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분류

청하현읍지(淸河縣邑誌)

이미지 가+ 가-

자료UCI: RIKS+CRMA+KSM-WV.1855.0000-20090716.AS_SA_181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 | 사부-지리류
· 작성주체 홍옥보(洪沃輔, 1709-?) 편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1855
· 형태사항 1冊 : 彩色圖 , 半郭 23.7 x 17.1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無魚尾 ; 34.0 X 21.6 cm
· 주기사항 表題: 德城輿誌
序: 黃鼠(戊子, 1768)榴花節上澣縣宰豊山後人四休居士洪沃輔啓心序
識記: 乙卯(1855)冬修正校西藏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0.26

안내정보

1768년에 편찬된 것을 1885년(철종1)에 필사한 조선시대 경상도 71읍 중의 하나인 청하현의 관찬읍지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청하현에서 담당하였다.
구성 및 내용
청하는 1914년에 장기군, 흥해군과 함께 영일군에 병합되었는데, 오늘날 포항시 송라면과 청하면 일대이다. 청해군은 조선시대에 현내면, 동면, 남면, 서면, 북면, 역면 등 6면으로 편재되어 있었는데, 1906년에 경주군의 죽장면이 죽남면과 죽북면으로 나뉘어 본 군에 편입되었고, 역면은 내북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 읍지는 책 겉표지 앞면에 덕성여지(德城輿誌)라는 표제가 달려 있고, 바로 이어서 원본의 서문(邑誌舊序)과 목차가 딸려 있다. 서문 마지막에 ‘黃鼠榴花節上澣縣宰豊山後人四休居士洪沃輔啓心序’라고, 그리고 뒷겉표지 이면에는 ‘乙卯冬修正校西藏’이라고 지기(識記)가 적혀 있다. 황서는 무자년으로 1768년(영조44), 을묘년은 1855년(철종6)에 해당한다. 즉 영조 연간에 홍옥보가 서문을 쓴 읍지를 후대에 다시 필사한 책이다. 목차와 청하현 지도가 있다.
- 읍지목록 : 지도, 건치연혁, 군명, 관직, 성씨, 산천, 풍속, 방리, 호구, 전부(田賦), 요역, 군액, 성지, 창고, 봉수, 학교, 단묘, 불우, 공해, 누정, 도로, 제언, 장시, 어염, 역원, 목장, 형승, 고적, 토산, 진공, 봉름, 환적(宦蹟), 과거, 인물, 제영, 비판(碑版) 등 36개 항목으로 구성되었음을 알려준다.
- 청하현산천방곡도리지도(淸河縣山川坊曲道里之圖) : 채색도이다. 남쪽을 위로 향하게 그렸다. 남·북·서쪽 경계와 거리를 표시하였고 동쪽은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바다를 표현하였다. 주요 산과 하천을 기본 축으로 그리고, 원 안에 읍치와 리명을 기입하였다. 리명이 기입된, 쉽게 보지 못하는 군현도에 속한다. 이밖에 봉송정·덕송정 두 누정과 성현·천령 두 고개 그리고 도리산봉수와 학산서원이 표시되었다.
- 건치연혁 :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연혁을 아주 간단하게 기술하였다. 청하라는 이름이 고려 때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 군명 : 아혜, 해아, 덕성, 청하 네 이름이 적혀 있다.
- 관직 : 현감 아래 좌수, 별감, 군관, 리, 지인, 사령, 관노, 관비의 인원 수, 송라찰방 아래 지인, 사령, 노, 비의 인원 수를 적었다. 지인까지 사람을 세는 단위를 ‘人’으로, 그 아래는 ‘名’을 썼다. 개포만호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 성씨 : 청하현 성으로 이·김·명·주·정씨, 남계(南界) 성으로 길씨가 적혀 있다. 명·주·길씨는 지금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산천 : 호학산, 내연산, 도리산, 신구산, 별내현, 용산, 덕성산, 해(海), 개포, 이지로포, 호혈포, 고송라포, 도리포, 벌지가 소개되었다.
- 풍속 : ‘학문을 숭상하고 무예를 익힌다. 농사와 길쌈을 열심히 하고 예스럽고 순박한 것을 좋아한다.’고 적었다.
- 방리 : 현내면, 동면, 남면, 서면, 북면, 역면 등 6개면과 각 소속 리의 위치와 거리를 표시하였다. 본 읍지 내 군현도에 리가 표시되어 있다. 리의 총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호구 : 원호 1,733호, 남녀 인구 6,875구가 기록되었다. 이 가운데 남자가 3,270구 여자가 3,605구이다.
- 원부 : (旱田) 원장부에 666결 57부 8속이고 이 가운데 각종 명목으로 세금을 면제받은 밭과 묵은 밭, 그리고 여러 이유로 빠진 밭이 231결 81부 1속이며, 지금 경작하고 있는 밭이 434결 76부 7속이다. (水田) 원장부에 512결 84부 5속인데, 이 가운데 각종 명목으로 세금을 면제받은 밭과 묵은 밭, 그리고 여러 이유로 빠진 논이 91결 57부 8속이고 지금 경작하고 있는 논이 421결 26부 7속이다. 전세(田稅)로 목(木) 10동 5필 17척 7촌, 미(米) 84석 2두 9도 5홉 1작, 태(太) 8석 3두 4작, 대동(大同) 조로 본목(本木) 4동 49필, 작목(作木) 4동 49필 결전(結錢) 조로 449량 5전 5푼을 바친다.
- 요역 : 시(柴), 계(鷄), 탄(炭) 등 여러 요역 상황을 적었다.
- 군액 : 훈련도감, 어영청, 서관, 장악원, 금위영, 병조, 충익위, 감영, 좌병영, 수영, 경주진, 이노작대, 선무군관 등의 구성원 수를 적었다.
- 성지 : 읍성을 적었다. 1427년(세종9)에 축조하였다. 둘레 길이와 높이를 적고 우물 2개와 못 2개가 있는데 우물 하나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 창고 : 군자창, 상진창, 군작창, 사진창, 별회창, 영진창, 포항창, 통영, 호적고, 군기고, 관청고가 실렸다.
- 봉수 : 도리산봉수가 올랐다. 위치와 호응하는 봉수를 적었다.
- 학교 : 향교 하나가 실렸다. 위치와 지현(知縣) 안석전(安錫佺)의 기(記)가 올랐다.
- 단묘 : 사직단, 문묘, 성황단, 여단, 학산서원이 실렸다. 위치만 간단히 적었다. 성황단은 예전에 용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현 동쪽 1리 지점으로 옮긴 사실을 적었고, 학산서원(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위패를 모셨음을 적었다.
- 불우 : 보경사와 경내의 금법당, 사천왕문 그리고 대비암, 내원암, 계상암, 문수암, 선열암(이상 내연산 소재), 상태사, 성도암이 소개되었다. 보경사는 포항시 송라면 중산리 내연산(內延山)에 있다. 602년(진평왕 25) 진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大德) 지명(智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지명은 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하니 왕이 기뻐하며 내연산 아래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金堂)을 건립한 뒤 보경사라 하였다고 한다.
- 공해 : 객관, 동헌, 향사당, 장관청, 군관청, 현사, 인리청, 형리청, 정정소, 사령청, 관노청이 별 설명 없이 이름만 적혀 있다.
- 누정 : 부옹루(지금의 읍성 동문루로, 현재(賢宰) 김명연(金明淵, 1753-1830)의 중수상량문이 실려 있다), 매죽루, 봉송정, 풍래정, 해월루(이언적의 장황한 기문이 실렸다), 육청헌, 천화루(향교의 문루로 엄구의 중수기가 실렸다), 중화루(학산서원의 문루), 우양루, 임영각(송라찰방의 政堂), 관일루(본 읍지 원본의 서문을 쓴 홍옥보의 기문이 실렸다), 비하대가 올랐다.
- 도로 : 사방 경계까지의 경유지 한 곳과 리수를 기록하였다.
- 제언 : 호학제, 마사제, 어화제, 사포제, 도북제, 사곡제, (신증) 엄곡제, 수구방제, 보경천방보, 대평천방보, 광흥천방보, (신증) 열청방천보의 위치와 길이, 수심이 기록되었다.
- 장시 : 읍내장과 송라장의 위치와 개시 일자가 기록되었다. 송라장이 역면 외삼동리에 있다가 최근 관동리로 이설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 어염 : 어전, 염분(없음), 어선, 삼선, 곽전(藿田) 항목이 적혀 있다.
- 역원 : 송라역의 위치와 사방 역 간 거리, 소유 마필 수와 역리, 역노비 수가 적혔다. 또한 고현리원, 금정원, 고송라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고 기록하였다.
- 목장 : 없음을 기록하고 있다.
- 형승 : ‘동쪽으로 넓고 푸른 바다를 누르는 듯하고 서쪽으로 중첩된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다.’라 하고 다시 ‘돌로 쌓은 보루가 큰 바다를 베개삼고 있는 듯하다.’라고 적혀 있다. 앞의 것은 홍여방의 기문에, 뒤의 것은 조서강의 시에 나오는 구절임이 소주에 쓰여 있다.
- 고적 : 고청하, 북아부곡, 등정부복, 김해부곡, 모등곡부곡, 신지부곡, 간천부곡, 남계부곡, 보경사가 각 위치와 함께 올라 있다.
- 토산 : 방어, 전복, 대구어, 청어, 홍합, 백조어(今無, 잉어과의 민물고기), 해의(海衣, 김), 곽(藿), 광어, 봉밀, 석단, 문어, 삼신어, 고도어(고등어), 도야미, 사어(모래무지/상어), 홍어, 해삼, 마황, 황백, 목통, 만형자. 괴실(회화나무 열매)이 적혀 있다. 마황 이하는 약재로 쓰이는 것들이다.
- 진공 : 인삼, 태수, 반묘(곤충의 하나), 蝪蚚, 올눌제(해구신), 복신, 백작약, 맥문동, 청수향, 방풍, 괴실, 생문어, 건대구어, 생대구어, 건문어, 판광어, 조곽(일찍 딴 미역), 분곽(최상의 미역)이 있다.
- 봉름 : 아록위와 공수위의 결수와 민결에서 거두어 쓰는 물품이 적혀 있다.
- 환적 : 민천좌부터 임택호(任澤鎬, 1839-?)에 이르까지 청하현수령 200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마지막 인물 임택호는 1885년(고종 22)에 증광시 병과 35위로 합격하였다.
- 과거 : 김문용, 김득경, 이필성 세 명의 이름이 올랐다.
- 인물 : 절부 김씨, 효자 이원량, 참봉윤락, 현령김석경, 검사윤백주, 효자 이원삼, 절부 권씨, 오위장이동신이 기사와 함께 실렸다.
- 제영 : 수 십편의 시문이 작자와 함께 실려 있다.
- 비판 : ‘보경사원진국사사적비명이공로서’와 ‘성도암원각조사비명’이 실렸다.
- 지기(識記) : ‘乙卯冬修正校西藏’이라고 쓰여있다. 을유년은 1885년으로 추정된다.
서지적 가치
본 읍지는 1768년 홍옥보가 편찬한 것을 저본으로 하여 1855년에 필사한 것이다. 청하읍지는 1768년 본 읍지가 여러 필사본의 저본으로 사용되었다. 규장학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청하현읍지』(규10813)는 광무 연간(1897-1907)에 편찬된 것인데, 홍옥보의 ‘舊序’와 1871년 필사본인 李純謙의 ‘後序’가 모두 실려 있다. 본 읍지는 두 저본의 사이에 있는 것으로 이순겸 필사본의 저본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청하현읍지』(G002+AKS-CI20_67871-04)가 1871년 이순겸이 서문을 쓴 필사본이다. 결국 청하읍지는 최소한 1768년, 1855년, 1871년, 광무 연간에 단일 읍지로 편찬되었으며, 『여지도서』나 『대동지지』등의 전국지리지 및 사찬 읍지 등을 구비하면 시계열적 분석도 가능할 듯하다. 실제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읍지는 19세기 후반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본 읍지의 시계열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
내용적 가치
우선 읍지목록과 군현도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체제를 잘 갖춘 읍지로 인정할 수 있다. 지도는 소략한 편이지만, 지리서 안에 수록된 지도로서는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불필요한 선이나 지명은 과감하세 생략함으로써 가독성을 높이는 효과가 드러나기도 한다. 19세기 읍지로는 비교적 항목이 세분되어 있고, 지리, 역사, 경제, 행정, 군사 등 다방면에 걸친 항목이 골고루 잘 배분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준다. 이 가운데 어염(魚鹽)이나 비판(碑版)은 다른 읍지에서 잘 보이지 않는 항목이다.
전체적으로 구성은 잘 갖춘 편에 속하지만, 내용은 약간 소략하여 읍지로서의 큰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표적으로 호구조가 방리조와 분리되어 면 또는 리 단위 인구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내용의 소략함이 잘 드러난다. 고적조에는 청하고읍과 함께 부곡 7처가 올라 있다. 방향과 리수만 간단하게 적혀 있어 아쉽지만 특수 행정 구역에 대한 위치 비정 연구에는 분 읍지가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준다. 내용이 소략하지 않은 대표적이 항목은 인물조인 듯하다. 환적, 과거, 인물, 제영 등은 모두 유교적 가치를 중시한 항목들로, 『여지도서』 이후 약해진 읍지의 유교적 이념과 관련된 항목이 18세기 이후 상대적으로 강조되는 지리·사회·경제·군사 정보 부문과 대등하게 취급되었다. 이 점에서 본 읍지는 17세기 이후 왕성하게 편찬되었고, 체제적으로는 실질적 정보와 이념적 정보를 통합했던 사찬읍지적 성격을 띠고 있다.
참고문헌
규장각,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 사부 4,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3.
양보경, 「朝鮮時代 邑誌의 性格과 地理的 認識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7.
집필자 : 김종혁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