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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도리표(海東道里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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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V.0000.0000-20140417.TOYO_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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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 | 사부-지리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9세기 전반]
· 형태사항 不分卷1冊 : 四周單邊 半郭 23.7 x 15.2 cm, 有界, 12段, 無魚尾 ; 30.9 X 20.1 cm
· 주기사항 印: 在山樓蒐書之一
藏書記: 前間氏所藏
· 현소장처 일본 동양문고
· 청구기호 Ⅶ-2-261

안내정보

19세기 전반의 필사본으로 추정되는, 조선의 간선도로망과 산줄기 체계를 표의 형식으로 기술한 지리서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서문이나 발문 등이 수록되지 않아 편저자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구성 및 내용
책의 제목은 『해동도리표』이지만 ‘도리(道里)’뿐 아니라 ‘산경(山經)’도 함께 수록되었다. 표지에 부분적으로 지워졌지만 ‘부(附) 산경표(山經表)’라 표기되어 있다. 분량은 산경이 훨씬 많음에도 제목에 도리를 썼다. 산경을 나중에 필사하고 도리에 합철(合綴)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규장각, 古4790-30)와 같은 사례도 그렇듯이 도리표, 산경표, 이정표는 종종 같이 잘 묶였으므로 본서의 구성이 어색하지는 않다. 책은 크게 ‘해동도리표’(이하 도리표) 17장과 ‘해동산경표’(이하 산경표) 52장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앞표지에 부착된 소장자(기증자) ‘전문씨(前問氏)’는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1868-1941)이다. 마에마는 1894년에 한국에 와서 영사관 서기, 번역 장교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1920년대 이후 고중세 한국어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그가 모은 조선 관련 서책을 동양문고에 기증하였다.
도리표와 산경표 모두 족보 형태로 구성되었다. 한 면은 11개의 행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첫 행은 일종의 연결주기란(連結注記欄)으로, 앞 페이지에서 마지막으로 끝난 경유지(또는 산봉)를 다시 한번 적어줌으로써 노선(또는 산줄기)의 흐름을 연결해 주는 기능을 한다. 도리표의 동일 페이지에서 세로축으로 이어지는 줄은 동일 도로의 노선을 의미하고, 한 지점에서 가로축으로 이어지는 줄은 그 지점에서 분기(分岐)하는 지선(支線) 도로를 의미한다. 산경표 역시 세로줄은 동일 산맥(本脈)을, 가로줄은 지맥(支脈)을 의미한다. 결국 세로줄은 족보에서처럼 직계, 가로줄은 방계와 같다. 한편 좌측 면 좌단 중간에는 ‘程里XX(숫자)’ ‘山經XX’의 형식으로 쪽수를 표시하였다.
① 해동도리표
도리표는 ‘해동도리표(海東道里表)’라는 제목과 함께 ‘대로는 9개로 나뉜다[大路分九]’고 기술하고 첫 번째 대로는 의주로부터 시작된다. 9개의 대로는 다음과 같다.
제1로(의주로) : 서북저의주제일(西北抵義州第一)
제2로(경흥로) : 동북저경흥서수라제이(東北抵慶興西水羅第二)
제3로(평해로) : 동저평해제삼(東抵平海第三)
제4로(부산로) : 동남저부산제사(東南抵釜山第四)
제5로(태백산로) : 동남저태백산제오(東南抵太白山第五)
제6로(통영로) : 남저통영별로제육(南抵統營別路第六)
(제주로, 충청수영로) : 남저제주로(南抵濟州路), 서남저충청수영로(西南抵忠淸水營路)
제7로(강화로) : 서저강화제칠(西抵江華第七)
처음에 9대로를 명시하고 대로 수가 7개인 것은 제주로(南抵濟州路)와 충청수영로(西南抵忠淸水營路)를 제6로인 통영로의 분기로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통영로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과천-수원-소사(진위)-공주-삼례-남원-팔량치-함양-통영으로 이어지는데, 소사에서 충청수영로가, 삼례에서 제주로가 분기한다. 본서는 이렇게 두 대로를 합해 9대로로 인식한다. 『도로고』(1770)를 비롯하여 조선후기에 편찬된 도로 관련 책자에서는 위 두 대로가 모두 독립된 대로로 등재되어 있는데, 본서가 두 도로를 분기로로 처리하고도 9대로 체제로 인식한 것은 이에 근거할 것이다. 두 대로에 노선 번호를 부여하지 않고 분기로로 처리한 것은, 7개 대로의 기점이 모두 서울(京)인 것에 반해 두 노선은 그렇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도로명은 ‘방향-抵-종점-노선번호(서수)’와 같은 방식으로 부여되었다. 도로명에 명시된 방향은 기점(서울)과 분기점에서 종점까지의 경로가 뻗은 있는 방향이다.
노선의 경로는 기점과 종점 사이의 주요 경유지를 기재하고 앞 경유지와의 거리를 기입하는 방식으로 표시하였다. 읍치와 같은 주요 경유지에 대해서는 서울, 또는 병영(수영)과의 거리를 표시하기도 하였고, 분기점에는 분기하는 도로 수가 ‘分○岐’ 방식으로 기재되었다.
② 해동산경표
산경표는 산줄기를 족보 형태로 기술하고 있다. 도리표와 마찬가지로 ‘해동산경표(海東山經表)’라는 제하에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시작된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산줄기를 지칭한다. 산경표의 산맥 체계는 백두대간을 필두로 1개의 정간과 13개의 정맥 등 모두 15개의 산줄기로 구성된다. 각 산줄기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대간(大幹) : 백두대간
2. 정간(正幹) : 장백정간(長白)
3. 정맥(正脈) : 낙동(洛東)정맥, 낙남(洛南)정맥, 청북(淸北)정맥, 청남(淸南)정맥, 해서(海西)정맥, 임진북예성남(臨津北禮成南)정맥, 한남(漢南)정맥, 한북(漢北)정맥, 한남금북(漢南錦北)정맥, 금북(錦北)정맥, 금남호남(錦南湖南)정맥, 금남(錦南)정맥, 호남(湖南)정맥
모든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분기하는 지맥이다. 백두산은 백두대간을 시작하는 첫 번째 산으로, 족보에서의 시조(始祖)와 같다. 조선시대에 백두산을 조종지산(祖宗之山)으로 인식한 것과 호응된다. 백두산은 ‘무산서북이백팔십리, 갑산북삼백삼십리(茂山西北二百八十餘里, 甲山北三百三十里)’라고 주기를 달아 위치를 표시하였다. 주요 산봉에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위치가 표시되어 있거나 분기하는 지맥의 수가 적혀 있고, 별칭이 적혀 있기도 하다.
산줄기를 표시하는 방식이나 세로축과 가로축의 의미 역시 도리표와 같다. 경유지로 등장하는 지명은 산(山)과 령(嶺)이 가장 많고, 봉(峰)이나 현(峴)이 그 다음으로 자주 등장한다. 백두대간은 두류산-마대산-두류산-추가령-매봉산-속리산-영취산 등으로 이어지다가 지리산에서 끝난다. 이들 산령(山嶺)은 정간과 정맥이 분기하는 지점이다. 지리산에는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끝난다(白頭大幹止於智異山)’는 주기와 함께 진주, 산청, 단성, 하동, 운봉, 구례, 남원 등 일곱 고을의 치소로부터 떨어진 거리와 방향을 명시함으로써 위치를 표시하였고, ‘두류산이라 부르기도 한다(一名頭流)’고 기술해 놓았다.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은 청천강을 가운데 두고 그 북쪽과 남쪽의 각 산줄기를 일컫는다. 마찬가지로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은 한강을 기준한 것이고, 금북정맥과 금남정맥은 금강을,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은 낙동강을 기준한 것으로 명칭 조어 패턴이 같다. 임진북예성남정맥 역시 임진강의 북쪽과 예성강의 남쪽에 뻗어 있는 산줄기를 지칭한다. 산줄기와 물줄기는 지형학적으로도 유역권과 분수계의 관계를 맺고 있어서 밀접히 관련되는데 산경표가 이러한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서지적 가치
본서에 수록된 도리표와 산경표는 18세기 후반에 처음 편찬된 이후 필사본이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도리표의 저본 격인 책은 1770년에 여암(旅庵)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펴낸 『도로고(道路考)』이며, 산경표 역시 같은 해에, 이론이 있지만 신경준이 펴낸 것으로 알려진 『산경표』가 저본 격이다.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에서도 이 두 책이 별책으로 발행된 적이 있으며, 국립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규장각 등에 이본들이 다양한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규장각에 소장된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古4790-30)와 장서각에 소장된 『여지편람(輿地便覽)』이 있다. 규장각 본에 본서의 ‘해동도리표’ 내용은 ‘도리총목(道里總目)’에서, ‘해동산경표’는 ‘산경’에서 다루었다. 본서가 언제 필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기존의 자료와 내용이 다르지 않지만 조선후기의 도로망과 주요 시설 및 취락, 국토관이나 자연인식 체계, 그리고 산, 봉, 령, 현 등의 자연지명을 연구하는데 충분히 참고할 수 있는 자료이다.
내용적 가치
본서의 내용은 『도로고』, 『산경표』, 『해동도리보』, 『여지편람』 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9대로 체제를 표방하면서 도로 번호는 7대로까지만 부여한 것이 특이하다. 필사자는 중앙중심적 사고가 투철했는지 서울에서 출발하지 않는 대로를 진정한 의미의 대로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조선의 간선도로망은 『도로고』(1770)에서 처음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는데, 이 책은 6대로 체제를 표방한다. 이후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830)와 『산리고(山里考)』(奎3886)는 태백산로(=봉화로)를 제7대로 추가하였고, 19세기 중・후반에 편찬된 『기봉방역지(箕封方域誌)』(奎11426), 『정리표(程里表)』(奎7071, 奎6243), 『해동주거도(海東舟車圖)』(奎12640) 등은 본서와 같이 9대로 체제이다. 이후 『대동지지』(1864)에서 김정호는 수원로를 추가하여 10대로 체제를 완성한다. 그러나 이 열 개의 대로는 사실 『도로고』에 모두 ‘○○별로(別路)’나 ‘○○일로(一路)’ 등의 형식으로 이미 수록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길이 건설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로에 대로의 자격을 부여했을 뿐이다. 또한 통영로와 제주로(=해남로)는 문헌에 따라 본선과 지선이 교차 혼용되고 있다. 『도로고』와 『대동지지』는 제주로가 본선이고 통영로는 제주로의 경유지인 삼례에서 분기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 규장각 소장본 『정리표』는 ‘대로분구조(大路分九條)’라 명시하고 통영로, 제주로, 충청수영로를 하나로 묶어 제6로로 처리하여 기술 체계가 본서와 동일하다. 한편 7대로와 9대로 체제를 표방하는 자료는 ‘동래’ 대신 ‘부산’이 종점 지명으로 올라와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본서는 아마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도리 및 산경에 관련된 자료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국내에 이본과 영인본이 많지만, 경유지 전체를 비교하는 연구자료로서는 내용적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참고문헌
규장각,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 사부 4,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3.
김종혁, 「朝鮮後期 漢江流域의 交通路와 場市」,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조석필, 『태백산맥은 없다』, 사람과 산, 1997.
집필자 : 김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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