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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불조(弗明弗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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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집부-소설류
· 작성주체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1735-1815) 찬
김유근(金逌根, 1785-1840)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서기순(徐箕淳, 1791-1854)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1冊 : 四周單邊 半郭 22.5 x 14.9 cm, 朱絲欄, 10行19字 註雙行, 無魚尾 ; 28.7 X 19.2 cm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16.20

안내정보

이 책은 한문 필사본(筆寫本)으로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불명불조(弗明弗措)」이며, 2부는 「변무주문(辨誣奏文)」이다. 1부는 정조(正祖)의 어머니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한중록』과 연관된 내용이 담긴 것이 두 단락이 있고, 마지막 한 단락은 순조의 묘지문인「인릉지장 (仁陵誌狀)」의 일부이다. 2부의 「변무주문(辨誣奏文)」은 서기순(徐箕淳)이 지은 것이다. 이 세 자료는 『한중록』, 「인릉지장」 ,「변무주문」에 모두 있는 내용이지만, 『한중록』과 비교해보면 「불명불조」에 몇 부분 새로운 요소들이 발견된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① 「불명불조」의 저자 :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이자, 영조의 며느리, 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선조임금의 딸로 홍주원(洪柱元)과 결혼한 정명공주의 자손이다. 홍주원의 아들 홍만용(洪萬容)은 혜경궁에게는 고조부가 되는데 대사헌으로 남인 오시수(吳始壽)와 다투었으며, 또 증조부 홍중기(洪重箕)는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할아버지 홍현보(洪鉉輔)는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혜경궁 친정은 당대의 대표적인 노론 명문이었다. 딸 혜경궁을 세자빈으로 넣은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은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혜경궁 친정과 권력을 놓고 각축을 벌였던 홍국영도 홍주원의 후손이며, 홍중기의 장남인 홍석보(洪錫輔) 집안 역시 손자 대에는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있고, 증손자 대에는 유명한 홍석주(洪奭周) 삼형제가 나온 명가이다. 혜경궁은 1735년 태어나 1744년 사도세자의 부인으로 간택되어 열 살의 어린 나이에 궁중에 들어왔다. 1762년에 남편이 뒤주에 갇혀죽는 참변을 당하고, 이어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한 다음에는 작은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이 사사되고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친국(親鞫)을 받는 등 친정이 화변을 입었다. 또한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며 시작된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기(垂簾聽政期)에는 홍낙임이 사사되는 등 다시 친정이 시련을 겪었다. 이 험난한 시기를 거치면서 『한중록』은 저술되었던 것이다. 수렴청정은 1803년 말에 거두어졌고, 이후 친정에 가해진 여러 혐의와 억울함을 차차 풀어나갔다. 1815년 12월에 죽었다.
② 「인릉지장」의 저자 :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은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경선(景先), 호는 황산(黃山)이다. 할아버지는 김이기(金履基)이고, 아버지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며, 어머니는 홍배호(洪配浩)의 딸이다. 1810년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성, 이조참판,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쳤다. 시와 서화에 능하였다.
③ 「변무주문」의 저자 :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은 본관이 대구(大丘), 자는 중구(仲汨), 호는 매원(梅園)이다. 영의정 서지수(徐志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서유신(徐有臣)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서영보(徐榮輔)이며, 어머니는 정상인(鄭象仁)의 딸이다. 자신을 포함한 5대에 걸쳐 세 사람의 정승과 네 사람의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이다. 1827년 문과에 급제하여 1833년 이조참의, 1837년 대사성, 1838년 이조참판을 거쳤고, 184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한성부판윤, 대사헌, 예조판서를 거쳐 1850년 대제학이 되었고, 1851년 병조판서, 1853년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하였다. 저서로 『종사록(從仕錄)』 1권이 있다. 시호는 청문(淸文)이다.
구성 및 내용
『불명불조』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1부는 표제와 같은 제목의 「불명불조」이며, 2부는 「변무주문」이다. 또한 1부는 『한중록』과 연관된 내용이 담긴 것이 두 단락이 있고 마지막 한 단락은 「인릉지장」의 일부이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불명불조」 : 김귀주 부자가 저위(儲位)를 흔들기 위해 사도세자가 몰래 평양을 다녀간 일을 영조에게 고한 일, 정조를 죄인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정조의 정통성을 열여섯 글자의 흉언을 지어 부정한 일, 김귀주 등이 주축이 되어 이른바 십학사를 구성하여 홍씨 집안을 공격한 일, 한유 등이 상소를 올려 홍씨 집안을 공격한 일, 홍봉한이 대장을 하면서 모은 수만 냥의 은을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가 대장이 되자 홍봉한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데 다 써버린 일, 1770년 이후 김귀주 등이 홍봉한을 공격할 때 붙인 혐의 네 가지, 즉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때 홍봉한이 뒤주의 아이디어를 냈다는 혐의,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과 은신군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혐의,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추숭을 건의했다는 혐의, 1766년 영조의 병환에 인삼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혐의에 대한 변호, 정조가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문집을 만들었는데 정순왕후 수렴청정 하에서 그것이 간행되지 못하고 도리어 문제가 된 일, 1769년 세손인 정조가 별감들과 함께 외입을 하다가 홍봉한이 별감을 처벌하자 정조가 외가와 멀어진 일, 화완옹주가 홍봉한에게 자신의 양자 정후겸을 수원부사로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홍봉한이 거절한 일, 정조가 1804년이 되면 순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순조로 하여금 외가의 억울한 일을 모두 풀어주겠다고 한 일까지 한 단락을 이루고 있다. 둘째 단락은 김종수가 홍국영과 한마음으로 작변을 한 일, 홍국영이 자기 누이를 원빈으로 만들어 왕통을 어지럽힌 일, 홍국영이 물러날 때 김종후가 홍국영의 사퇴를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다시 후회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김종수와 홍국영이 한편임을 보여준 일.
② 「인릉지장」 : 1835년 헌종1년때 지은 순조의 묘지문이다. 『순조실록』 부록 편에도 실려 있다. 이 책에 실린 것은 그 일부인데, 일부의 내용은 김귀주 무리가 역적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조가 죽자 권유(權裕) 등이 정조가 정해 놓은 대혼(大婚), 곧 순조와 순조비 순원왕후 곧 김조순의 딸과의 결혼까지 저지하려고 하였고 마침내 삼간(三揀)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 세상에 유포시킨 일, 순조가 직접 집권하면서 1804년 맨 먼저 권유에게 역률(逆律)을 시행하였고, 이어 심환지(沈煥之)의 관작(官爵)을 추삭(追削)하였으며, 김달순(金達淳)을 사사(賜死)한 일, 1807년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여 김귀주·김한록을 정향(庭享)에서 축출하고 아울러 그 도당(徒黨)과 지속(支屬)들을 죄 준 일, 혜경궁의 동생 홍낙임과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을 천주교도로 몰아 억울하게 죽인 일 등을 적고 있다.
③ 「변무주문」 : 1851년 신해년 1월 청나라에 보낸 「변무주문」이다.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는 김경선(金景善), 부사는 이규팽(李奎祊), 서장관은 이승수(李升洙), 대제학은 서기순(徐箕淳)이었다. 철종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이 1801년 신유년에 억울하게 죽었음을 알린 내용이다. 그때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로 정순왕후는 역적을 토벌했다는 내용의 주문을 청나라에 보냈는데, 그것이 잘못이니 고쳐달라는 새로운 주문이다. 은언군의 죽음은 멀리 김귀주, 화완옹주, 정후겸, 홍국영, 김종수, 심환지 등의 무리에 의해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린 것이고 특히 홍낙임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몰아 죽인 것은 전혀 터무니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철종이 즉위한 다음 자기 왕통의 정당성을 청나라에 알린 것이다. 「변무주문」의 서술자는 철종이지만, 대제학 서기순이 대신 썼다. 『철종실록』 1851년 1월 22조에 그 일부가 실려 있으며, 『일성록』 같은 날 조에 전문이 있다.
서지적 가치
수록된 세 자료의 공통점은 홍낙임을 대표로 하는 풍산 홍씨 집안의 화변에 대한 변론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자료는 모두 공표된 자료이므로, 이본으로 특별히 주목할 점은 크지 않다. 세 번째 자료를 보면 홍봉한을 ‘홍○○’로 홍낙임을 ‘○任’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로써 보면 필사자 또는 편집자가 이들의 후손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한중록』의 내용 일부를 뽑은 듯한 첫 번째 자료에 “‘이러이러하리라’는 말은 일찍이 1809년 막내 동생의 상소문에 상세히 해명하였으므로 지금 더할 말은 없다(如是如是之說, 曾於己巳季弟疏中, 已有所詳暴者, 今不必加疊.)”라는 말이 있어서 주목된다. 종전에 알려진 『한중록』은 1806년의 글이 마지막인데, 이 말을 그대로 믿으면 이 자료는 그 전에 알려진 것과 또 다른 『한중록』 이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료를 학계에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소개한 백승호는 이 말에 따라 혜경궁의 글이, 즉 『한중록』에 포함될 수 있는 글이 하나 더 발견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글은 또 다른 『한중록』으로 보기에는 몇 가지 곤란한 점이 있다. 첫째, 종전의 『한중록』 이본이 모두 가지고 있는 서문이 없다. 혜경궁은 본인이 글을 남기면 서문을 앞에 붙이는데 그것이 없는 것이다. 둘째, 종전의 『한중록』 내용에서 추가된 새로운 내용이 거의 없다. 셋째, 한글본이 아니라 한문본이다. 혜경궁이 썼다면 한글본으로 서문을 갖추고 있을 것이고 또한 종전에 말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 일정 부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자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자료는 『한중록』의 내용을 뽑아서 새로 편집한 책인 것이다. 하지만 크게 새롭지는 않아도 약간의 새로운 정보도 있고 체제도 종전의 『한중록』과는 전혀 다르므로, 『한중록』의 한 이본으로 그것도 유일본이므로 중요한 가치를 지낸다. 버클리 대학에 소장된 6책의 한글한문혼용본 『한중만록』 제5권 표지에 “七十五張也 弗明弗措一卷 伴送耳”라는 글이 붙어 있다. 다른 『한중록』의 이본, 특히 한글한문혼용본과 함께 아사미의 주문에 따라 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명불조록(弗明弗措錄)』(1책, 한문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인릉지장」 과 「변무주문」까지 버클리본과 체재가 동일하다. 표제에 ‘惠慶宮手抄’ 그 다음에 ‘正廟命名曰 弗明弗措錄’ 그리고 권수제 하단에 ‘正宗朝時僻事實’ 등의 말이 있다. 하지만 혜경궁이 썼다는 것도 정조가 제목을 ‘불명불조록’이라고 하였다는 것도 내용으로 보면 모두 터무니없는 말이다. 배접지에는 『계은실기(溪隱實記)』가 있다. 1930년대 경남 함안에서 간행된 문집이다. 버클리본과 동일본이다.
『한중록』이본은 현재 20여 종으로 확인되고 있다. 김용숙 선생의 『한중록 연구』(24면)에 상세한 서지가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한글본 두 종과 한문본 한 종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한중록』 제1부의 원본 계열 이본이 있으며, 이밖에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숭실대학교 도서관에도 이본이 있다. 나손 김동욱 선생 구장본은 단국대학교 율곡도서관으로 들어가 있는데, 현재 총6권 가운데 제2권과 제3권이 빠진 낙질로 남아 있다. 이 밖에 『한중록 연구』에서 민긍식(閔肯植) 후손가본으로 소개한 2책의 『혜경궁 읍혈록』은 대전향토사료관에서 기증받는 여흥 민씨가의 3책본 『혜경궁 읍혈록』과 같은 것으로 짐작되나 분명하지는 않다.
김용숙이 소개한 이본 외에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일석문고에 낙질본 1책(종합본 제3권 곧 제1부의 후편)이 있고,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3종이 더 있다. 연세대학교의 3종은 종합본의 제3권과 제4권만 남은 ‘을사 구월 서호 필사’의 『한중만록』과 부록을 제외한 제3부만 담은 『읍혈록』이 각각 단권으로 한문분과 한글본으로 존재한다. 한문본은 전라도 곡성의 문인 율헌(栗軒) 정일우(丁日宇)의 장서인이 있다. 한글본은 ‘을사 오월 호동산방에서 필사하였다’는 필사기가 있으며, 바로 뒤에 ‘유생 두은’이라고 하였다. 필사자의 이름일 것이다. 그 외의 자료로 중요한 것은 혜경궁의 후손인 홍기영 씨가 소장한 2책의 한글본 『읍혈록』이다. 이 이본은 제3부의 부록이 있는 유일한 이본이다. 홍기원이 교주한 『읍혈록』(민속원, 1993)에 전문이 영인되어 있다.
내용적 가치
이 자료는 『한중록』, 「인릉지장」, 「변무주문」에 모두 있는 내용이지만, 『한중록』과 비교해보면 「불명불조」에 몇 부분 새로운 요소들이 발견된다. 먼저 제목과 관련된 부분이다.
‘불명불조’는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몰라도, 기왕 분명히 밝히려면, 분명하지 않은 채로 그만두지 마라.(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는 뜻이다. 정조가 홍봉한의 문집을 편집하면서 외삼촌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를 보냈는데, 정조는 편지에서 문집의 편찬을 통해 외할아버지의 충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고 한다. 혜경궁은 이 말을 이어서 정조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것이 있다면 어찌 이렇게 남김없이 다 드러내고자 하였겠냐고 하였다. 『한중록』에도 정조가 홍봉한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를 언급하고 있지만 ‘불명불조’에 대한 말은 없다. 물론 어쩌면 『한중록』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새로 만들어 넣은 말일 수도 있다.
이밖에 『한중록』에 언급되지 않은 일 네 가지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① 김달순 상소에 대한 비판 [5면] : 1805년 12월 27일 우의정 김달순의 상소가 있었는데 여기서 1759년 7월 5일의 박치원(朴致遠, 1680∼1764)의 상소와 1761년 5월 15일 윤재겸(尹在謙)의 상소를 표창할 것을 말하였다. 『한중록』 제3부의 부록편인 「병인추록」에는 요즘 박치원, 윤재겸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정도로만 서술하였는데, 「불명불조」에는 그 사람이 김달순임을 분명히 말하며 비판하고 있다.
② 김종수, 김종후와 송금(松禁) [27면] : 김종수, 김종수가 송금대죄(松禁待罪)한 행동을 한 다음에는 홍봉한이 더욱 놀라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말. 김종수 집안과 관계가 어그러지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인 모양인데, 『한중록』에서는 원래부터 그 집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만 말하고 구체적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③ 홍국영이 은전군의 아들 이담(李湛)을 자신의 누이 원빈(元嬪)의 양자로 만들어 놓고 ‘가동궁(假東宮)’ 곧 임시 동궁, 예비 동궁이라고 불렀던 사실. [30면] ‘가동궁’이라는 말까지는 『한중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④ 김종수가 홍국영을 위해 광남지주(光南之奏)를 자임(自任)한 일 [31면] : “至於福瑮之獄 自任光南之奏”이라 한 부분이 명확히 해석되지 않으나, 김종수가 홍국영을 위해 이렇게 헌신하였다는 말은 『한중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광남은 김장생의 손자 광남군 김익훈(金益勳)을 가리킨다. 송시열은 스승의 손자인데도 불구하고 가차 없이 김익훈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김용숙, 『한중록 연구』, 정음사, 1987.
정병설(역주), 『원본 한중록』, 문학동네, 2010.
백승호, 「새 자료; 한중록의 새로운 이본- 버클리 대학 소장 불명불조」, 『문헌과해석』36, 문헌과 해석사, 2006.
집필자 : 정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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