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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읍지(同福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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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V.0000.4679-20090716.AS_SA_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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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지지 | 사부-지리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전라도(全羅道) 동복읍(同福邑)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四周雙邊 半郭 23.3 x 15.0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無魚尾 ; 31.4 X 20.4 cm
· 주기사항 內容: 全羅道同福邑誌임
卷末先生案: 最後先生 沈鳳錫 癸丑(1793)到任 乙卯(1795)七月貶遞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0.36

안내정보

18세기 말에 편찬된 전라도 56개 군현 중 동복현의 관찬읍지(官撰邑誌)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동복현에서 주관하였다.
구성 및 내용
동복현은 1914년화순군에 병합되어 동복면, 내남면, 외남면, 이서면, 내북면, 외북면이 되었고, 현 전라남도화순군북면, 이서면, 동복면, 남면이 옛 동복현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
조선후기 동복현의 위치와 영역
본 읍지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 편저자 및 서문, 목차 없음
- 지도 : 8방 경계와 도로를 표시하였고 산세와 하천 유로를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명으로는 산과 고개가 대부분이고, 물량정(勿梁亭)과 남원(藍院)이 표시되었다.
- 건치연혁 : 백제, 신라, 고려, 조선 태조, 태종, 효종, 현종 대 명호의 개명과 소속 관계가 기술되어 있다. 동복이라는 이름은 신라 때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군명 : 백제 때의 이름인 두부지(豆夫只)를 비롯하여 구성(龜城), 옹성(瓮城), 복천(福川), 나복(蘿葍) 등의 이명이 적혀 있다.
- 관직 : 당시 지방관의 품계를 표시하였다. 이는 읍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읍격은 기본적으로 부-목-군-현 체제였는데 현은 현령(종5품)과 현감(종6품)이 파견되는 두 종류가 있었다. 당시 동복현의 읍격이 현감임을 알려준다. 현감은 지방 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다. 『대전통편(大典通編)』(1785)에는 전국적으로 330읍이 등재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현감이 124읍(37.6%)으로 가장 많았고 현령은 26읍이 있었다.
- 방리 : 읍내면 포함 7개면의 읍치로부터의 방향(4방) 위치와 떨어진 거리, 그리고 각 소속 리의 개수가 적혀 있다. 읍내면 외 여섯 면(내남, 내외, 내서, 외서, 내북, 외북) 이름은 4방 이름과 내·외가 결합된 방위면 형식을 취하였다.
- 도로 : 대로와 소로를 나누어 먼저 기술하고, 북, 남, 동남, 서남방의 주요 지점까지의 거리와 일정(日程)을 표시하였다. 동(순천까지)·남(보성까지)·서(화순까지)·북(옥과까지) 순의 4방과 서북(창평-담양까지)·서남(능주까지) 방향으로 난 길이 대로이고, 동북(곡성까지)·서북(광주까지) 방향으로 난 길이 소로이다. 주요 지점으로는 북쪽에 경도(京都)와 감영(監營, 현 전주), 남쪽에 병영(강진), 동남쪽에 좌수영(여수), 서남쪽에 우수영(해남)이 채택되었다. 경도까지 775리에 8.5일, 감영까지 220리에 2.5일, 병영까지 160리에 2일, 좌수영까지 180리에 2일, 우수영까지 230리에 3일 일정으로 기록하였다. 이를 계산하면 1일 평균 이동거리는 86.9리이다.

 종점

 거리(里)

 日程(日)

 里/日

현 위치 

 경도

 775

 8.5

 91.2

 서울

 감영

 220

 2.5

 88.0

 전주

 병영

 160

 2

 80.0

 강진

 좌수영

 180

 2

 90.0

 여수

 우수영

 230

 3

 76.7

 해남

 합/평균

 1565

 18

 86.9

 

- 성지(城池) : 성지 항목(項目)에 ‘무(無)’라고 적혀 있다. 저본에 해당하는 읍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사 항목이 이미 선정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 산천 : 백아산, 모후산, 안양산, 경산, 구봉산, 천운산, 천봉산 등의 산과 이존천이 적혀있다. 『여지도서』에 비해 소략하다.
- 성씨 : 오, 정, 김, 조, 이, 나, 박, 여, 신, 안, 최씨 등 본관과 함께 11성이 적혀 있다.
- 풍속 : ‘백성들이 꾸밈이 없고 소박한 점이 많다. 농사일과 누에치는 일에 부지런히 힘쓴다.’라고 간략하게 적혀 있다.
- 학교 : 창건과 이설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444년(正統甲子)에 현의 서쪽 3리 지점에 세워졌다가 1713년(肅廟癸巳)에 현의 남쪽으로 옮겼고, 1756년(英廟丙子)에 현 서쪽의 옛 터로 다시 옮겼음을 기술하였다. 학교는 곧 동복향교를 일컫는다. 현 전남문화재자료 제125호이다. 서쪽 3리는 연월리구릉리이고, 옮긴 남쪽은 독상리로 비정된다.
- 서원 : 1670년(顯廟庚戌)에 현 서쪽 3리 지점에 창건되어 1688년(肅廟戊辰)에 ‘도원(道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화순군동복면에 있다. 초계 최씨(草溪崔氏)의 시조이자 조선 전기의 문신 최산두(崔山斗, 1483-1536), 조선 중기의 무신 임억령(林億齡, 1496-1568), 정구(鄭逑, 1543-1620), 안방준(安邦俊, 1573-1654) 등 4현(四賢)을 배향하고 있다.
- 단묘 : 사직단, 성황단, 여단, 신위각이 등재되었다.
- 공해 : 객사, 동헌, 향사당의 위치와 창건·중건·이건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
- 관애 : 없음으로 기록되어있다.
- 봉수 : 없음으로 기록되어있다.
- 제언 : 1처가 있다. 방위와 거리, 규모(周回 990척)가 적혀 있다.
- 장시 : 석보장과 사평장 두 장시가 적혀 있다. 두 장 모두 방위와 거리만 있을뿐 개시일이 명시되지 않았다.
- 교량 : 없음으로 기록되어있다.
- 역원 : 검부역과 남참원이 기재되어 있다. 검부역은 거리와 방위(남 5리)로 위치를 표시하였고, 소유 마필(10필) 수와 역노비(노 13구, 비 2구)가 기록되었다. 역도(驛道) 소속을 표시하였다(屬景陽道). 남참원 역시 거리와 방위(북 30리)로 위치를 표시하였다.
- 사찰 : 회마사, 영봉사, 용선암, 안심사 문수암이 기재되었다.
- 누정 : 응취루, 협선루, 물염정, 창랑정, 영진당, 금사정 등이 제영시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여지도서』보다 내용이 상세하다.
- 형승 : 적벽과 물염석벽이 기록되어있다. 『여지도서』에는 적벽이 산천 조에 올라 있고, 물염석벽은 없다.
- 물산 : 대나무, 닥나무, 칠, 차, 봉밀, 천문동, 감, 호도, 석류, 꿩, 은구어 11종이 기재되어 있다. 은구어는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고 적혀 있다.
- 진공 : 월령에 의거한 진공품과 삭선(朔膳, 매달 초하룻날에 각 도(道)에서 나는 물건으로 차리던 수라상)을 위한 월별 진공품, 그리고 납일(臘日, 동지 후 세 번째 未日)에 쓰일 납육을 기재하였다.
- 인물 : 고려시대의 첫 번째 인물로 오대승이, 조선시대 첫 번째 인물로 최두산이 등재되었다. 이외 열녀, 효자, 절의 하위 항목이 있다.
- 과한 : 문과와 무과의 과거 급제자가 등재되어 있다. 합격한 과거와 역임한 최고 관직이 기록되어있고, 주요 인물에 대해서는 관련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분개하여 벽에 대인륜시(大人倫詩)를 쓴 하윤구(河潤九, 1570-1646)와 1615년(광해군 7)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정언·현감 등을 역임한 후 노년을 물염정에서 보낸 나무송(羅茂松, 1577-1653)이 가장 자세하다. 본 읍지 누정 조 물염정에 나무송의 제영시가 소개되어 있다.
- 음관 : 남언기 등과 생원 김윤충, 진사 하자담 등이 등재되어 있다.
- 고적 : 석등 1기와 철옹산성 옛터가 기록되어 있다.
- 상납 : 훈련도감납, 어영청납, 금위영납, 병조납, 이조납, 장락원납, 총융청납의 물품과 수량이 적혀 있다.
- 호구 : 임자식 호구수가 적혀 있다. 민호가 2,156호이고 인구는 7,752구(남 3,407구, 여 4,345구)이다. 본 읍지 선생안 마지막 인물인 심봉석의 임기가 1793년부터 1795년이므로, 여기서 가장 가까운 임자년은 1792년이다. 이 호구수는 규장각 소장본인 『동복현읍지』(규 17432)의 호구수와 정확히 일치한다.
- 전총 : 경지면적이 적혀 있다. 수전은 원장부결 1,161결 64부와 신해년(최근 신해년은 1791년)의 시기결 984결 75부 5속이, 한전은 원장부결 1,121결 52부 7속과 신해년 시기결 678결 30부 3속이 등재되었으며, 이밖에 화전 3결 79부 1속이 기록되었다.
- 전세 : 전세의 종류[조미(糙米), 황두, 삼수량미(삼수미)]와 각 수량이 명시되어있다. 소주(小註)에 법성진 조창(법성포창, 현 전라남도영광군)으로 수납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 대동 : 조세의 하나인 대동미 조로 납세하는 원목, 전목, 저치미(儲置米)의 수량이 적혀 있다.
- 균세 : 조세의 일종으로 선무군관포와 결전이 적혀 있다.
- 봉름 : 당시 관원들의 봉급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다. 관수미(수령 몫의 양식 쌀), 사객지공미(사신을 대접하는 몫의 쌀) 등의 현물과, 아록위(아전 녹봉의 토지), 공수위(관아 경비 충당을 위한 토지), 관둔전(군자를 보충하기 위한 토지)과 같은 토지 명목이 명시되었다.
- 요역 : 민전(民田) 8결마다 치계(雉鷄) 각 1수, 시(柴) 75주, 큰횃불(大炬) 1자루(柄), 소거 4자루, 탄(炭) 1석, 고초(藁草) 2부 5속이 배당되었다.
- 창고 : 사창, 대동고, 관청고, 군기고, 외창에 대한 위치와 건립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
- 조적 : 군자창, 상진청, 경진청, 군역청 등의 관청별 환곡 수량과 회부, 회외, 도합, 군향 등의 환곡 업무가 기록되어 있다.
- 군기 : 활, 정통, 화약 등의 무기류를 명시하고 각 보유량을 적었다.
- 군액 : 군역청,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병조, 장락원, 이조, 총융청, 순영, 진상보, 병영, 순천진 등의 소속 군인 수와 아전, 지인(지방관의 관인(官印)을 관리), 사령과 같은 하급 관리인 수, 그리고 관노와 관비 수가 적혀 있다.
- 선생안 : 전임 관원의 성명, 역임 기간(연월)이 기재되었다. 정구(鄭逑, 1543-1620), 황진(黃進, 1550-1593), 김성원(金成遠, 1525-1597), 안절(安節, 1656-?) 등이 등재되어 있다. 마지막 인물은 심봉석(沈鳳錫, 1729-?)이다. 심봉석은 1790년(정조 14) 6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793년부터 1795년까지 동복현감으로 재직하였다.
서지적 가치
선생안 마지막 인물인 심봉석의 재직 기간(1793-1795)을 통해 보면 본 동복읍지는 정조 연간 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동복읍지 두 책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동복읍지[청구기호:M古3-1995-33, 마이크로 필름, 1995]가 Berkeley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의 것을 영인한 것으로 본 읍지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하나는 1855년에 송긍면(宋兢勉)이 서문을 쓰고 오재영(吳在永)이 후서를 쓴 동복지(同福誌)로 본 읍지보다 항목이 훨씬 많아 양자를 비교하면 좋다. 다만 추가된 항목이 성씨, 충신, 충노(忠奴) 효자, 효자, 효부(孝婦), 열녀 등의 유교적 인물상과 관직자 및 과거 급제자와 같은 인물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
규장각에도 두 종의 동복읍지가 소장되어 있다. 동복군읍지(규 10783)은 1899년(광무 3)에 편찬된 필사본이다. 후대에 편찬된 것이지만 내용이 오히려 본 읍지보다 소략하다. 항목 체제가 거의 일치하는 가운데 상납, 전총, 전세, 대동, 군세, 봉름 등 수세와 관련된 내용은 항목에서 제외되었다. 비록 후대에 작성된 것이지만 본 읍지와 비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다른 하나인 동복현읍지(규 17432)는 건치연혁에서부터 선생안에 이르기까지 항목 체제가 본 읍지와 동일하고, 호구조의 호수와 남녀 인구수 또한 정확히 일치한다. 위 동복현읍지와 본 읍지는 동일 계열의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내용적 가치
『여지도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 침체된 관찬지리지의 맥을 이을뿐더러 유교 중심의 관점을 탈피한 조선시대 지리지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본 읍지 항목에는 『여지도서』에 없는 학교, 서원, 관애, 봉수, 장시, 과한, 상납, 요역, 선생안 등의 항목이 추가되어 있어 『여지도서』보다 내용이 충실하다. 전반적으로도 읍지로서의 내용 구성이 균형을 잘 갖추었다. 연혁과 방리, 도로, 산천 등의 기본 지리환경 내용뿐 아니라 행정·군사·경제·의례·문화·재정에 대한 정보도 크게 누락된 것이 없다. 특히 도로조에서 도달 지점까지의 이동 시간[日程]을 표기한 것은 보통 읍지와 달리 선진적인 면이 있다. 조선전기에 중시했던 항목인 인물 정보가 적지 않지만 이외의 항목 또한 자세하여 이를 상쇄한다. 서문이나 범례, 목차가 없어 자료 자체에 대한 정보를 얻는데 미흡하지만 18세기 후반 동복의 지리환경을 알려주는 지리지로서 충분히 중요하다.
참고문헌
규장각,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 사부 4,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3(초판 2쇄).
양보경, 『朝鮮時代 邑誌의 性格과 地理的 認識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7.
집필자 : 김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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