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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대필(强懶代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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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교육/문화-문학/저술 | 자부-잡가류
· 작성주체 박양한(朴亮漢, 1677-1746)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 판종 필사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2卷2冊 : 無匡郭 無界, 10行20字, 無魚尾 ; 24 X 16.2 cm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6.14

안내정보

매옹(梅翁) 박양한(朴亮漢)(1677-1746)이 조선조 개국(開國) 이래로부터 숙종(肅宗)조에 이르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견문(見聞)과 그에 대한 감상을 기록한 필기류(筆記類) 잡록(雜錄)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박양한은 본관이 고령(高靈)이며 자는 사룡(士龍), 호는 매옹(梅翁)이다. 조부는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이며 부친은 영천군수(榮川郡守)를 지낸 지포(芝浦) 박심(朴鐔, ?-1707)이다. 그의 외조부는 숙종 조에 우의정을 지낸 동산(東山) 윤지완(尹趾完, 1635-1718)으로 일찍이 외조부에게 수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1696년(숙종22) 에 진사가 되고, 영조 때 고산현감(高山縣監), 평양서윤(平壤庶尹) 등을 역임하였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박양한은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 ?-1728)의 난에 가담한 이유익(李有翼)의 처부(妻父)이자 심유현(沈維賢)의 외종숙(外從叔)이다. 소론계 명문이었던 그의 가문은 영조조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명망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문집은 현재 전하지 않으나 이덕수(李德壽, 1673-1744)의 『서당사재(西堂私載)』와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의 『학암집(鶴巖集)』 등에 차운시(次韻詩)가 약간 남아 있다. 저술로는 인조·효종·현종·숙종의 시사(時事)를 기록한 야담집 『매옹한록(梅翁閑錄)』이 있다. 『매옹한록』은 여러 이본이 전하는데, 장서각본(2권 2책)을 비롯하여 이를 등사한 규장각본 및 고려대학교 소장본(1책), 그 밖에 도남소장본(陶南所藏本), 『패림(稗林)』(제9집) 소재본, 장서각도서 『야승(野乘)』(제5책) 소재본 등이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일본 소재본도 알려졌으나 모두 망실되었다.
구성 및 내용
본서는 16.2×24cm 2권 2책으로 이루어진 필사본으로 상권은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67장, 하권은 5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면은 12행 25자 내외로 비교적 해정(楷正)한 필체로 정사(淨寫)되어 있으며, 상권 상단 부분은 약간 마모되어 있다. 상권의 표지 안쪽 면(2쪽)에는 주필(朱筆)로 “本書著者梅溪居士, 姓氏未考, 但書中所謂外王父, 指肅宗八年壬戌, 將軍綱吉新立時, 通信正使, 尹趾完(尹暄子)也. 同時李彦綱爲副使, 本書所記亦同. 書中記鄭太和號陽坡處頗多”라고 적힌 후대 소장자의 기록이 보인다.
상권은 154항목, 하권은 104항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으며 대체로 선조에서 숙종조에 이르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저자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인조반정(仁祖反正)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괄(李适)의 난, 강빈(姜嬪)의 옥사, 북벌(北伐)논의, 노소당쟁(老少黨爭), 기사환국(己巳換局) 등 인조(仁祖), 효종(孝宗), 명종(明宗), 숙종(肅宗)대의 사건과 인물 일화가 비교적 풍부하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상당수의 일화가 저자의 외조부인 동산(東山) 윤지완(尹趾完)과 그의 외숙인 양파(陽坡) 정태화(鄭太和, 1602-1673)가 실제로 겪었거나 전해들은 것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저자의 당색에 따라 서인과 소론계의 인물 위주로 일화가 구성되어 있다.
본서의 일화 대상이거나 비교적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는 인물들을 기록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중복되는 경우는 맨 처음만 언급)
인종대왕(仁宗大王, 1515-1545),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견(趙狷, 1351-1425), 맹희도(孟希度),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정희량(鄭希良, 1469-?), 성혼(成渾, 1535-1598), 이이(李珥, 1536-1598), 이번(李璠), 송응개(宋應漑, ?-1588), 박근원(朴謹元, 1525-1588), 신흠(申欽, 1566-1628), 이탁(李籜), 강서(姜緖, 1538-1589), 강홍립(姜弘立, 1560-1627), 이준경(李浚慶), 이수광(李晬光, 1563-1628), 이양원(李陽元, 1526-1592), 이원익(李元翼, 1547-1634),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윤방(尹昉, 1563-1640), 이정암(李廷馣, 1541-1600), 이제신(李濟臣, 1536-1583),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박민헌(朴民獻, 1516-1586), 임제(林悌, 1549-1587), 노수신(盧守愼, 1515-1590), 박지화(朴枝華, 1513-1592), 김귀영(金貴榮, 1520-1593),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정순붕(鄭順朋, 1484-1548), 유인숙(柳仁淑, 1485-1545), 정렴(鄭磏, 1506-1549), 이항복(李恒福, 1556-1618), 김류(金瑬, 1571-1648), 인렬왕후(仁烈王后, 1594-1635), 이후원(李厚源, 1598-1660), 이이반(李而攽, ?-1623), 이서(李曙, 1580-1637), 이흥립(李興立, ?-1624), 윤지경(尹知敬, 1584-1634), 조속(趙速, 1595-1668), 홍서봉(洪瑞鳳, 1572-1645), 윤훤(尹暄, 1573-1627), 홍명원(洪命元, 1573-1623), 정창연(鄭昌衍, 1552-1636),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유효립(柳孝立), 유두립(柳斗立), 신경진(申景禛, 1575-1643), 장유(張維, 1587-1638), 이대엽(李大燁, 1587-1623), 채유후(蔡裕後, 1599-1660), 김자점(金自點, 1588-1651), 정태화(鄭太和), 이완(李浣, 1602-1674), 조익(趙翼, 1579-1655), 윤계(尹棨, 1583-1636), 김만직(金萬直), 임경업(林慶業, 1594-1646), 모문룡(毛文龍), 이행원(李行遠, 1592-1648), 이행진(李行進, 1597-1665), 김장생(金長生), 박지계(朴知誡, 1573-1635), 오정일(吳挺一, 1610-1670), 이괄(李适, 1587-1624),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신익성(申翊聖, 1588-1644), 박응서(朴應犀, ?-1623), 홍주원(洪柱元, 1606-1672), 심열(沈悅, 1569-1646), 홍무적(洪茂績, 1577-1656), 송상현(宋象賢, 1551-1592), 성몽정(成夢井, 1471-1571), 윤징지(尹澄之), 윤신지(尹新之, 1582-1657), 김창협(金昌恊, 1651-1708), 홍언필(洪彦弼, 1476-1504), 홍섬(洪暹, 1504-1585), 이상의(李尙毅, 1560-1624), 이지완(李志完, 1575-1617), 서성(徐渻, 1558-1631), 서경우(徐景雨, 1573-1645) , 조정호(趙廷虎, 1572-1647), 양응락(梁應洛, 1572-1620), 조석윤(趙錫胤, 1605-1654), 이시백(李時白, 1581-1660), 홍만회(洪萬恢, 1643-1709),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정광성(鄭廣成, 1576-1654), 신여철(申汝哲, 1634-1701), 이경직(李景稷, 1577-1640), 이유간(李惟侃, 1550-1634), 이경석(李景奭, 1595-1671), 이정여(李正輿), 이경여(李敬輿, 1585-1657),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정철(鄭澈, 1536-1593), 오윤겸(吳允謙, 1559-1636), 정탁(鄭琢, 1526-1605), 서익(徐益, 1542-1583), 김성일(金誠一, 1538-1593), 허엽(許曄, 1517-1580), 심지원(沈之源, 1593-1662), 이소한(李昭漢, 1598-1645), 김육(金堉, 1580-1658), 김좌명(金佐明, 1616-1671), 김석주(金錫冑, 1634-1684), 정재륜(鄭載崙), 심기원(沈器遠, 1587-1644), 구인후(具仁垕, 1578-1658), 신정(申晸, 1628-1687), 정유악(鄭維岳. 1632-?), 정유길(鄭惟吉, 1515-1588), 이단상(李端相, 1628-1669), 윤지완(尹趾完), 이언강(李彦綱, 1648-1716), 심익현(沈益顯, 1641-1683), 민정중(閔鼎重, 1628-1692), 민진장(閔鎭長, 1649-1700), 오시수(吳始壽, 1632-1681), 김수항(金壽恒, 1629-1689), 남용익(南龍翼, 1628-1692), 서기(徐起, 1523-1591), 송익필(宋翼弼, 1534-1599), 김업남(金業男), 김지남(金止男, 1559-1631), 이시매(李時楳, 1603-1667), 허균(許筠, 1569-1618), 차천로(車天輅), 윤순거(尹舜擧, 1596-1668), 이대(李垈), 홍만선(洪萬選, 1643-1715), 홍만적(洪萬迪), 정제두(鄭齊斗, 1649-1736), 김득신(金得臣, 1604-1684), 정언황(丁彦璜, 1597-1672), 오정창(吳挺昌, 1634-1680), 이민서(李敏敍, 1633-1688), 박신규(朴信圭, 1631-1687), 윤이제(尹以濟, 1628-1701), 황미(黃渼), 정선갑(鄭善甲), 이원구(李元龜, 1587-1647), 홍수헌(洪受瀗, 1640-1711), 심순문(沈順門, 1465-1504), 양영대군(讓寧大君), 양응정(梁應鼎, 1519-?), 한인급(韓仁及, 1583-1644), 정백창(鄭百昌, 1588-1635), 정두경(鄭斗卿, 1597-1673), 권필(權韠, 1569-1612), 권협(權鞈), 정만화(鄭萬和, 1614-1669), 차운로(車雲輅, 1559-?),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이진수(李眞洙, 1654-1732), 홍명하(洪命夏, 1607-1668), 오도일(吳道一, 1645-1703), 이덕수(李德壽), 조문명(趙文命), 이은상(李殷相, 1617-1678), 홍우정(洪宇定, 1593-1654) , 김창문(金昌文, 1649-1675), 김창석(金昌錫, 1652-1720), 김시(金諟, 1524-1593), 이우(李瑀, 1542-1609), 정응태(鄭應泰), 변황(卞榥, 1623-1685), 윤계선(尹繼善, 1577-1604), 서몽량(徐夢良), 김우항(金宇杭, 1649-1723), 강석기(姜碩期, 1580-1643), 민유중(閔維重, 1580-1643), 민진원(閔鎭遠, 1664-1736), 박순(朴淳, 1523-1589), 정치화(鄭致和, 1609-1677), 이세구(李世龜, 1646-1700), 조지겸(趙持謙, 1639-1685), 이태연(李泰淵, 1615-1669), 이만직(李萬稷, 1654-1727), 이서(李曙, 1580-1637), 윤안국(尹安國, 1560-1630), 이정신(李正臣, 1660-1727), 나성두(羅星斗, 1614-1663), 이위진(李蔚珍), 이옥(李沃), 유충걸(柳忠傑, 1585-1665), 유혁연(柳爀然, 1616-1680), 정혁선(鄭赫先), 정석삼(鄭錫三, 1690-1729), 정석백(鄭錫百, 1699-1781), 이명(李溟, 1570-1648), 이함(李咸), 정선흥(鄭善興), 덕원령(德原令), 이혼(李渾) 등
또한 본서에는 사기(士氣)과 사풍(士風)의 문제, 사치폐단, 문사들이 병법(兵法)에 문외한 현실, 적서(嫡庶)와 신분에 따른 인재등용, 향안(鄕案) 등에 대한 비판과 치국(治國)의 도와 가법(家法)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이밖에 시참(詩讖), 몽사(夢事), 과거(科擧), 감여(堪輿), 점복(占卜), 신마(神馬) 등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와 효행이나 우애, 신의가 있었던 평민들에 대한 일화를 상당수 기록하고 있으며 대개가 말미에 이야기를 전해들은 출처를 밝히고 있다.
서지적 가치
본서는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은 유일한 자료로, 1985년 『栖碧外史海外蒐佚本』 중 하나로 영인되어 학계에 알려져 왔다. 비록 서발(序跋)류의 글이 남아 있지 않아 매옹 박양한의 저술 의도나 제명(題名)의 함의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현전하는 『매옹한록(梅翁閑錄)』의 최선본(最善本) 이본으로 짐작되는, 해정(楷正)한 필체로 정사된 초고본(草稿本)에 가까운 자료라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전 『매옹한록』은 본서 『강나대필(强懶代筆)』의 기사를 전재(全載)하거나 축약하여 엮은 설화집으로, 『강나대필』의 258항목의 기사 가운데 흥미롭거나 특색 있는 일화를 이본에 따라 50개에서 150개 정도 췌록한 것으로 보인다. “매옹한록”(이본에 따라 “매옹한설(梅翁閒說)”, “매옹문록(梅翁聞錄)”) 이란 제목도 저자에 의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필사나 유전(流轉) 과정에서 붙여진 것으로 파악된다. 박양한보다 후대의 인물인 김려(金鑢, 1766-1822)나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글에 “매옹한록”이란 제명이 보이는 바, 본서 『강나대필』보다 『매옹한록』이 더 많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본서에 수록된 기사들은 상당수가 저자의 외왕부(外王父) 윤지완과 그의 외숙 정태화가 겪거나 들은 것이며, 이 밖에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의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선조(先祖)의 기록, 선대의 전적 등에서 참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매옹한록』의 경우는 이들 출처를 생략한 경우가 더러 있고, 출처를 언급한 경우에도 “余外王父”라는 표현 대신 “東山尹相”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발췌된 일화들은 대개가 몇몇 오탈자를 제외하면 변개없이 동일하나, 축약된 경우에는 사건 내용보다는 저자의 의론 부분이 생략된 경우가 많다. 이는 『매옹한록』이 갖는 야담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본서는 필기류 잡록과 야담집의 관계 양상을 살피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유용한 자료라 할 수 있겠다.
내용적 가치
본서는 ‘조선 중기의 인물사(人物史)’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선조에서 숙종 대의 인물 일화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비록 저자의 당색에 국한되어 남인계 인사들이 배제되긴 했으나 대체로 외조부 윤지완의 경험과 견문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어서 정사(正史)를 보완하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이들 사대부 일화를 통해 인조반정, 병자호란, 이괄의 난, 북벌논의, 기사환국(己巳換局)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이면을 핍진하게 읽어낼 수 있는데, 특히 병자호란 당시 활약했던 장졸(將卒)들의 숨겨진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어서 병자호란의 실상과 당시 대외관계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임엔 틀림없다. 이밖에 동산 윤지완 의 통신사 경험담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어서, 숙종 연간의 일본과의 관계, 대일(對日) 무역, 일본에서 도입된 종자(種子) 등도 비교적 소상히 살필 수 있다.
본서에서는 뛰어난 재주를 지닌 부인과 의술, 풍수, 천문 등에 해박하거나 덕행이 있는 사인(士人)·처사(處士), 우애나 효행, 신의가 뛰어난 향리(鄕吏)나 천인(賤人)들, 서화와 바둑에 이름난 인물들까지도 기록하고 있어서 그 편폭이 매우 넓고 다채롭다. 이들 일화 가운데에는 상당한 수준의 서사성을 보이는 것도 있어서 문학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될 만하다.
참고문헌
동국대학교한국문학연구소, 『한국문헌설화전집 8』, 태학사, 1981.
김상조, 「필기·패설·야담」, 『야담문학연구의 현단계 1』, 보고사, 2001.
집필자 : 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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