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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읍지(靈光郡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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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V.1891.0000-20090716.AS_SA_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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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 | 사부-지리류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영광군(靈光郡), 광서 17(1891)
· 형태사항 1冊(52張) : 無匡郭, 無界, 6行15字, 無魚尾 ; 32.7 X 21.0 cm
· 주기사항 表題: 靈光邑誌
表紙: 光緖十七年辛卯(1891)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20.41

안내정보

1891년(고종28)에 편찬된 전라도 56읍 중의 하나인 영광군의 관찬지리지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영광군에서 담당하였다.
구성 및 내용
영광군의 위치와 영역의 변화
영광군은 조선시대에 면이 30개 달했는데, 1914년에 내부적으로 진행된 면 통합과 함께 일부 지역을 장성군과 무안군에 넘겨주고, 지도군(현 신안군)에서는 일부 지역을 넘겨 받아 12개 면으로 재편되었다. 오늘날 장성군삼서·삼계·동화면은 조선시대 영광군삼남·삼북·내동·외동·내서·외서면 지역이었고, 오늘날 무안군 망운면은 조선시대에도 이름은 같지만 영광군의 월경지였다. 결국 오늘날 영광군은 조선시대보다 영역이 축소된 상태로, 지금은 영광읍·백수읍·홍농읍·대마면·묘량면·불갑면·군서면·군남면·염산면·법성면·낙월면 11개 읍면을 관할하고 있다.
본 읍지는 『영광읍지(靈光邑誌)』 표제 안에 지도가 있고, 다음 장에 ‘光緖十七年辛卯靈光郡邑誌’라는 편찬 시점을 알려주는 간략한 판권 사항이 있다. 광서 17년은 1891년(고종28)이다. 이하 본 읍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목차와 서문이 없다.
- 지도 : 북쪽을 위로 하고 중앙에 읍성을 두었다. 읍성은 4대문을 표시하고 읍성 안에는 여러 관아 건물을 그려 넣었다. 읍성을 중심으로 꽃이 핀 형상으로 산세가 그려졌고 최외곽에는 8방 경계와 주요 도로명도 기입하였다. 직사각형 안에 면명을, 섬 안에 섬명을 기재하였으며, 주요 취락과 산, 여울, 사찰, 나루, 역, 진(법성진·임자진·다경진) 등이 표시되었다. 읍지 안에 수록된 지도로서는 제법 자세하게 그려졌다.
- 사방 경계 : ‘영광군 나주진관’이라는 제하에 사방 경계와 거리, 그리고 한성·감영·병영·우수영까지의 거리와 일정(日程)을 표시하였다. 1일 평균 이동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 건치연혁 : 백제로부터의 군명 변화와 조선 이후 읍격 승강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였다.
- 군명 : 무시이, 무령, 오성, 정주 네 이름이 올랐다.
- 풍속 : 귀신을 받든다(지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선비는 학문을 숭상하고 백성들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쓴다(앞 시대 사람이 지은 기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풍속이 역사에 전해질 만하다(안초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 성지 : 읍성의 둘레, 높이, 중수, 현재의 상태 등을 기술하였다.
- 단묘 : 사직단, 문묘, 성화사, 여단 네 곳이 올랐다.
- 관직 : 군수 이하 좌수, 별감, 읍창감간, 해창감관, 호적도감, 수교, 병장, 장무군, 도장, 군기감, 의국감, 천총, 수성통장, 아전, 지인, 기생, 관노, 사령, 비, 포군의 인원 수가 적혀 있다. 기생을 기재한 읍지는 많지 않다.
- 공해 : 객관, 아사, 근민당, 운금정, 아문루, 향사당, 호적고, 훈련청, 수성청, 작창, 군사, 형청, 지청, 지공청, 무판청, 관청, 군기고, 수군기고, 읍창, 민고, 장청, 포청, 의국, 서청, 사령청, 교방청, 관노청이 수록되었다. 신숙주의 기문을 통해 객관의 건축, 이설, 중수에 대한 사실이 언급되었다.
- 누정 : 진남루, 의두문, 빈양문, 정서문, 만경루, 청풍루, 동포루, 서포루, 의하정, 동조정이 올랐다.
- 동서읍 : 동읍과 서읍을 가리킨다. 편호와 남녀 인구 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방리조가 다시 시작된다. 읍치에 해당하는 동읍과 서읍은 일반 면과 구별하되 하나의 읍처럼 인식하고 있다. 이름이 ‘면’이 아니라 ‘읍’이다.
- 방리 : 사방을 먼저 표시하였다 동쪽에 동부면, 묘장면, 마촌면, 내동면, 현내면, 삼남면, 외동면이, 서쪽으로는 관산면, 영마면, 봉산면, 구수면, 원산면, 상제도가, 남쪽에 서부면, 남죽면, 불갑면, 망운면, 진하산, 다경포가, 북쪽에 도내면, 동남쪽에 황량면, 외서면이, 서남쪽에 염소면, 마산면, 외간면, 육창면, 중서제도, 하제도, (신증) 삼도, 서북쪽에 홍농면, 동북쪽에 태안면, 삼북면이 관문과의 이격 거리와 호수, 남녀 인구수를 기록하였다. 모두 합쳐 편호 9,491호, 남녀 인구 수(남 17,648 / 여 18,555)가 기록되어 있다.
- 산천 : 산, 풍사(風沙), 하천, 나루(법성포 하나만 수록되었다), 파시(波市), 여[바위섬], 섬이 수록되었다. 해안에 접한 군 중에서도 수록된 섬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島’만 34개가 소개되었다. 산은 소재지와 산줄기의 맥상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풍사는 해안가에 형성된 해안사구를 지칭한다. 사구를 기록한 읍지는 많지 않다. 사구의 형태나 규모가 눈에 띨 정도로 두드러졌던 것 같다. 『대동여지도』에 유사(流沙)로 표기되어 있는데 같은 것이다. 파시평(波市坪)에는 다음과 같이 소주가 달렸다. ‘칠산 윗바다에 있다. 조기가 난다. 매년 봄에 서울과 지방의 상선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바다 위에서) 판매하는데, 서울의 저잣거리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이 어선들은 모두 세금을 낸다.’ 이른바 바다 위에서 열리는 시장이다. 영광의 조기 파시는 유명했다. 『여지도서』에는 ‘波市田’으로 올라 있다. 바다에 있는 밭이다. ‘평’이든 ‘전’이든 ‘거두어들인다, 수확한다, 캐낸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영광군은 조선시대에 면이 30개 달했는데, 1914년에 내부적으로 진행된 면 통합과 함께 일부 지역을 장성군과 무안군에 넘겨주고, 지도군(현 신안군)에서는 일부 지역을 넘겨 받아 12개 면으로 재편되었다. 오늘날 장성군삼서·삼계·동화면은 조선시대 영광군삼남·삼북·내동·외동·내서·외서면 지역이었고, 오늘날 무안군 망운면은 조선시대에도 이름은 같지만 영광군의 월경지였다. 결국 오늘날 영광군은 조선시대보다 영역이 축소된 상태로, 지금은 영광읍·백수읍·홍농읍·대마면·묘량면·불갑면·군서면·군남면·염산면·법성면·낙월면 11개 읍면을 관할하고 있다.
본 읍지는 『영광읍지(靈光邑誌)』 표제 안에 지도가 있고, 다음 장에 ‘光緖十七年辛卯靈光郡邑誌’라는 편찬 시점을 알려주는 간략한 판권 사항이 있다. 광서 17년은 1891년(고종28)이다. 이하 본 읍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목차와 서문이 없다.
- 지도 : 북쪽을 위로 하고 중앙에 읍성을 두었다. 읍성은 4대문을 표시하고 읍성 안에는 여러 관아 건물을 그려 넣었다. 읍성을 중심으로 꽃이 핀 형상으로 산세가 그려졌고 최외곽에는 8방 경계와 주요 도로명도 기입하였다. 직사각형 안에 면명을, 섬 안에 섬명을 기재하였으며, 주요 취락과 산, 여울, 사찰, 나루, 역, 진(법성진·임자진·다경진) 등이 표시되었다. 읍지 안에 수록된 지도로서는 제법 자세하게 그려졌다.
- 사방 경계 : ‘영광군 나주진관’이라는 제하에 사방 경계와 거리, 그리고 한성·감영·병영·우수영까지의 거리와 일정(日程)을 표시하였다. 1일 평균 이동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 건치연혁 : 백제로부터의 군명 변화와 조선 이후 읍격 승강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였다.
- 군명 : 무시이, 무령, 오성, 정주 네 이름이 올랐다.
- 풍속 : 귀신을 받든다(지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선비는 학문을 숭상하고 백성들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쓴다(앞 시대 사람이 지은 기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풍속이 역사에 전해질 만하다(안초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 성지 : 읍성의 둘레, 높이, 중수, 현재의 상태 등을 기술하였다.
- 단묘 : 사직단, 문묘, 성화사, 여단 네 곳이 올랐다.
- 관직 : 군수 이하 좌수, 별감, 읍창감간, 해창감관, 호적도감, 수교, 병장, 장무군, 도장, 군기감, 의국감, 천총, 수성통장, 아전, 지인, 기생, 관노, 사령, 비, 포군의 인원 수가 적혀 있다. 기생을 기재한 읍지는 많지 않다.
- 공해 : 객관, 아사, 근민당, 운금정, 아문루, 향사당, 호적고, 훈련청, 수성청, 작창, 군사, 형청, 지청, 지공청, 무판청, 관청, 군기고, 수군기고, 읍창, 민고, 장청, 포청, 의국, 서청, 사령청, 교방청, 관노청이 수록되었다. 신숙주의 기문을 통해 객관의 건축, 이설, 중수에 대한 사실이 언급되었다.
- 누정 : 진남루, 의두문, 빈양문, 정서문, 만경루, 청풍루, 동포루, 서포루, 의하정, 동조정이 올랐다.
- 동서읍 : 동읍과 서읍을 가리킨다. 편호와 남녀 인구 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방리조가 다시 시작된다. 읍치에 해당하는 동읍과 서읍은 일반 면과 구별하되 하나의 읍처럼 인식하고 있다. 이름이 ‘면’이 아니라 ‘읍’이다.
- 방리 : 사방을 먼저 표시하였다 동쪽에 동부면, 묘장면, 마촌면, 내동면, 현내면, 삼남면, 외동면이, 서쪽으로는 관산면, 영마면, 봉산면, 구수면, 원산면, 상제도가, 남쪽에 서부면, 남죽면, 불갑면, 망운면, 진하산, 다경포가, 북쪽에 도내면, 동남쪽에 황량면, 외서면이, 서남쪽에 염소면, 마산면, 외간면, 육창면, 중서제도, 하제도, (신증) 삼도, 서북쪽에 홍농면, 동북쪽에 태안면, 삼북면이 관문과의 이격 거리와 호수, 남녀 인구수를 기록하였다. 모두 합쳐 편호 9,491호, 남녀 인구 수(남 17,648 / 여 18,555)가 기록되어 있다.
- 산천 : 산, 풍사(風沙), 하천, 나루(법성포 하나만 수록되었다), 파시(波市), 여[바위섬], 섬이 수록되었다. 해안에 접한 군 중에서도 수록된 섬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島’만 34개가 소개되었다. 산은 소재지와 산줄기의 맥상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풍사는 해안가에 형성된 해안사구를 지칭한다. 사구를 기록한 읍지는 많지 않다. 사구의 형태나 규모가 눈에 띨 정도로 두드러졌던 것 같다. 『대동여지도』에 유사(流沙)로 표기되어 있는데 같은 것이다. 파시평(波市坪)에는 다음과 같이 소주가 달렸다. ‘칠산 윗바다에 있다. 조기가 난다. 매년 봄에 서울과 지방의 상선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바다 위에서) 판매하는데, 서울의 저잣거리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이 어선들은 모두 세금을 낸다.’ 이른바 바다 위에서 열리는 시장이다. 영광의 조기 파시는 유명했다. 『여지도서』에는 ‘波市田’으로 올라 있다. 바다에 있는 밭이다. ‘평’이든 ‘전’이든 ‘거두어들인다, 수확한다, 캐낸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 형승 : ‘일곱 섬과 세 봉우리가 있다. 산세가 빙 둘러 있다. 서쪽이 큰 바다와 닿아 있다. 남쪽 지방의 중요한 고장이다.’로 표현되어 있다. 기존 시 구절에서 따온 것들이다.
- 팔기(八奇) : 영광에서 기이한 것 여덟가지를 소개하였다. 금정(金井), 철마(鐵馬), 부석(浮石), ◯미(◯米,) 풍사(風沙), 나곡(螺穀), 경위지수(涇渭之水), 부여(浮礖)의 위치와 관련 스토리가 실려 있다.
- 제언 : 묘장제, 서제보, 법교제, 군교제, 구지제 등 34개의 제언이 실려 있다. 제언의 소재지와 둘레, 수심이 기록되었다.
- 교량 : 학교, 도편교, 판하교, 고교, 주교, 입석교가 실렸다. 소재면과 사방 거리만 간단하게 서술되었다.
- 역원 : 녹사역과 가정원, 연덕원, 도편제원, 임계원, 북원이 있다. 녹사역은 소재 위치와 소유 마필 수 역비 수가 쓰였다. 원은 모두 폐하였거나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었다.
- 봉수 : 차음산봉수, 고도산봉수, 홍농산봉수가 있다. 소재면과 사방 거리가 명시되었고 응대하는 봉수가 기술되었다.
- 목장 : 임자도에 있는 목장이 소개되었다. 목장의 규모와 마필 수, 곡초량 등이 기록되었다. 지금은 없어졌다고 명시하였다. 임자도는 현재 신안군 임자면이다.
- 진보 : 다경포, 법성진, 임자진이 있다. 소속 군관과 인원 수, 소속 군선, 성의 둘레와 높이, 설치 시기 등이 기록되었다.
- 창고 : 법성창, 사창, 남창, 서창이 있다. 법성창은 조창(漕倉)의 하나로 전세를 거두는 지역이 명시되었다. 나머지 세 창은 모두 지금 없다고 기술되었다.
- 조적 : 호조, 정부, 균역청, 훈국, 선혜청, 순영문, 통영문 별 품목과 수량이 적혀 있다.
- 물산 : 재목, 약재, 과류, 화초류, 채류, 곡류, 금류(禽類), 수류(禽類), 민물고기(川類), 해산, 방적(紡績), 죽물(竹物)로 분류하고 그 아래에 개별적인 물산을 매우 상세하게 나열하였다. 물산조가 가장 자세하게 기록된 읍지의 하나이다.
- 진공 : 월령 구분 없이 개별 품목 28가지가 나열되었다. 마지막에 매 초하루에 바친다고 명시되었다.
- 한전 : ‘2,792결 29부 9속’으로 규모만 기록되어 있다.
- 수전 : 5,573결 3부 3속인데 개량하고 흉년이 드는 과정을 거쳐 현재 농사짓는 논이 4,873결 3부 3속임을 밝히고 있다.
- 전세 : 광흥창, 군자감, 친군영 별 항목과 수세량이 적혀 있다.
- 대동 : 선혜청, 균역청, 총어영 별 항목과 수세량이 적혀 있다.
- 봉름 : 수미, 사객지공미, 아록미, 결역미의 지급량이 적혀 있다.
- 균역 : 선염전망세전(船鹽箭網稅錢), 염부세전, 결전이 있다.
- 군병 : 친군영, 총어영, 병조, 균역청, 장악원, 호조, 공조, 광부부, 충익부, 감영, 좌수영, 우수영, 나주진 등의 소속 군종과 인원 수가 적혀 있다.
- 성씨 : 토성인 김씨와 정(丁)씨를 비롯하여 본관과 함께 성씨가 기술되었다. 총 45성이 있다.
- 사우 : 이천우(李天祐) 영당(影堂)을 비롯하여 23명의 사우가 등재되었다.
- 인물 : 고려시대의 인물로 김심언, 전공지, 김극검, 정찬이 올랐고,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유두명을 필두로 모두 23명이 올랐다. 이어서 절사한 인물, 효자, 열녀가 소개되었다. 여자는 남편 이름 없이 성만 썼다.
- 고적 : 삼계폐현, 임치폐현, 육창향, 진개부곡, 속사부곡, 홍농부곡, 망운부곡, 대안향, 공아부곡, 조지부곡, 효자리 등 고적에 관한 다채로운 현상이 있다.
- 사찰 : 불갑사, 전일암, 수도암, 불영대, 해불암, 봉정사, 수연사, 구수사, 이흥사, 연흥사, 금정암이 올랐는데, 봉정암 이하의 사찰은 지금 없어졌다고 명시되었다.
서지적 가치
본 읍지를 비롯하여 현전하는 영광읍지는 대부분 19세기 말이거나 20세기 초 일제시기에 편찬된 것들이다. 이들은 본 읍지가 편찬된 1891년 이후의 것으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영광군지』(규10789)가 1899년에, 『靈光續修輿地勝覽』(一簑古915.142-G115y)는 1929년에, 국립중앙도서관의 『영광군지』 역시 1921년에 간행되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것은 1760년 이후의 사실을 증보하여 편찬한 것으로 참고할 만하며, 1899년의 영광읍지 또한 갑오개혁 이후의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역사지역지리적 관점에 영광군을 이해하고할 때 본 읍지와 함께 살펴보면 유용할 것이다.
이본에 따라 ‘八怪’로 등재된 본 읍지의 ‘八奇’ 항목은 서지학적 측면에서도 의미있다. 보통 읍지에서는 풍속이나 형승을 통해 지역 감정이나 이미지를 표현했고, 비록 ‘명승’ 항목은 있지만 ‘기’는 아마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듯하다. 단순히 경치가 아름다운 명승지의 개념이 아니라 ‘명물’로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 그 유래를 찾아볼 만하다. 팔기는 오늘날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에서 소개되는 ‘가볼만한 곳’ 또는 ‘주변 관광지’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20세기 일본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읍지에도 근대적 항목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항목이 기상이나 위생과 같은 것들이다. 비록 이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근대적 변화의 단초를 보인다는 점에서 19세기 말 읍지의 기능과 성격을 재고찰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만하다.
내용적 가치
본 읍지 내 지도는 지리지에 삽입된 군현도 중에서 형식과 내용이 우수한 편이다. 서문과 목차가 없고, 항목 구성이 평이하며, 항목 내 위치 정보가 사방만 표시하고 관문 기준 거리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 점 등은 아쉽지만 항목을 기술하는 데에는 가능한 상세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 가운데 12개의 중분류 아래에 모두 216가지의 세분류 품목이 나열된 물산조는 매우 흥미롭다. 아마 어느 읍지보다 물산조가 상세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과류와 화초류, 채류를 구분한 것이나, 금류와 수류, 민물고기와 바닷고기를 구분함으로써 일반 읍지와는 다른 형식을 취하였다.
고적조는 전문적인 연구를 촉발할 만하다. 삼계폐현이나 임치폐현에 대해 백제로부터 고려 때 영광의 속현이 되기까지의 연혁이 기술되어 있으며, 향 2처와 부곡 6처, 그리고 리 1처가 고적조에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육창향은 백제와 고려 때 육창현으로 앞의 삼계현이나 임치현과 마찬가지로 영광군의 속현이었다. 결국 고려의 속현이 어느 시점에 폐현으로 분류되거나 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밖에 대안향은 지금 대안면이 되었다거나 육창향이 육창면이 되었다는 설명, 그리고 각 부곡의 위치를 사방 거리로 표시하고 있는 점 등은 향·부곡 연구에 의미있는 시사점을 줄 만하다. 조지부곡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이 ‘今未詳’이라 하였는데, 다른 부곡과 달리 유독 이 부곡에 대해서만 정보가 부족한 것인지도 조사할 만할 것이다. 기존의 향이나 부곡과는 또 다른 형태인 ‘孝子里’가 단독으로 고적조에 오른 것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옛 지역 단위가 다채롭게 수록된 것 자체가 본 읍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참고문헌
규장각,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 사부 4,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3(초판 2쇄).
양보경, 「朝鮮時代 邑誌의 性格과 地理的 認識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7.
집필자 : 김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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