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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읍지(谷城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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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V.0000.0000-20150331.NS_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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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 | 사부-지리류
· 작성주체 곡성현(谷城縣) 편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9세기]
· 형태사항 不分卷1책(22張) : 31.5 X 20.2 cm
· 주기사항 地圖.
表題 : 穀城縣誌
地圖 : 谷城地圖(彩色)
· 현소장처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 청구기호 韓4-12

안내정보

1887년(고종 24) 경에 제작된 전라도 곡성의 지리지이다. 개인이 제작한 것이 아닌 관에서 제작한 관찬지리지이다. 이 책은 1757년(영조 33) 경에 제작된 전국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수록 전라도 「곡성읍지(谷城邑誌)」의 내용을 저본으로 내용이 추가, 수정된 지리지로 판단된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조선시대 제작된 지리지의 경우 개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제작한 사찬지리지(私撰地理志)를 제외하면 관찬지리지는 편저자를 파악하기 힘들다. 기존 연구결과에 의하면, 중앙정부에서 전국적인 지리지를 제작하기 위하여 각 감영으로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각 고을에서 작성된 지리지가 다시 수합되어 최종 정리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의 경우 지리지 제작 명령인 읍지상송령(邑誌上送令)이 내려진 시점에 곡성읍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로는 관원의 명단에서 마지막 인물인 이준영(李俊永)이 병술(1886년) 4월에 다른 관직으로 제수된 내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다음 수령의 임기가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1886년 4월-1887년 사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구성 및 내용
곡성읍지의 체제는 1757년(영조 33) 경에 제작된 전국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수록 전라도 「곡성읍지(谷城邑誌)」와 같다. 또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1883년 제작의 『곡성읍지(谷城邑誌)』(청구기호 想白古 915.14-G557)와는 내용이 완벽하게 동일하다. 다만 1883년에서 1886년 사이에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 추가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곡성지도(채색), 지역개관, 방리(坊里), 도로(道路), 군명(郡名), 형승(形勝), 관직(官職), 산천(山川), 성씨(姓氏), 풍속(風俗), 단묘(壇廟), 공해(公廨),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교량(橋梁), 역원(驛院), 관애(關隘), 누정(樓亭), 사찰(寺刹), 고적(古跡), 인물(人物), 효자(孝子), 열녀(烈女), 사마(司馬), 한전(旱田), 수전(水田), 진공(進貢), 조적(糶糴),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俸廩), 군병(軍兵), 방리(坊里), 관적(官蹟)
이 책은 붓으로 필사하여 작성된 필사본 지리지이다. 책의 표지는 전형적인 조선의 5침 장정으로 되어 있으며 표제(表題)에는 '穀城縣誌'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곡성(谷城)을 '곡성(穀城)'이라고 다르게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표제가 실수에 의한 것인지 또는 의도된 변형인지는 알기 어렵다. 고서의 정식 명칭으로 인정되는 본문 권수제(卷首題)의 경우에는 '谷城邑誌'로 표기되어 있다. 본문의 첫 두 면에는 곡성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수령이 거주하는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붉은색으로는 도로를 표시하였고 파란색으로는 산지와 수로를 묘사하였다. 곡성의 주요 이정표가 되는 지명과 소속 면(面)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지도는 『여지도서』에 수록된 곡성지도와 기본적인 형태는 유사하나 동일하지는 않다. 또한 규장각에 소장된 1883년 제작 추정의 책에서는 지도가 수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표지에는 지도 표시가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없음) 연관관계를 분명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지역개관'에 해당하는 내용은 권수제의 제목이 표시된 다음에 제시되는 내용으로 주진(主鎭)과의 소속관계를 나타내는 군사적인 내용과 인근 군현과의 거리 등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지리지 제작은 1757년(영조 33) 경에 제작된 『여지도서』의 특징으로 조선후기의 지리지 제작이 많은 부분 『여지도서』 내용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방리' 항목에는 곡성읍을 구성하는 8개의 면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후기 지리지의 특징으로 조세와 관련된 항목이 구체화되어 제시되고 있는데, 이 지리지에도 각 면의 가구수, 인구수가 기재되어 있다. '도로' 항목에는 각 지역 간의 거리와 주요 도로 상황을 표기하였다. '건치연혁'은 이 지역의 역사적 개관을 간략히 설명하는 항목으로 본래 백제의 '욕내군(欲乃郡)'이에서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는 행정구역 변천이 기록되어 있다. '군명'은 이 지역을 달리 부르는 별칭, 이칭을 적어 놓은 것으로 '욕내(欲乃)', '욕천(浴川)'이 기대되어 있다. 다만 표지에 기록된 '곡성(穀城)'의 어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형승'은 지역의 형세에 대한 풍수적인 해설이다. 이는 지역에 따라, 작성자에 따라 그 분량이나 접근방식이 상이한데 곡성의 경우 간략히 한 줄로만 서술해 놓았다. '관직' 항목은 이 지역에 근무하는 각 관리들의 인원수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산천' 항목은 지역의 대표적인 산과 강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첨부한 것이다. 본래 조선 전기의 지리지를 대표하는 1530년(중종 25)『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산천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는 각 산과 강에 대해 노래한 시문(詩文)을 수록하였기 때문인데, 이러한 인문지리적 시각의 지리지는 숙종-영조를 거치면서 점차 변화되어 국가운영에 실용적인 형태로 바뀌게 되면서 시문을 배제한 이와 같은 형태로 변화하였다. '성씨'는 지역의 대표 성씨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 전기에는 토성(土姓)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인구구성의 변화에 따라 주요 가문의 성씨를 기재하게 되었다.
'풍속' 항목은 지역성을 주관적인 시점에서 서술한 것으로 곡성의 경우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지속적인 산출이 없다."라고 하였다. '단묘' 항목은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려단(厲壇) 등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표시한 것이다. '공해'는 공공건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객사(客舍) 등의 건물이 기록되어 있다. '창고' 항목에는 주요 보관소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물산' 항목에는 지역 특산품을 기록하였다. '교량'에는 주요 다리의 위치를, '역원' 항목에는 주요 도로에 있는 역과 원의 위치, 그리고 소속인원을 설명하였다. '관애' 항목은 방어를 위한 주요 천연요새를 기록하고 있다. '누정'에는 주요 누각의 위치와 이름을, '사찰' 항목에는 불교 사찰을 기재하였다. '고적'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주요 지점을 설명하고 있다. '인물' 항목에서는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시대순에 따라 배열하였는데, 곡성에서는 가장 먼저 신숭겸(申崇謙, ?-927)을 기록하였다. '인물'항목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배치와 내용의 순서가 다른데 곡성에서는 주요 역사적 인물 다음으로 '효자', '열녀', '사마'를 배치하고 있다.
이상의 부분이 인문지리적인 내용을 수록하였다면, 이후의 내용은 조선후기 관찬지리지의 특징인 조세, 군사와 관련된 통계부분이다. 『여지도서』의 체제를 따르는 지리지에서는 이 부분의 순서가 동일하게 구성되고 있다. 지역의 밭의 총 규모를 나타내는 '한전', 논의 총 규모를 나타내는 '수전', 공납을 바치는 상황에 대한 기록인 '진공', 조선시대 물가의 조절과 진휼을 위해 쌀을 풀거나 거두어들이는 사항에 대한 내용인 '조적', 세금 항목인 '전세', '대동', '균세'. 관리의 봉급으로 나가는 쌀의 기록인 '봉름' 또한 수록되어 있다. '군병' 항목에는 지역의 군사편제와 군사의 수, 장교의 수 등이 기재되어 있다. '방리'는 본문의 앞에서도 기재되었으나 이 부분에서 더욱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본문의 마지막 항목은 '관적'으로 곡성에서 근무하였던 역대 수령들의 명단에 해당한다. 1895년 이후에 제작되는 지리지에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항목을 '선생안(先生案)'이라고 통일하여 기재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1890년대 제작되는 지리지들이 전용 용지에 제작되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지리지는 1890년 이후에 제작된 지리지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관적'에 수록된 마지막 인물인 이준영(李俊永)의 병술(1886년) 4월 행적까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체직 직후 제작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서지적 가치
① 서지적 가치
이 책은 곡성의 지리지 변천에 있어 어떠한 순서로 내용이 변화되고 추가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현존하는 조선후기 곡성의 지리지의 계보를 본다면 다음과 같다.

제작시기

서명

소장처

1757

『여지도서』「곡성읍지」

교회사연구소

1883

『곡성읍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886

『곡성읍지』

일본 오사카 나카노시마도서관

1899

『곡성군읍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후기 지리지의 계열은 크게 관찬지리지와 사찬지리지의 형태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관찬지리지는 영조연간에 제작된 『여지도서』의 체제를 따르는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사찬지리지의 형태를 따르는 지리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본 책은 이러한 『여지도서』계열의 지리지가 어떠한 변화를 거치며 증보, 개수 되어 왔는지를 확인하는 좋은 사례이다. 1883년, 1889년 지리지와 함께 비교해 보면 체제상의 큰 변화가 없이 내용의 추가가 이루어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지리지가 참조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내용적 가치
② 내용적 가치
본 책의 내용은 규장각에 소장된 1883년 제작 지리지와 동일하다. 이 두 책 간의 관계는 1886-1899년 지리지의 관계보다 보다 밀접해 보이는데, 각 면에서 글자가 바뀌는 부분까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만 1883년의 지리지는 지도가 없다는 점, 1886년의 본문에 새로 부임한 수령들의 명단이 추가되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1899년의 지리지에는 채색지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지도는 본 책에 수록된 지도와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본문의 내용에서는 몇몇 출입이 확인되며 본문의 마지막 항목인 '관적'이 1890년대 지리지의 특징인 '선생안'으로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 이 선생안에는 본 1886년 지리지의 마지막 인물인 이준영 이후 부임한 수령 9인의 명단이 추가되어 있다.
참고문헌
김전배, 『조선조의 읍지연구 : 현존읍지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2.
양보경,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7.
정대영, 「1899년 전국읍지상송령과 읍지편찬 연구」, 『서지학보』 38, 2011.
정대영, 「‘기인한상량’, 19세기 초 홍희조가 바라본 조선의 지리지 제작」, 『한국문화』 72, 2015.
정대영, 「영조연간 전국지리지 『여지도서』의 서지적 연구」, 『서지학연구』 68, 2016.
김백철, 「고종대 읍지의 연대분류 시론」, 『규장각』 49, 2016.
집필자 : 정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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