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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용지(贍用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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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WZ.0000.0000-20090716.AS_SA_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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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서-기타 | 경제-농/수산업 | 자부-농가류
· 작성주체 서유구(徐有榘, 1764-1845) 찬 역대인물바로가기
서우보(徐宇輔, ?-?) 교자
· 판종 원고본
· 발행사항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형태사항 2卷1冊 : 左右雙邊 半郭 19.8 x 14.0 cm, 有界, 10行 20字 註雙行, 無魚尾 ; 27.6 X 18.1 cm
· 주기사항 備考: 徐有榘의 自然經室 寫本의 하나임
· 현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청구기호 30.1

안내정보

2권 1책의 고본(稿本)인 『섬용지(贍用志)』는 자연경실(自然經室) 사본(寫本)의 하나로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편찬하고 그의 아들 서우보(徐宇輔, 1795-1827)가 교열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한 부분이다.

상세정보

편저자사항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본관이 대구,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이다.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를 저술한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손자이며, 생부(生父)는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저술한 서호수(徐浩修, 1736-1799)이다. 영의정을 지낸 서명선(徐命善, 1728-1791)은 종조부(從祖父)이고, 이조참판을 지낸 서형수(徐瀅修)는 중부(仲父)이다.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었다. 대교(待敎)·부제학 등을 지내다 1806년(순조 6) 김달순(金達淳) 옥사에 연루되어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1806년 정계에서 축출되어 1823년 정계에 복귀할 때까지 직접 농사지으며 농촌생활을 하였는데, 이 생활은 그의 학문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부터 농학 등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임원경제지』를 찬술하기 시작하였다. 1823년 정계에 복귀하여 이조판서·우참찬·대제학 등의 벼슬을 지내고 1839년 봉조하(奉朝賀)로 치사(致仕)하였다.
서유구는 조부 서명응과 생부 서호수, 중부 서형수의 가학(家學)을 이어 조선후기 대표적인 백과전서식 유서(類書)인 『임원경제지』를 편찬하였다. 문집으로 『풍석고협집(楓石鼓篋集)』과 『금화지비집(金華知非集)』이 있고, 그 외의 저술로는 『난호어목지(蘭湖魚牧志)』, 『누판고(鏤板考)』, 『행포지(杏浦志)』,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구성 및 내용
『섬용지(贍用志)』는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편찬하고 그의 아들 서우보(徐宇輔, 1795-1827)가 교열한 『임원경제지』의 한 부분이다. 『임원경제지』는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라고도 하는데, 본리지(本利志), 관휴지(灌畦志), 예원지(藝畹志), 만학지(晩學志), 전공지(展功志), 위선지(魏鮮志), 전어지(佃漁志), 정조지(鼎俎志), 섬용지(贍用志), 보양지(葆養志), 인제지(仁濟志), 향례지(鄕禮志), 유예지(游藝志), 이운지(怡雲志), 상택지(相宅志), 예규지(倪圭志) 등 16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임원경제지』의 『섬용지』는 영조지제(營造之制)‚ 영조지구(營造之具)‚ 초급지구(樵汲之具)‚ 취찬지구(炊爨之具)‚ 복식지구(服飾之具)‚ 관즐지구(盥櫛之具)‚ 기거지구(起居之具)‚ 설색지구(設色之具)‚ 화촉지구(火燭之具)‚ 기승지구(騎乘之具)‚ 운수지구(運輸之具)‚ 도량지구(度量之具)‚ 공제지구(工制之具) 등 13분야로 구성되어 있고, 일생생활에 필요한 각종 도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중 권 1-2는 영조지제(營造之制)‚ 영조지구(營造之具)‚ 초급지구(樵汲之具)‚ 취찬지구(炊爨之具) 4분야가 실려 있어 주거생활과 식생활 관련 도구를 설명하고 있다. 영조지제(營造之制)는 건축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건물의 배치, 척도, 지붕, 온돌, 도배, 뜰, 담, 우물 등 전통 건축의 각종 제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조지구(營造之具)는 건축에 쓰이는 재료를 목재, 석재, 흙, 벽돌, 도료(塗料)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초급지구(樵汲之具)에서는 나무하는 도구와 물긷는 도구, 취찬지구(炊爨之具)에서는 주방 도구로 솥, 칼, 그릇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임원경제지』는 중국과 한국의 각종 저서에서 인용하고 자신의 논변인 안(案)을 첨부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권 1-2에서 인용한 저서는 21종으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192회, 『열하일기(熱河日記)』 18회,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15회, 『왕씨농서(王氏農書)』 13회, 『천공개물(天工開物)』 9회, 『고금비원(古今秘苑)』 8회, 『거가필용(居家必用)』 6회, 『다능집(多能集)』 6회, 『산림경제보(山林經濟補)』 4회, 『제민요술(齊民要術)』 4회,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3회, 『태서수법(泰西水法)』 2회, 『속사방(俗事方)』 2회, 『인사통(人事通)』 2회, 그리고 『공씨담원(孔氏談苑)』·『농정전서(農政全書)』·『북학의(北學議)』·『성호사설(星湖僿說)』·『왕씨화원(王氏畵苑)』·『지세사(知世事)』·『천기잡록(天基雜錄)』을 각각 1회 인용하였다.
서지적 가치
『임원경제지』는 현재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필사본 53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 두 필사본 모두 서유구의 서재인 자연경실(自然經室)에 소장되어 있던 최종 완성본인 가장원본(家藏原本) 『임원경제지』를 필사한 것이다. 그 중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 오자가 없는 선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버클리대학교 아사미문고 소장 『섬용지』는 완성본이 아닌 초고의 형태를 하고 있다. 가필(加筆)하여 수정한 것과 간지를 붙여 내용을 추가한 것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심지어 하나의 문단 전체를 삭제표시한 것도 있다.(營造之制 - 圬墁 조의 『다능집(多能集)』 인용부분으로, 이 단락은 인용횟수 계산에서도 제외하였다.) 이러한 수정 표시는 완성본 『임원경제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버클리대학교 아사미문고 소장 『섬용지』는 『섬용지』의 초고 모습 및 『섬용지』 저작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일본 오사카[大阪] 나카노시마[中之島] 도서관에도 『임원경제지』가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도 수정 가필된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초고의 형태를 지녔으나 『섬용지』 권1-2 부분은 낙질(落帙)이다. 『섬용지』 초고는 버클리대학교 아사미문고 소장본이 유일하여 『임원경제지』 저작 상황 및 저작 과정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자료이다.
버클리대학교 아사미문고 소장 『섬용지』는 초고이다. 완성본 『임원경제지』는 현재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필사본 53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 두 필사본 모두 서유구의 서재인 자연경실(自然經室)에 소장되어 있던 가장원본(家藏原本)을 필사한 것이다.
내용적 가치
서유구는 「섬용지인(贍用志引)」에서 집이란 사람이 몸담고 사는 곳으로, 그 제도에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집들은 법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벽돌 굽는 법은 우리나라에서 들어본 적도 없고, 그릇을 빚고 진흙을 다듬는 일은 가마 만드는 법이 거칠고 비루하여 심오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솜씨가 거칠고 대부분 제도에 맞지 않아 나무하고 물 긷고 불 때고 밥하는 도구에서 있어서도 불편한 점이 많다며 당시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서유구는 중국과 한국의 자료를 인용하여 건축 제도 일반 및 건축에 쓰이는 재료, 물 긷고 불 때고 밥하는 도구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의 제도 및 우리나라 제도를 비교하여 살필 수 있고, 우리 전통 의식주 생활의 제도 및 도구, 도구의 명칭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서유구 자신의 논변을 안(案)으로 첨부하여 당시 제도에 대한 서유구의 인식을 볼 수 있다. 또한 서유구 자신의 저술인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를 대폭 활용하여 저술한 까닭에, 현재 전하지 않는 『금화경독기』의 모습을 개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참고문헌
조창록, 「楓石 徐有榘에 대한 한 硏究」,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심경호, 「임원경제지의 문명사적 가치」, 『쌀·삶·문명연구』2, 전북대학교 인문한국 쌀·삶·문명연구원, 2009.
집필자 : 한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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