국력을 쏟아 무었지만 결국 오랑캐를 막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심양은 명 말에 오랑캐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오라는 동쪽으로 영고탑까지 700리, 서쪽으로 성경까지 820리, 남쪽으로 백두산까지 1,300리에 달한다고 한다. 대명 조공외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반면, 청을 ‘오랑캐’라고 부르고 있음에 이 지도에 담긴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몽고에 대한 두려움도 주기에 보이는데, 이 점 역시 『요계관방지도』와 다른 점이다. 지도상에도 몽고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는 표현들이 보인다. 유조변책은 봉황성에서 개원현 위를 거쳐 산해관에 이르는 한 갈래와 개원현 인근에서 오라성 위쪽까지 이어지는 다른 한 갈래가 있는데, 개원현 위쪽으로 ‘몽고책(蒙古柵)’ 표시가 있다. 낙니강 위쪽 ’아이등객(阿爾登喀)‘이 ‘몽고의 경계’로 표시되어 있으며, 흑룡강 위쪽으로도 ‘몽고’ 표시가 두 군데 더 있다. 청나라 사람들이 심양을 생각하듯, 몽고족은 금주(錦州)를 생각한다는 기록도 있다.
이 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분계강(分界江)’을 그린 점이다. 이는 백두산 정계(定界) 이후 등장한 표현으로서 백두산 정계 사건이 국방의식과 지도에 미친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백두산에서 두 갈래의 하천이 발원하는데, 하나는 두만강 본류로 ‘토문강원(土門江源)’으로 적혀 있다. 다른 하나는 두만강 북쪽을 흐르다가 함경도 온성부 부근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물줄기로 ‘분계강’으로 명명되어 있으며, 발원처도 ‘분계강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계 후 설치한 목책은 ‘토문강원’에서 ‘분계강원’까지 이어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 토문강을 두만강의 상류로 보면서도 분계강을 별도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두만강’은 『명일통지(明一統志)』에 아야고강(阿也苦江), 『성경통지(盛京統志)』와 『요계관방지도』에 토문강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이 지도가 하천의 물줄기 정보는 『명일통지』를 근거로 하였으나, 하천 지명은 『명일통지』나 『성경통지』의 지리지식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식이 중국의 지리정보가 아니라 그들의 실제적인 경험과 관심에 따라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지적 가치
17세기 후반 이후 그 동안 변경으로 여겨졌던 백두산과 북쪽 국경지방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이 지역에 관한 지도도 다수 제작되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18세기의 대표적인 관방지도로서 계속 전사되어 비교적 여러 사본이 전하고 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 『서북피아양계만리전도』, 『서북피아양계지도』 등 이칭을 사용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내용은 18세기에 제작된 원본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전사되면서 군현의 명칭 등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지도도 있다.
본 지도는 크기와 형태, 글씨, 지형의 표현 등이 원본과 유사하며 상태가 훌륭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산과 산줄기, 백두산의 천지 부분, 만리장성과 유조변장, 녹둔도와 그 주변 섬의 위치 및 형태 등을 볼 때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과 유사하다. 그러나 영고탑 부분은 규장각본과 차이가 보인다. 영고탑 아래 삼산(三山)이 그려진 호수 부분이 본 지도의 경우 백두산의 천지 부분과 같이 물결 모양이 그려져 있으며, 규장각 소장 지도에는 기록되어 있는 거리 정보가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한편 본 첩과 같은 유형의 지도는 모두 필사본으로 전한다. 같은 이름의 사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1종(古朝 61-77, 162.2×191.4cm),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2종(古軸4709-22, 130×91.5cm, 古4709-22A 203×143cm),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1종(도서번호 10135, 106.5×141.5cm), 간송미술관에 1종(150×203cm)이 있다. 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地圖)』(古4709-9, 191×142cm) 1종, 서울역사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서북피아양계전도 (西北彼我兩界全圖)」 (『해동지도(海東地圖)』, 古大 4709-41 중 제4첩, 181.1×221.3cm), 「서북피아양계지도 (西北彼我兩界之圖)」(『관동지도(關東地圖)』古4709-35, 『지도(地圖)』 古4709-92)라는 이름으로 지도책 속에 포함된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古軸4709-22)이 보물 제15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1830년에 제작된 것으로 앞 시기의 사본보다는 정교함이 다소 떨어지나 성문이나 성벽 등이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으며, 1822년에 설치된 함경도 후주(厚州)가 그려져 변화된 군현의 명칭 및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내용적 가치
이 지도는 북부지방에 대한 관심, 북부지방의 정확한 지도표현, 그리고 그러한 관심이 국경을 넘어 만주 일대로 확대되고 있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두만강 북쪽에 선춘령의 위치를 상정하고 그곳이 고려의 옛 강역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은 고대 국가의 강역을 확인하고 지도상에 표기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영토상실에 대한 아쉬움과 강렬한 국토회복의지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불어 토문강을 분계강으로 인식한 것은 영조 때 위정자의 만주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본 지도는 당대 이 지역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본 지도는 명대의 요동변장과 청대의 유조변 등 주요 시설뿐만 아니라, 교통로와 교통로상의 주요 도시 등도 기재되어 18세기 만주지역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
문화재청, 『한국의 옛 지도』, 문화재청, 2008.
배우성, 『조선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양보경, 「조선시대 고지도와 북방인식」, 『지리학연구』 29, 1997.
집필자 : 양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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